단 두 번의 대결로 인간 최강의 프로기사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의 입장이 바뀌었다. 애초 알파고가 이 9단에게 도전하는 입장이었지만 처지가 달라졌다. 누구나 다 이 9단이 도전하는 입장이라고 여긴다. 인간 대부분은 이제 단 한 판이라도 이 9단이 이겨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듯하다. 바둑에 관한 한 인간이 만든 알파고가 인간을 넘어 ‘신(神)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많은 인간이 이번 바둑 대결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 두려움은 순식간에 갑을(甲乙) 관계가 바뀌고 천당과 지옥이 교차한 당혹감과 비슷하다. 컴퓨터가 인간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던 바둑에서마저 그것도 세계 최강 인간 프로가 무릎을 꿇었으니 다른 분야 보통사람이야 오죽하겠나. 알파고의 실체와 위력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으니 충격은 더욱 심하겠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인간은 드물다. 실체와 그 위력을 알 길 없는 알파고는 대부분의 인간한테 그 어둠 같은 존재다. 불을 밝히고 길을 찾아내지 않았으니 그게 인간을 위한 착한 신(神)이 될지 인간을 괴롭히는 악마가 될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의 고유 영역인 줄로만 알았던 창의(創意)를 기계가 점령하기 시작했으니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創造)한 신(神)이 인간한테 부여한 특권이 창의(創意)이고 그 창의는 인간과 자연계 여타의 존재를 구분 짓는 근거였다. 그게 창조주로 대변되는 우주적 진실이 아닐 수 있다 해도 수만 년 동안 계속된 인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우주 질서가 바뀔 수도 있는 단초가 고개를 내민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존재가 나타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이 시선은 물론 아직까지 공상과학적일 수 있다. 만화나 소설 그리고 영화의 시나리오일 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인간을 위로하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많다. 이건 다만 바둑 이야기일 뿐이라는 게 대표적인 논리다. 확대 해석을 경계하자는 의미다. 바둑을 제외한 다른 영역에서 인공지능은 아직 한계가 많다는 것이다. 인간은 또 그걸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과학기술이 디스토피아보다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 쪽이다. 특히 앞으로도 인공지능 기술을 더 발전시킬 여지가 많고 그러려고 부단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을 믿기 때문이다. 선악(善惡) 이분법으로 나눠 인간이 선(善)한 쪽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인간 모임인 사회(社會)의 진보와 그 가치를 믿는 것이다.
알파고가 신(神)과 인간 사이에서 사람을 조종하는 존재가 되느냐, 인간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유용하게 다룰 또 다른 훌륭한 도구가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자연인으로서의 개별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런 인간들의 집단인 사회여야만 한다. 과학기술이 광속(光速)으로 발전하는 지금 ‘균형 잡힌 사회 시스템’을 건설하는데 모두 집요하게 고민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 있다. 인간이 믿어야 할 건 '견제와 조화의 속성'으로서의 사회다.
그러나 사회를 믿지 않는 인간이 많다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사회를 자연 못잖게 약육강식의 정글로 몰아가는 것도 다름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많은 인간이 알파고를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가 이것이다. 위력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괴물’이 내 편이 아닐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지에 대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게다. 그럴 경우 ‘노예적인 삶의 심화’가 불가피해진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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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에 대한 두려움의 실체는 그래서 ‘터미네이터적 디스토피아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노예적 삶의 가속화’로 보는 게 맞다.
지금도 많은 사람은 스스로 누군가의 노예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