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 독일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가전 박람회 IFA가 내달 4일 개막을 앞두고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자업체인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자존심 싸움으로 박람회 자체보다 더 큰 이슈를 몰고 왔던 세탁기 파손 사건이 발생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간다.
사건 발생 1년이 지났지만 LG전자 최고경영진이 연루된 삼성전자 세탁기 파손 사건의 진실 공방은 날로 격화되는 양상이다. 양사는 대승적 차원에서 현재 진행 중인 모든 소송을 철회하는 화해를 결정했음에도 이미 형사 사건으로 진행 중인 세탁기 파손 사건의 법적 공방은 이와 무관하게 진행 중이다.
지난달부터 이 사건의 공판이 본격화되면서 새로운 정황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현장 CCTV 동영상이 다수 공개됐고 비공개 상태에서 문제가 된 세탁기 실물도 검증이 진행됐다. 또 증인 진술을 통해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 부문 사장이 이후 세탁기 실물을 확인했다는 사실 등 새로운 정황들도 나오고 있다.
지난 17일 진행된 첫 증인신문을 포함해 현재까지 공판 과정에서 드러난 사건 정황과 사건의 쟁점을 정리해본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현지시간으로 2014년 9월 3일로 유럽 최대 가전박람회인 IFA 2014 개막을 이틀 앞둔 날이다. 사건 발생 장소는 독일 베를린 시내 가전 양판인 ‘자툰(Saturn)’ 사 매장이다. 우리나라 하이마트와 유사하게 여러 제조사의 제품을 전시하고 취급하는 곳이다.
이날 오전 10시 30분경 LG전자 H&A 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조성진 사장 일행은 자툰 사에서 운영하는 베를린 시내 슈티글리츠 매장에 들렀다. 조 사장 일행은 매장에서 1시간여를 머물며 세탁기와 냉장고, 식기세척기 등 제품을 두루 살펴봤다.
마침 그라운드층(우리나라의 1층에 해당)에서는 삼성전자가 IFA 전시회 기간을 맞아 이날부터 매장 일부를 임차해 특별전시를 진행 중이었다. 조 사장은 이곳에 전시된 전략 신제품인 크리스탈 블루도어 세탁기의 도어를 열어 꾹꾹 눌러 확인했다.
이날 오후 12시 40분경 한 호텔에서 회의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베를린 시내 한국 식당으로 이동한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 부문 대표 일행을 수행 중이던 삼성전자 주재원 신 모 차장한테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생활가전 담당 주재원으로부터 “식사 직후 방문 예정인 슈티글리츠 매장에 전시된 세탁기가 LG전자 임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 의해 파손됐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윤부근 사장 역시 오후 일정으로 자툰 슈티글리츠 매장과 자툰 유로파센터 매장을 연달아 방문하려던 참이었다. 이곳은 전시장 및 숙소와 인접한 대표 매장으로 IFA 기간 중 각 사 경영진들이 즐겨찾는 코스라고 한다.
