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CA 뒤늦게 FM중요성을 깨닫다
그것은 1920년대에 널리 사용되던 진폭변조(AM) 라디오방송의 문제점인 수신음 잡음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됐다. 라디오 방송 잡음은 AM전파와 구조상 너무 비슷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었다.
발명가 암스트롱(Edwin Howard Armstrong, 1890~1954)이 1918년 1차대전 참전중 슈퍼헤테로다인 수신기(Superheterodyne receiver) 기술을 발명해 선국문제를 해결했지만 잡음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었다. 헤테로다인수신기는 라디오 수신감도를 훨씬더 민감하게 만들어 주었고 주파수 선택을 가능케 해 주었다. 하지만 주파수는 서로 간에 간섭을 받았고 가끔 겹쳐지고 있었다.

RCA의 데이비드 사노프( David Sarnoff, 1891~1971)사장은 이 신경 거슬리는 잡음을 제거할 신기술을 개발하라고 기술자들을 독려했다. 그는 친구 암스트롱에게도 같은 일을 맡겼다.
“AM라디오의 잡음과 왜곡을 제거할 수 있는 작은 ‘블랙박스’를 설계해 주게.”
암스트롱은 당시 라디오 산업에 종사하던 대부분의 엔지니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그는 라디오전파의 주파수를 약간씩 달리하면 각기 다른 신호를 전송함으로써 전파장애를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른 바 주파수변조(FM)방식이었다.

암스트롱이 제시한 해결책은 블랙박스가 아니라 라디오전파를 송신하기 위한 새로운 과학기술이었다.암스트롱이 연구에 착수해 결과물을 내놓기까지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1933년 12월 26일. 암스트롱은 마침내 자신의 FM기술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RCA에서 일하던 암스트롱은 특허를 받자마자 오랜 친구 데이비드 사노프에게 자신이 개발한 FM방식을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은 초기 라디오 애호가 동료였다. 오래 전인 1913년 2월 1일. 두 사람은 암스트롱이 발명했던 기술을 사용한 무선수신기로 모스부호대신 음악 방송을 함께 수신하는 감동의 순간을 함께 했던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여러 해 동안 암스트롱은 사노프에게 그날을 기념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사노프는 1920년대에 RCA를 설득해 암스트롱의 특허를 구매하도록 한 친구였다. 이 덕분에 암스트롱은 상당한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 1934년 사노프는 RCA 비용으로 자신의 오랜 친구인 암스트롱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85층을 연구소로 내 주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그 기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라고 지시했다.
이 해 5월. 암스트롱은 자신의 FM발명기술을 검증하는 최초의 대규모 야외시험을 실시했다. 그는 RCA가 입주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85층 첨탑에 있는 연구실에서 128km밖에 있는 수신국으로 전파를 날렸고 깨끗한 방송을 송수신하는 실험은 성공했다.
암스트롱은 이제 RCA간부들과 기술자들에게 FM의 탁월한 성능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해 설명하면서 특허권 양도계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노프의 생각은 달랐다.
“TV가 나오면 라디오가 쓸모없게 되겠지...”
RCA임직원들은 사노프의 주장을 핑계삼아 번번이 암스트롱과의 계약을 미루기 일쑤였다.
그러던 1934년 어느 날 암스트롱은 록펠러센터에서 사노프와 마주치게 됐다.
암스트롱이 물었다.
“자네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이것을 추진하는가?”
사노프는 암스트롱의 혁명적 발명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면서 말했다.
“지금은 대공황시대라네. 라디오산업은 활력을 불어넣어 줄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네. 나는 ‘블랙박스’가 바로 그것이라고 보고 있네.”
그의 마음 속에 있던 블랙박스는 기존 AM방송 기술과 호환되면서 잡음을 제거해 주는 기기였다.
“맞네. 내 발명은 평범한 발명이 아니라 혁명이라네.”
암스트롱이 대꾸했다.
이것이 그들이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암스트롱은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와 실험을 계속했다. 그의 광대역 FM밴드는 엄청난 신호대노이즈(S/N)비율 향상을 가져왔다. 그것은 30대 1이던 AM라디오의 신호대 잡음비율(S/N비)을 100대 1 또는 그 이하로 줄여줄 기기였다.
하지만 데이비드 사노프는 불안했다. 그가 원한 것은 기존 AM라디오방송 방식을 그대로 둔 채 잡음만 제거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암스트롱의 기술은 AM라디오의 틀을 깨고 이를 대체할 기술이 아닌가. 그는 더 이상 암스트롱의 연구를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후일 이렇게 털어 놓았다.
“나는 암스트롱이 우리 AM라디오의 정전기를 제거하는 일종의 필터를 개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처럼 RCA와 경쟁할 전혀 새로운 산업 혁명을 시작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죠.”

