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거의 대부분 국가가 미국 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손꼽히는 교역 국가이자 정치 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나라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요즘은 할로윈과 같은 미국 전통 명절 때문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 부모들이 고통받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양국간의 문화적 교류는 관점이나 사안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혹은 부정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은 너나없이 예외다. 바로 미국 최대 쇼핑 행사인 블랙프라이데이 이야기다.
블랙프라이데이는 매년 11월 마지막주 목요일인 추수감사절 다음날로, 미국의 거의 모든 유통업체들이 연중 가장 큰 규모의 세일 행사를 실시한다. 미국 유통가는 이날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크리스마스 시즌에 돌입한다. 즉, 이날 대량으로 유통 재고를 소진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한 신제품 판매에 주력하는 구조다.
우리나라에서 블랙프라이데이는 2009년까지만 하더라도 경제지에서 미국 내수경기 전망이나 삼성, LG 연말 실적 예상 기사에서나 발견할 법한 단어였다. 그러다가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에 대형 TV를 우리나라보다 100만원 이상 저렴하게 샀다는 영웅담 같은 구매후기가 인터넷에 올라오면서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서서히 알려졌다.이후 해외직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국내서도 본격적인 블랙프라이데이 열풍이 불었다.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쯤되자, 국내 유통가에서도 이러한 블랙프라이데이 바람을 어떻게 활용할 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제과업체들이 빼빼로데이에 평소의 8000%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것처럼, 한번 잘 자리잡은 기념일 만큼 강력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한국형 블랙프라이데이의 태동이다.
■블랙프라이데이는 단순한 마케팅 수단?
2010년 블랙프라이데이를 마케팅에 최초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형 온라인 쇼핑몰이다. 당시 GS샵, KT커머스, 디앤샵 등은 이 기간에 의류를 중심으로한 해외 브랜드 제품을 최대 70%까지 할인하는 행사를 실시했다. 의류 및 잡화 제품은 IT기기나 가전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마진 폭이 높아 체감 할인율이 높고 배송도 간편하다.
이후 일부 개별 기업들이 저마다 자체적인 블랙프라이데이 마케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블랙프라이데이=무지막지하게 싸다”는 공식이 서서히 국내 소비자들에게 각인된 것도 이 시점이다. ‘블랙프라이데이’는 ‘바겐세일’ 처럼 진부하지 않고, ‘폭탄세일’처럼 과격하지도 않으며 ‘창고 대방출’ 혹은 ‘사장님이 미쳤어요’처럼 재고를 처리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국내 기업들이 블랙프라이데이를 아직까지 단순한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과 유통 환경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업이 높은 할인율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가급적 판매 수요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은 추수감사절 이후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폭발적인 구매 수요가 있기 때문에 업체마다 대대적인 할인이 가능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처럼 대대적으로 구매 수요가 몰리는 특정 시즌이 없다.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 직전이나 직장인들이 보너스를 받는 연말 혹은 연초 정도 정도가 그나마 매출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시장 규모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미국의 내수 시장 규모는 압도적인 세계 1위다. 금액으로만 따지만 중국도 비교 불가다. 시장규모가 큰 까닭에 마진을 더 적게 취하더라도 남는 장사를 할 수 있는 곳이 미국이라는 이야기다. 필연적으로 가격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2014년은 한국형 블랙프라이데이 원년
이러한 가운데 국내서도 서서히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을 겨냥한 본격적인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12일 11번가를 운영하는 SK플래닛을 중심으로 H몰, 롯데닷컴, CJ몰 등 10여개 유통업체가 동시에 참여한 한국판 첫 블랙프라이데이 행사가 열린 것이다.
이날 행사는 경쟁이 치열한 굵직한 국내 주요 유통채널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물론 일부 미끼 제품에 대한 수량이 지나치게 적고, 11번가 50% 할인 쿠폰의 한도가 1만원에 불과해 생색내기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날 하루 매출액만 당초 예상인 1천억원을 훌쩍 넘어 1천500억원에 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일단 수요가 확인되면 그 다음 행사에서는 더 높은 할인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역시 대형 유통업체 주도로 이뤄진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가지는 바잉파워(buying power)가 가격 할인이 가능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국내 유통업체들의 블랙프라이데이 참여는 고무적이다.또 다른 방식의 접근도 있다. 세계적인 IT미디어 CNET의 한국판 씨넷코리아가 오는 19일 양재 at센터에서 3일간 개최하는 ‘CNET 화이트마켓’ 행사다. ‘화이트마켓’ 역시 한국형 블랙프라이데이를 표방하고 있다.
이 행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삼성전자, LG전자, 소니 등 40여개 국내외 주요 IT 가전 제조업체가 직접 참여한다는 점이다. 유통업체에 비해 제조자가 직접 행사에 참여하면 그만큼 더 큰 폭의 마진 폭을 가져갈 수 있다. 물론 IT 가전 제품 특성상 의류 등 다른 공산품에 비해 마진 폭 자체가 적다. 특히 전자상거래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는 가격비교로 인한 인터넷 최저가가 상당히 낮게 설정돼 있어, 절대적인 할인율을 높게 가져가기 어렵다. 이러한 가운데 더 낮은 가격을 위해서는 화이트마켓처럼 제조기업이 직접 참여해 유통 마진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제외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또 다른 관전포인트는 오프라인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온라인에서 가격비교를 통한 구매는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물건을 직접 살펴보지 못하고 배송 기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씨넷 화이트마켓은 물건을 직접 살펴볼 수 있을 뿐더러 인터넷 최저가보다 더욱 저렴한 가격을 예고하고 있어 기대를 모은다.
■온라인 중심의 국내 유통 구조…인터넷 최저가를 이겨라
비록 미국에서 시작된 행사지만 침체된 내수 시장 활성화를 위해 이러한 쇼핑주간의 국내 도입은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 물론 소비자들이 돈을 쓸 준비가 돼 있고, 기업들이 이러한 기대에 부응할수 있다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이미 소비자들 사이에서 블랙프라이데이라는 용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를 국내 시장에 본격적으로 적용시키기는 쉽지 않다는 목소리도 있다.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미국 블랙프라이데이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블랙프라이데이에는 추수감사절 밤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다. 할인율이 높은 이른바 미끼 제품은 수량이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매장이 오픈되면 서로 값싼 물건을 차지하려고 몸싸움을 벌이는 것은 물론, 심지어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블랙프라이데이를 경험한 한 소비자는 “당일 오후만 되도 파격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제품은 찾기 어렵다”며 “모든 미국 소비자들이 블랙프라이데이에 쇼핑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아직까지 대형 유통점에서 오프라인 구매가 더 익숙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이미 온라인을 통해 물건을 싸게 구입하는 전자상거래가 크게 발달해 있다는 점도 극복해야 할 요소다. 인터넷 최저가를 쉽게 검색해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소셜커머스와 같이 특정 제품을 일시적으로 높은 할인율을 적용해 판매하는 창구도 적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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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기록이 남지 않는 오프라인과 달리 온라인에서는 블랙프라이데이라 하더라도 파격적인 할인율을 적용하기가 만만치 않다. 온라인에서는 한번 가격을 낮추면 다시 올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유통업계에서는 이를 소위 “가격이 무너진다”고 표현한다. 미국에서는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가격을 할인하는 행사를 블랙프라이데이 다음 주 월요일로 정해 ‘사이버 먼데이’라고 따로 부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미국 블랙프라이데이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가지고 있다”며 “이 같은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자칫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에 다소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