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미국)=임민철 기자]"기술에 더 관심이 있다면 최고경영자(CEO)보단 최고기술책임자(CTO)가 돼야 한다. 누군가를 돕기로 결정하는 건 CTO보다 CEO의 일이니까."
다국적 스토리지 전문업체 넷앱의 공동창립자가 자신의 경험에 비춰, 같은 창업자라 해도 그 성격에 따라 경영 책임자와 기술개발 책임자 역할은 별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업계 스타트업 선배로서 자사 스토리지를 활용하는 실리콘밸리의 두 스타트업 창립자가 함께한 자리에서 나눈 대화 속 조언이다.
넷앱은 14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한 연례 컨퍼런스 넷앱인사이트의 3일차 오전 일정으로 고객사 중 스타트업 단계에 있는 기업의 창립자 겸 CEO들을 초청한 자리를 마련했다.
넷앱 공동창립자인 데이비드 힛츠 총괄부사장(EVP), 파일통합검색서비스 '아고라(Agora)'의 창립자인 아담 모이자 CEO, 맞춤형 부동산중개서비스 렌탈루스트(Rental Roost)의 창립자인 니틴 싱게이트 CEO가 패널로 참석했다. 사회를 맡은 실리콘밸리의 엔젤투자자인 스테판 벌퍼가 이들에게 창립 배경이 된 '문제와 혁신'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도 넷앱에 인수된 스타트업 '아이온그리드(ionGrid)'의 창립자다.
■스타트업, 왜 차리나…"문제 해결 하려고"
힛츠 EVP는 여기서 포춘500 기업으로 등재된 다국적 스토리지 전문업체로서가 아니라, 20여년 전 일으킨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장해 낸 기술 스타트업 창립자 선배로서의 경험담을 전했다. 요약하면 컴퓨팅 인프라 트렌드가 메인프레임 시스템과 터미널 방식에서 유닉스 플랫폼과 PC 확산을 통한 서버-클라이언트 환경이 늘면서 태동한 새로운 유형의 스토리지 시장 수요를 겨냥했다는 얘기다.
"(창업 배경을 묻자) 일자리가 없었다. (좌중 웃음) 당시 파일서버는 크고 비싼 CPU기반 장비 뿐이었는데, 네트워크 대역폭이 늘고 PC 플랫폼이 빨라지면서 저렴하게 대체 장비를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이를 위한 프로그래밍 작업이 넷앱 기술의 근간이 됐다. 초창기 고객은 기존 IT 환경을 만족스러워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프로그래머라든지, 기술중심회사의 IT인프라 담당과 같은 소규모 그룹이 타깃이었다."
싱게이트 렌탈루스트 CEO는 개인적인 불편을 해결할 방법에 착안한 사업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긴 케이스다. 단순한 부동산 렌탈 서비스를 만들었다가, 이용자들의 IP주소와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해 학군이나 소비환경이나 출신지 인프라와 비슷한 지역 부동산 매물을 소개하는 식으로 진화했다. 현재 미국내 1억3천만건의 매물 정보를 제공한다는 설명이다. 프로파일 데이터의 정확도는 60~70% 수준이라 한다.
"몇년 전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북부로 이사했을 때 내 여건에 맞는 지역 부동산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구글 검색은 아이를 비롯해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 어떤 학군이나 지역 상권이 적절한지와 같은 정보를 못 찾았다. 이런 문제를 겪는 사람들을 위해 프로파일 기반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정부로부터 받은 미국 전역의 정보와 방문자 IP로 수집한 데이터에서 특징을 분석해, 그에 적합한 장소를 추천해 준다."
모이자 아고라 CEO가 밝힌 창업 스토리도 자신이 느낀 불만을 해소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같았다. 개인 소비자 입장에서의 편의성뿐아니라 기업 환경에서 필요로하는 생산성 향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메시지다. 서비스는 비공개로 시범 제공되고 있다. 아고라는 초기 사용자층으로 학생을 겨냥했다. 현재는 이를 중소기업 사용자로 넓혔다. 대기업 환경 지원을 위한 기술도 준비 중이다.