1935년 10월 암스트롱은 RCA로부터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85층의 실험장비를 모두 치워달라는 정중한 요청을 받았다.
이후 RCA와 AM라디오 방송 및 제조업체들은 조용히 FM라디오를 퇴출시키기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암스트롱은 굴하지 않았다.
1936년 6월 17일 암스트퐁은 워싱턴 FCC본부에서 그의 FM기술을 실제로 보여줄 기회를 가졌다.
“이 믿기 힘든 깨끗한 재즈음악을 들어보세요. 여러분은 이런 방송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암스트롱은 먼저 기존 AM라디오를 통해 재즈 레코드음악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그런 후에 이를 FM방식으로 바꾸어 내 보냈다.
참관객인 50명의 엔지니어들은 눈을 감았다. 그들은 FM방송을 들을 때 재즈밴드가 같은 방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현장에 있던 한 기자는 “쓸데없는 잡음은 전혀 없었다”고 썼다. 다음 날 암스트롱의 FM기술은 미국전역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의 톱뉴스를 장식했다.
당시 방안에 있던 50명의 엔지니어들은 “최초의 이어폰방식 크리스털 라디오가 만들어진 이래 가장 중요한 발명”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AM방식을 사용하는 RCA와 기존 방송국이 자신의 FM기술 사용 제안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그는 대중에 직접 FM 송신체계를 선보이기로 했다.
1937년 봄. 암스트롱은 뉴저지주 알파인 시에 FM라디오 방송국을 세웠다. 암스트롱의 ‘잡음없는 라디오방송’에 감명받은 GE 등 여러기업체가 그의 FM시스템 제작 면허에 비용을 지불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40년에야 비로소 FM시스템의 이점을 알아차린 암스트롱에게 특허 인수 제안을 해 왔다.
“자네의 기술을 사용하는 대가로 100만달러를 지불하겠네.”
“필요없네.”
RCA로부터 받았던 푸대접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한 암스트롱은 옛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런 가운데 암스트롱에게 또다시 거액의 기술특허 로열티를 챙길 기회가 찾아왔다.
“암스트롱의 FM을 미국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방식 TV시스템의 표준으로 채택한다.”
1946년 미연방통신위원회(FCC)가 NTSC방식 TV의 활성화 차원에서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발명가에게 또다른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천재발명가 스러지다
RCA는 FCC결정에 따른 FM표준기술 사용에 따른 로열티 지불을 거절했다. 심지어 다른 TV제조업체들에게도 로열티를 지불하지 말자고 선동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1947년에 들어서자 RCA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암스트롱의 FM기술을 자기회사 기술자들이 먼저 개발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TV방송에 이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스트롱이 고소하기를 기다렸다.
이듬 해인 1948년. 암스트롱은 RCA를 특허침해혐의로 고발했다. 암스트롱은 확고한 특허소송 의지와 함께 전의를 불태웠다. 그는 이후 5년간 자신의 발명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RCA는 너무나도 잘 준비된 특허침해자였다. RCA는 케이힐,고든 같은 뉴욕서도 알아주는 로펌출신 변호사들을 동원했다. 이들은 암스트롱이 소송비용 소진으로 재판을 종결시킬 위기에 처하도록 재판을 질질 끌었다. 소모적 재판을 만들기 위해 증거발표와 사전 공판 변경 방식이 교묘하게 사용됐다.
암스트롱은 1920년대에 RCA로부터 받은 수백만달러의 로열티를 고스란히 RCA와의 소송비용으로 날려버렸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RCA 수장은 마르코니아메리카무선사 시절에 만나 RCA로부터 발명특허료를 받게 해 준 친구 사노프였다.
이제 두사람은 더 이상 암스트롱의 재생회로를 통해 모스신호대신 방송을 들으며 함께 감동했던 1913년 이래의 그런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
RCA의 소송에서 패한 암스트롱은 라디오업체는 물론 TV제조업체들로부터 어떠한 FM수신기 관련 특허 로열티도 받을 수 없게 됐다.
경쟁FM방송국 양키네트워크의 시장잠식과 함께 그동안 들어간 거액의 소송비는 그를 파산에 이르게 만들었다. 암스트롱이 법원의 화해조정을 거부한 가운데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파경에 이르렀다. 그에게 1954년 새해는 그 모든 것을 견디기에는 너무나도 추웠다.
친구 사노프에게 배신당하고 소송에 패해 무일푼이 된 채 희망을 잃고 괴로워하던 암스트롱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1954년 1월 31일 뉴욕의 겨울. 실패한 낙오자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암스트롱은 용커스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13층 베란다 창밖의 에어콘을 떼어냈다. 정장에 모자를 쓰고 장갑까지 낀 그는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와 데이비드 사노프가 아무추어 무선애호가로서 만난 지 41년 째가 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아내에게 남긴 2페이지짜리 유서 내용에 대해 “그는 자신의 아내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데 대해 상심했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녀를 상처받게 한 데 대해 깊은 후회를 표시했다”고 썼다.

유서는 이렇게 맺고 있었다. “신이 당신을 보호하고 내 영혼에 자비를 내리기를.”
매리언 암스트롱은 자살로 세상을 등진 남편의 뒤를 이어 소송을 계속했고 결국 그의 특허를 침해한 RCA를 비롯한 모든 기업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얻어냈다.
뒤늦은 법정 판결이 천재 발명가의 아까운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의 재능에 따른 발명결과로 남은 부는 아내와 자손들에게 돌아갔다.
암스트롱의 부인은 기본적인 5개 FM기술을 바탕으로 자신의 남편이 공식적인 FM기술의 발명자임을 세상에 밝혔다.
암스트롱은 평생 42개의 무선특허를 받았다. 1914년 받은 무선수신시스템(Wireless Receiving System)특허를 시작으로 1933년받은 광대역FM관련 기술인 라디오시신호시스템(Radio Signaling System), 라디오신호보내기(Radio signaling)기술 등이 꼽힌다.
암스트롱이 사망했을 때 이미 진공관은 무선송수신 기술특성을 바탕으로 한 최고의 라디오 및 TV 송수신기능을 하는 핵심부품이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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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트롱의 자살 소식을 들은 데이비드 사노프는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데이비드 사노프는 1921년 미국의 한 여름에 벌어진 한 행사를 계기로 라디오수신기 확산의 물꼬를 트고 결국 RCA제국의 총수에 오르는 결정적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그가 라디오수신기를 통한 방송통신의 꿈을 심어준 결정적 계기는 1913년 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의 발명품인 무선수신시스템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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