점심 식사를 마친 윤 사장 일행이 슈티글리츠 매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 30분경이다. 윤부근 사장은 이곳에서 직접 세탁기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직원들과 “문에 손상이 확실히 생겼다”면서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게 아니다”라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전화를 받았던 신 차장 역시 문이 정확히 닫히지 않아 이격(離隔)이 발생하고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후 윤 사장 일행은 계획대로 자툰 유로파센터 매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자사 세탁기가 동일한 형태로 파손된 것을 확인했다. 문을 열고 닫을 때 흔들리며 ‘끼익 끼익’ 하는 소리가 난다는 진술도 나왔다. 또 이전 슈티글리츠 매장 제품보다 이격이 더 크고 소리가 크다는 내용도 직원들의 진술서에서 나왔다. 윤부근 사장 역시 소리가 크고 문을 열고 닫을 때 흔들린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15명 정도의 일행은 2시 정도까지 매장에 머물렀는데 당시 삼성전자 직원들은 LG전자 직원으로 의심되는 인물들이 경찰차에 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최초 사건을 목격했던 직원들이 세탁기를 파손한 것이 LG전자 직원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양복에 LG 로고가 선명한 뱃지를 달고 있었고 수첩, 열쇠고리, 가방 등에서도 LG 로고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편, 윤 사장 일행이 식당에 머물 당시 이번 사건의 또 다른 증인인 손 모 상무도 동일한 보고를 받았다. 자툰 매장에서 파손한 사람이 경찰에 잡혔는데 노트에 LG 로고가 있어 LG전자 직원으로 의심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곧바로 삼성전자 독일법인장인 명성완 전무에게 보고했고 식당에서 30분 거리인 유로파센터 매장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20~30분 후 LG전자 직원으로 의심되는 사람 2명이 유로파센터 매장 사무실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손 상무는 이들에게 신원을 밝힐 것을 요구했지만 이들은 영수증을 보여주면서 “문제가 된 제품을 모두 구입하기로 매장 측과 얘기가 끝났기 때문에 신원을 밝힐 필요가 없다”며 거부했다.
실랑이가 벌어지자 손 상무는 LG전자 독일법인장인 송기주 상무에게 항의 전화를 했고 그제서야 두 사람이 이번 사건의 피고인인 조한기 LG전자 세탁기연구소장 상무와 현지법인 주재원 박 모 대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은 독일 경찰에 신분 확인을 위해 경찰차를 타고 이동했고, 이 때 유로파센터 매장에 도착한 윤 사장 일행도 이를 목격했다.
손 상무가 슈티글리츠 매장에서도 동일한 형태의 파손이 발생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은 이날 오후다. 삼성전자는 이후 설명 과정에서 유로파센터 매장에서 현지 경찰이 출동하는 등 소란이 있은 후 다른 매장들의 제품을 확인하던 중 슈티글리츠 매장에서도 크리스털 블루 세탁기 3대가 파손된 것을 파악하고 현지 경찰에 신고했다고 밝힌 바 있다. 조사 과정에서 매장 CCTV에 조 사장 등이 크리스털 블루도어 세탁기 문 연결부(힌지)를 망가뜨리는 장면이 찍힌 것이 확인됐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현지시간으로 그날 밤 11시께 전시회 출장 기자단에 포함된 국내 언론사에서 최초 보도가 나오면서 논란이 본격화됐다. 다만 당시 언론보도에는 LG전자 임원 A씨만 언급됏을 뿐 조성진 사장이 사건에 연루된 것이 밝혀진 건 사건이 발생하고 열흘이 지난 14일 삼성전자의 수사 의뢰 입장에 ‘국내 업체의 사장’이라는 언급을 통해서다.
당시 삼성전자는 “슈티글리츠 매장 측과 삼성전자가 CCTV를 확인한 결과 양복 차림의 동양인 남자 여러 명이 제품을 살펴보다가 그 중 한 명이 세탁기를 파손시키고 현장을 떠나는 장면을 확인했고, 제품을 파손시킨 사람은 다른 매장에서 당사 제품을 파손시키다가 적발된 직원이 소속된 회사의 사장으로 확인됐다”면서 “그럼에도 국가적 위신과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현지에서는 사안을 확대하지 않고 국내에 돌아와 해당 사건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고 밝혔다.
실제 조성진 사장은 사건 발생 다음날인 4일 독일 베를린 시내 한 식당에서 이뤄진 기자간담회 일정을 소화하기도 했다.
역시 사건 발생 다음날 삼성전자 직원들은 다시 매장을 방문해서 문제가 된 제품의 상태를 확인하며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했고 CCTV 영상도 확보했다. 사건에 연루된 LG전자 임직원들을 독일 경찰에 고소한 것도 이날이다.
같은 날 LG전자는 "해외 출장 때 경쟁사 제품과 그 사용환경을 살펴보는 것은 어느 업체든 통상적으로 하는 일”이라며 고의 훼손 의도가 없다고 반박하면서 “다른 회사 세탁기들과는 달리 유독 특정 회사 해당 모델은 세탁기 본체와 문짝을 연결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검찰 기소 과정에서 조성진 사장에게 재물손괴 혐의와 함께 명예훼손 혐의가 추가된 이유다.
