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사람에 대한 관점이 다릅니다.
첫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평사원으로 일하다가 8년이 넘어서 관리자가 되었다. 입사할 때만 해도 인사담당 부장은 “4년만 지나면 매니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잘 흘러가지 않았다. 회사의 급격한 성장으로 초기에 입사한 선배들은 수년 만에 매니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동료는 두배의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서 기회가 왔다. 일본에서는 20년은 되어야 부장이 되는 이유를 그때에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신임 매니저 교육을 5일간 참석했다. “이제 여러분은 우리회사의 진짜 멤버가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라며 강사가 오프닝을 한다. 들으니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그 이야기를 평사원이 엿 들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씁씁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8년 동안의 직장 생활은 진정한 직원의 삶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부하 직원에 대한 매니저들의 관점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선민의식이 밖으로 뻗칠 때는 칼과 같지 않은가?
에피소드 2: 사람은 만들 수 있습니다.
보은하는 마음으로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저녁을 같이 한 적이 있다. 우리 부부가 먼저 걱정의 말을 던졌다. “열심히 공부를 안하니 걱정이예요.” 선생님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응답했다. “아이는 만들 수 있습니다.” 십수년간 지도하면서 여러 아이들을 봐 왔는데, 부모님이 적극 투자(?) 하니 돌머리 학생도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더라는 것이다.
솔깃해서 물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는 다른 학교 선생님과의 과외를 은근히 권해 왔다. 당시에는 남 모르게 진행해야 하는 위험한 제안이었다. 아이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수단이 옳지 않다는 생각에 조용히 사양하는 전화를 걸었다.
“아이는 만들 수 있습니다”라는 말의 함의를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년전에 퇴직한 선생님이 운영하는 종로의 한 학원에서 몇달간 공부한 적이 있다. 서너명이 같이 다녔는데 총명함이 부족한 나는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생겼다. 학교 시험때 받아 본 문제의 지문이 학원에서 지난 주에 배운 내용과 똑 같았다. 도둑질에 걸린 것처럼 심장이 꿍꿍 뛰고 머리가 복잡해져서 시험을 더 망쳤다. 그 많은 영어 문장 중에서, 그 시점에 그런 우연이 그냥 생길 일이 없었다.
에피소드 3: 사람은 안 바뀝니다.
상사가 “사람은 잘 안 바뀝니다” 말하면서 역량이 부족한 직원을 내치라고 내게 주문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직원 착하지 않나요? 기회를 주세요. 성경책에 언급된 것처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라고 말씀하셨던 상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궁금했다. 기업체가 교육기관도 아니고, 자선 단체도 아니니 회사에 부담되는 직원을 오랜 동안 안고 있을 수 없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정말 사람은 안 바뀌는가?
스타트업의 경우는 초기 열정의 시대가 지나고, 규모 확산의 시간이 온다. 이즈음 열정으로 일했지만 역량이 모자란 직원과 회사의 기대치 사이에 큰 격차가 드러난다. 교육의 기회도 주고 전직을 시켜보아도 안되는 직원이 생기기 마련이다. 감내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1 년은 지켜보려 노력했다. 그러니, 상사로 부터 직원을 내치라는 하명이 내려오니 난감했다. “사람은 바뀔 수 있습니다. 기회를 줍시다” 말해보았지만 결국 상사의 의견대로 처리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사람에 대한 관점을 이리저리 바꾸곤 한다. 어느 누가 “나는 일관되게 행동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내게 호감을 보이는 직원이라면 “그 친구는 잘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줍시다.” 왠지 얄미운 직원이라면 “사람은 죽어도 안바뀌니 애쓰지 맙시다”하며 쉽게 직원을 포기하고 내치려고 하지 않았을까? 조금만 자신을 성찰한다면 자신의 상황적 태도변화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이러한 태도로 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고백한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사람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관점이 역사상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음을 상기하고 싶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사람은 안 바뀐다는 관점의 진영을 “본성론자”라 부르고, 사람은 만들 수 있다는 관점의 진영을 “양육론자”라 부른다. 이어령 선생님이 박학과 통찰을 칭찬한 강창래의 역저 “책의 정신”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는 본성론자의 극단에는 우생학을 지지했던 나치즘이 있었고, 양육을 통해 사람을 얼마든지 개조할 수 있다는 양육론자의 극단에는 공산주의 사회가 있었다.” 역사에 대하여 약간의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두개의 이데올로기가 인류에게 얼마나 참혹한 고통을 주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고하고 순박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죽었다. 결국 둘 다 왕창 틀린 것이다. 생각의 차이가 극단에 치우친 경우, 우리에게 주는 폐해를 감시하고 모니터링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가타카(Gattaca)에서는 신의 섭리로 열등하게 태어난 청년이 유전자 조작으로 아기를 주문하여 생산하는 세계에서 편견과 상식을 깨버리고, 우주조종사가 되고픈 꿈을 이루는 스토리가 나온다.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인간은 한정되지 않는다는 작가의 메시지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유전자에 의하여 100% 인생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요, 척박한 환경에서도 노력만 잘하면 100% 성공하는 불굴의 존재도 아니다. 양자물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물질을 이루는 원자의 요소를 계속 분해하여 들어가면 마지막에는 물질은 사라지고, 찾고자 물질이 있을 확률만 남는다고 하는데 이를 “불확정성의 원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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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람도 불확정되어 있으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어려운 화두를 대할 때마다 혜안이 깊은 친구 김성경에게 조언을 구한다. “본성과 양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하며 문자를 던져보았다. 날라온 답변은 “너무 무거웁고 무서운 이슈라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부하 직원에 관하여 상사로서 무심코 갖는 이분법적 관점이, 인류를 엄청나게 참혹하게 만든 무서운 담론의 모태임을 깨우치니 모골이 송연하다. 이제는 아래 직원에 대한 관점을 함부로 이야기하기 두렵다.
제대로 정신을 못차리면 참혹한 호로코스트는 인류에게 또다시 재현될 수 있다. 남양주에는 청소년공동체 “동네쌤(Sam)카페”가 있다. 수개월 전에 이곳을 방문하여 NGO 운동가 김경연씨와 만났다. 그가 던진 한마디 “어떤 일보다도 사람 앞에 다른 가치를 세워두면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안에 잡아둘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을 어느 이데올로기에 가두려고 강제하면 항시 폭력이 따라온다.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가? 종교도 철학도 정책도 생산성도 능률도 사랑조차도 사람 앞에 한발 더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결국 ‘사람이 궁극적인 답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얻었다. 이 메시지가 나와 여러분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생활의 지혜를 밝혀 주기를 기원한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