"내가 어딘가에 저장한 파일을 일일이 찾기 귀찮아서 아고라라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과 협업할 수 있다. 파일을 내 컴퓨터에 저장하든, 구글드라이브에 올리든, 드롭박스 서비스에 놓든, 아고라에서 모두 한 번에 검색할 수 있다. 해당 파일에 즉시 접근하고 편집하고 공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PC 사용자가 이를 친숙하게 다루기 위한 윈도용 인터페이스도 지원한다.
■기업문화는 리더십에 달렸다?
스타트업의 창업 배경 다음으로 나온 주제는 목표달성을 위한 기업문화 형성 방법이었다. 사회자 벌퍼는 참석자들에게 좋은 기업문화를 갖추고 직원들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갖추기까지의 어려움에 초점을 맞춘 질문을 던졌다.
모이자 CEO와 싱게이트 CEO의 답은 비교적 단순했다. 직원들에게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표를 구체화하고 창업자의 비전을 제시해, 직원들이 여기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대답이 나온 이유는 두 회사 모두 업력 3년 미만, 직원 수 20명 미만의 제한적인 규모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신이 차린 회사가 스타트업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힛츠 EVP의 답변은 좀 달랐다.
"난 창업을 했지만 (모이자와 싱게이트처럼) CEO를 맡진 않았다. 넷앱 직원 수가 한 1천명 될 때 내 매니저 경험은 3~4명의 부하직원을 관리했던 수준이다. 이후 CEO가 내게 200여명 규모의 넷앱 엔지니어링 팀 책임자 역할을 맡겼다. 내가 그 일을 잘할 거라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제품에 대한 이해, 영향력 등 대략 4가지 요건 중에 3가지를 충족한다고 했다. 그 3가지가 뭔진 말을 안 해줬지만…"
세 창업자가 내놓은 답변의 공통분모는 리더십이었다. 스타트업을 이끄는 어려움의 상당부분을 리더십으로 메워야 한다는 뉘앙스였다. 리더십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CEO가 전문성을 바탕으로 발휘해야 할까, 아니면 창립멤버가 주도해야 할까? 힛츠 EVP는 이렇게 답했다.
"반드시 CEO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 같다. 조직에서 누군가가 CEO처럼 일해야 하고, 누군가가 마케팅의 리더처럼 일해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전체 그룹 안에서 리더십의 비전이 될만한 방향성을 누군가 제시할 수 있으면 된다."
이렇게 보면 리더십은 어떤 고정된 개념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작은 조직일 때 필요한 리더십과 고도 성장 과정에 있는 조직의 리더십, 성숙한 조직에서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에 필요한 리더십은 제각각일 수 있다. 리더십의 기준은 결국 스타트업이 전체 수명주기의 어떤 흐름을 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맞물린 시장 발굴과 수익성 확보 얘기가 이어졌다.
기술 스타트업 넷앱은 어떻게 성장했을까?
힛츠 EVP는 사업 초기에 시스코시스템즈와 야후같은 IT기업을 공략하는 데 주력했다. 의료 또는 항공 산업 분야 고객을 확보하긴 쉽지 않았다고 한다. IT기업의 경우 담당부서 직원들의 호응이 있었지만, 비IT기업에선 비용보다 안정성과 성능을 훨씬 중시한 편이었다. 그러다 경제 거품이 꺼진 시기에 이런 회사의 예산 압박으로 CIO들의 비용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마침내 넷앱의 제품이 빛을 발했다.
사실 모든 스타트업들이 초창기 넷앱처럼 기회를 잡아 수익을 만들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다. 어느정도는 괜찮은 기술과 제품을 갖고 있는데도 수익을 내지 못해 무너지는 것이다. 차라리 적당할 때 인수 제안이 들어오면 회사를 파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싱게이트 CEO는 이미 2번이나 들어온 인수 제안을 거절하고 회사를 더 키울 계획이다. 서비스를 좋아 하는 이용자층이 두텁고 2년~2년반 안에 힘든 시기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란 전망에서다.
