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전자산업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간 '세탁기 파손' 사건이 진실공방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최근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는 ‘정윤회 문건’ 공방을 연상케 한다. 요즘은 손바닥으로도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혹세무민의 무리들이 많다보니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리는 세상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가전산업의 맏형 자리를 놓고 경쟁해 온 두 회사 간 다툼은 과거에도 종종 벌어졌다. 다만 이번 사건이 본연의 기술 경쟁이 아닌 ‘수준 낮은 진실공방’ 이야기라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두 회사 사이에 쌓인 해 묵은 감정까지 겹치다보니 이번 일이 쉽사리 끝나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애초 사건의 발단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삼성전자는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IFA 기간 중 LG전자 조성진 H&A 사업본부장 사장을 포함한 임직원 5명을 독일 현지 사법기관과 서울중앙지검에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재물손괴 등의 혐의로 수사 의뢰했다.
이들이 현지 두 개 매장(자툰 스티글리츠-유로파센터 매장)에 전시중인 자사 신형 드럼세탁기 제품의 문짝을 고의로 파손했다는 게 삼성 측의 주장이다. LG전자 수뇌부인 조성진 사장이 연루된 사건은 자툰 스티글리츠 매장에서 벌어진 파손 행위다.당시 LG전자는 해외에서 전시회가 열리면 경쟁사 제품을 둘러보는 일은 통상적이라고 적극 해명했다. LG전자 측은 “해당 매장 측에 부서진 세탁기 값을 변상했으며, 현지 검찰도 불기소 처분을 내려 원만히 해결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단순 재물손괴 사건으로 끝날 것 같았던 ‘세탁기 파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유로파 매장 관련 사건은 담당 임직원이 소환조사를 받고 불기소 처리됐지만 또 다른 매장에서 발생한 사건의 핵심 인물인 조성진 사장이 검찰 소환을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일이 커졌다. 검찰이 급기야 조 사장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회사 수뇌부에 대한 검찰 소환 압박에 참다못한 LG전자는 이달 중순께 서울지검에 삼성전자 임직원을 증거위조와 명예훼손 혐의로 맞고소했다. LG전자 측은 고발장에서 삼성전자가 언론사에 제공한 동영상에 ‘삼성전자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세탁기에 여러 차례 충격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LG전자 관계자는 “해당 세탁기가 삼성전자가 증거물로 제출한 세탁기와 동일한 것이라면 제출되기 이전에 훼손이 있었다는 것이므로 증거위조에 해당할 수 있다”며 “위조된 증거물을 사용해 LG전자의 명예를 훼손했으므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에도 해당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삼성전자가 자툰 유로파센터라는 특정 매장에서 파손된 제품을 증거물로 제출하는 것을 계속 미루다가 최근에야 제출했다며 증거은닉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 같은 LG전자의 맞고소가 사실을 호도하고 검찰 수사를 지연시키려는 ‘물타기 작전’으로 보고 있다. 또 LG전자가 주장하는 독일 현지사건 종결이나 증거 위조도 사실을 호도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특히 출국금지 조치에 따라 조 사장이 다음 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쇼 ‘CES2015’ 불참할 수 있다는 세간의 우려에 대해서는 “CES가 15일 이상 남았으므로 신속히 출석해서 검찰수사에 협조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라고 했다.
삼성전자는 명백한 CCTV 동영상이 있는 만큼 LG전자와 조성진 사장은 더 이상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하지 말고 검찰 수사에 성실히 응하기를 바란다는 입장이다.
이번 삼성과 LG전자의 '세탁기 파손' 사태를 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갈래다. 내년 글로벌 경영위기이 예상되는 만큼 불필요한 감정싸움을 빨리 접고 선의의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과 명백한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도 두 회사간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게 중론이다.
과거 삼성과 LG전자 사이에 벌어졌던 크고 작은 다툼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이번 '세탁기 파손' 사건을 곱씹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2년 전 벌어진 ‘냉장고에 물 붓기’ 해프닝
올해 세탁기 문제가 부상하기 전, 두 회사는 지난 2012년 냉장고와 관련해 소송전을 벌였다.
냉장고 문제의 경우 ‘용량’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감정이 격화됐던 부분이다. 시작은 삼성전자였다. 유튜브에 게재한 영상을 통해 자사 제품의 용량이 더 많다는 점을 강조하는 영상을 게재하자 LG전자가 이에 반발, 가처분신청과 명예훼손 등의 명목으로 소송을 제기하며 갈등을 빚었다.
당시 냉장고 용량을 측정하기 위해 물을 담은 일정한 크기의 용기를 냉장고에 채워 넣어 어느 쪽에 더 많이 들어가는지를 두고 신경전이 오갔지만, 결국 양사는 화해에 합의하고 소를 취하했다.
법인은 다르지만 같은 해부터 시작된 디스플레이 소송전도 유사한 경우였다. 삼성디스플레이가 LG디스플레이를 대상으로 먼저 소송을 제기했다.
LG디스플레이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자사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을 유출했다며 LG디스플레이의 OLED 기술 개발 전반에 대해 자사 기술 침해를 금지토록 해 달라는 내용의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양사는 액정표시장치(LCD) 분야까지 특허소송으로까지 범위를 확대하며 가처분신청, 특허무효심판 총 7건의 소송공방전을 벌였지만 정부가 화해를 유도하면서 이 역시 지난해 9월 소송 취하로 마무리됐다. 여전히 상호 특허협력 등 발전된 합의는 이끌어내지 못한 채 끝나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3D로 한 판 붙자”...소규모 신경전도 여러 번
소송전으로 확대되지 않았지만, 비교적 작은 신경전도 두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1년 벌어진 “3D로 한 판 붙자”는 문구로 대표되는 3D 기술 구현방식 논란이다. 3D 구현 방식을 놓고 상호간 긴장감이 발생하던 중, 삼성전자의 한 임원이 LG디스플레이 직원을 비방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양 측이 내용증명을 주고 받으며 감정이 격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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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시장 점유율을 두고 벌어진 갈등도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지난해 3월 벌어진 이 논란은 삼성전자가 시장조사업체 자료를 인용해 자사가 국내 가정용 에어컨 시장 1위라는 내용의 광고를 방영하자 LG전자가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통계자료의 신뢰도를 문제 삼았다.
업계에서는 두 업체가 소모적인 논쟁을 빨리 마무리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다만 ‘가전업계 명가’라는 명분을 두고 긴장감을 유지해 온 두 회사간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쉽사리 끝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한 회사의 사업부 수장인 사장급이 연루된 만큼 복잡한 방정식은 미로를 헤맬 처지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