사건의 증거물인 세탁기 7대는 현재 검찰에서 보관중이다. 사건 발생 직후 세탁기의 상태를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도 다수 증거물로 채택돼있다. 피고인인 조성진 사장 일행의 동선은 모두 확인한 상태다. 심지어 사건 당시 모습이 여러 각도에서 고스란히 촬영된 CCTV 영상도 있다.
상황은 이러한데 동일한 사실을 두고도 검찰과 변호인의 관점은 첨예하게 엇갈린다.
파손된 세탁기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부터가 싸움의 대상이다. 변호인들은 '재물을 손괴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손됐다고 주장되는 세탁기를 촬영한 동영상을 보고도 "(문짝이 덜렁덜렁할 정도는 아니니 이건) 파손된 것이 확실하다"고 언급하기 애매할 정도이다. 변호인들은 증인신문 과정에서 동영상을 재생하며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증인들의 진술도 엇갈린다. 앞선 검찰 조사 과정에서 문을 여닫을 때 ‘끼익끼익’하는 소리가 났었다는 진술이 있는 반면 소리는 안 들렸다는 증언도 있다.
변호인들은 “윤부근 사장을 비롯한 삼성전자 관계자들이 해당 제품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면 자사 전략제품이 왜 그토록 중요한 IFA 전시회 기간 중 여러 사람들에게 노출될 것을 알면서도 문제가 있는 제품을 새 제품으로 교체하지 않았느냐”고 문제제기 하고 있다. 함의를 해석하면 재물손괴 여부를 따질 만큼 해당 제품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현재까지 나온 증언에 따르면 현지법인 주재원들은 독일법인장이나 본사로부터 해당 제품에 문제가 있으니 교체하라는 지시를 들은 기억은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해당 제품이 언제까지 그 곳에 전시됐는지에 대해서는 “생활가전 담당이 아니므로 모른다”는 취지의 진술이 나왔다. 추후 검찰에서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해당 제품은 사건발생일인 3일부터 12일까지 열흘 간이나 슈티글리츠 매장에 전시돼있었다.
이후 세탁기의 행방에도 의문이 남아있다. 해당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국내에서 크게 이슈가 됐음에도 LG전자는 물론 삼성전자도 해당 세탁기의 행방에 대해 줄곧 "모른다"거나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응해왔다. 하지만 해당 세탁기가 11월까지 약 두 달 간 삼성전자 현지법인에서 보관중이었던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삼성전자는 문제가 된 세탁기 7대 중 슈티글리츠 매장에 진열됐던 2대를 반품 형식으로 반환받았다. 슈티글리츠 매장에 있던 또 다른 세탁기 1대는 일반 진열품이 아니라 삼성전자가 임차한 특별 전시 공간에 진열됐던 제품으로 삼성전자 소유였기 때문에 반품 등 절차는 필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나머지 유로파센터 매장 진열품 4대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LG전자는 유로파센터 매장에서 제품 파손을 문제 삼자 세탁기 4대를 구입하기로 하고 비용을 치렀다. 사건 조사 과정에서 유로파센터 매장에서 파손된 것으로 잠정 확인된 것은 세탁기 1대와 건조기 1대 등 2대지만 현장에 있던 LG전자 박 모 대리는 “문제가 커지지 않도록 총 4대를 구입하기로 했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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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로파센터에서는 LG전자 측에 파손된 진열품 세탁기 4대가 아닌 새 제품 4대를 배송했다. 이에 대해서는 "증거 보존을 위해서"라는 진술과 "LG전자가 새 세탁기 가격을 지불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재판부는 내달 1일 조성진 사장 등 피고인 3명에 대한 3차 공판을 속행한다. 오는 11월 중순까지 증인 10여명에 대한 신문절차가 진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