모이자 CEO 역시 아직 구현하지 않았지만 속도 개선과 같은 기술개발을 통해 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고, 이밖에도 더 많은 이용자를 끌어모을 수 있을만한 '비밀병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창립자 겸 CEO의 답변은 돈벌이보다도 창업의 출발점이 됐던 문제 해결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들의 태도는 회사를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렸거나 괜찮은 기술을 만들어냈다 하더라도, 이걸 직접 문제를 겪는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못한다면 스스로에게 별 의미가 없다는 식이다. 뒤집어 말해 이들은 사람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힛츠 EVP 역시 이들에게 동조하는 듯하다. 성공적인 창업은 젊은 기업가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줄 수 있지만, 처음부터 그걸 목표로 삼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하던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32살이 됐을 때 내게 갑자기 1천만달러가 생겼다. 누군가 은퇴할 거냐고 물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게 된 것 아니냐고. 하지만 32살에 은퇴라니, 난 상상도 못 했다. 부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물론 돈이 있는 건 좋지만, 그건 동기부여의 최대 요인이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취미로 컴퓨터를 납땜하며 만들었고, 대학교에서도 컴퓨터과학이 너무 좋았다. 그걸로 멋진 걸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기업가 DNA는 따로 있을까…"어느 정도는 그렇다"
이쯤 되면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이렇게 어림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만족과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
그런데 사실 문제를 해결해서 만족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이 회사를 차리진 않는다. 누구나 스타트업 창립자가 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기업가 DNA라는 게 따로 있는 걸까. 사회자도 세 명의 참석자에게 같은 화두를 던졌다. 창업자 기질은 타고나는 것인지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이들은 어느정도, 그런 기질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모이자 CEO는 "같은 운동선수라 해도 기질적으로 많이 움직이면서 덜 피곤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겐 다른 선수가 따라오기 쉽지 않은 재능이 있는 것이고 (외과) 의사라면 병을 고치기 위해 피를 보는 일을 무서워하지 않고 수술을 잘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역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능력"이라며 "기업가도 마찬가지로, 특정 문제 해결에 필요한 종류의 창의력을 갖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싱게이트 CEO는 "내 커리어에서 뭘 달성하고 싶은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 그걸 지금 해결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할지를 생각했다"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질은 어느정도 타고나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규모가 커지면 나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경영권을 맡길 생각"이라며 "창업자, 기업가들이 '이 회사를 이끄는 데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실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힛츠 EVP도 창업을 할만한 자질과 품성이 따로 있을 것이란 점에 이견을 달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똑같이 창업을 선택한 사람들 속에도 경영자와 기술자의 개성은 구별된다고 봤다. 자신이 넷앱이라는 기술회사의 창립자였지만, 자신은 두 스타트업 창립자처럼 기술과 경영을 함께 맡진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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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을 개발하려는 사람도 있고, 기업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서로 연결하려는 사람도 있다. 기업은 다양한 신념과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혼자서 둘 다 할 수도 있겠지만, 브레이크포인트(분기점, 선택의 기로)가 생길 게다. 난 조직 안에서 여러 의사결정 단계를 거치거나, 보고를 받는 것과 같은 CEO의 역할은 별로다. 기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지 탐구하는 걸로 만족을 느낀다."
엄밀히 말해 힛츠 EVP의 현재 역할은 일반 기업이나 스타트업의 CTO와 같은 기술개발 총괄 책임자와 개념상 약간 차이가 있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회사의 기술 전략을 제시하는 일에 가깝다. 전략을 바탕으로 실제 기술을 구현하는 역할은 개발부서에서 수행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컴퓨터에 하는 (코드를 짜는) 프로그래밍 대신 말로써 사람들의 머리속에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