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싱킹의 핵심은 문제를 찾아내는 첫단계입니다. 남의 문제를 스스로 찾아서 해법을 고민하기 시작하는 과정이죠. 여기서 막연히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넘어서서, 문제를 체화하는 공감이 생겨야 진짜 문제를 찾고 좋은 해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올해초 미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디자인싱킹(Design Thinking)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크리스토퍼 한 SAP코리아 전무의 말이다. 현재 SAP코리아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디자인싱킹투어’를 한달에 걸쳐 개최중이다. 투어 참가자들과 함께 ‘디자인싱킹’을 설파하는 한 전무를 만났다.
‘디자인싱킹’, 혹은 ‘디자인적 사고’라 번역되는 이 말은 최신의 용어는 아니다. 이미 십년 가까이 통용되고 있는 혁신을 위한 방법론으로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디자인스쿨(d.schol)에서 구체화돼 산업계로 퍼졌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미국 유학을 통해 디자인싱킹을 접한 일부 사람에 의해 조금 알려졌을 뿐, 일반인에게 익숙하진 않다.
한 전무는 스탠포드대학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스쿨을 접했다. 2005년 하소 플래트너 SAP 창업자가 스탠포드대학교에 3천500만달러를 기부하고 디자인스쿨을 설립하도록 지원했는데, 한 전무는 디자인스쿨 설립과정부터 디자인싱킹과 깊은 인연을 맺어 SAP에 입사했다.
디자인싱킹은 크게 5단계로 이뤄진다. ‘Empathy(공감)-Define(정의)-Ideate(상상)- Prototype(견본)-Test(시험)’가 선순환 단계로 이어지게 된다. IT, 제조뿐 아니라 다양한 산업군에서 사용되는 개발 프로세스와 유사하다.
한 전무는 전체 단계 중 공감의 단계를 가장 핵심으로 꼽았다. 공감 단계는 문제를 찾아 정의하는 단계다.
“가장 어려운 게 첫단계인 공감이며, 핵심입니다. 먼저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 팀은 누구인가를 파악하게 됩니다. 디자인싱킹은 누군가를 우리가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돼요. 누구를 어떻게 도와줄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마음은 있는, 그리고 그 마음을 에너지 삼아서, 타인을 관찰하고 인터뷰하고, 많은 생각을 주고 받으면서 공감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인사이트가 생기는 거에요. 아 이 사람이 이런 어려움이 있구나. 이걸 해결하면 그들의 삶이 더 좋아지겠구나. 그게 바로 문제를 찾아낸 것, 문제를 정의한 것이죠.”
디자인싱킹은 소그룹의 공감부터 시작돼 2단계인 문제 정의로 넘어간다. 궁극적으로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를 찾아, 최적의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므로, 문제를 정확하게 정의하는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한 전무의 설명이 이어진다.
“문제 자체부터 틀리면 솔루션을 아무리 좋게 만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뿐 아니라, 내 자신 혹은 내 팀이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의식해야 해요. 문제를 정할 때 당사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감동이 있어야 ‘올바른 문제 정의’라 보는 것입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나 자신과 팀메이트도 배려하는 인간적인 접근이죠. 문제를 겪는 당사자와 팀 전체가 동일한 시점으로 바라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의 설명대로 타인과 동일한 시점으로 문제를 바라본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 동원되는 게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이다.
“동일한 시점을 찾아내는 게 어려운데, 에스노그래픽(Ethnographic) 방법론이란 인류학자들의 방법을 쓰게 됩니다. 인류학자들이 동남아시아 원주민의 부락에 속해서 수년동안 같이 살면서 원주민의 언어, 문화, 풍습 등을 배우고 이를 기록해서 책을 쓰고. 그 민족에 대한 언어 같은 것을 설명하는 거지요. 관찰, 면담, 직접 들어가서 체험 등을 사용하게 됩니다.”
단순히 타인의 입장이 직접 돼 본다는 시도는 매우 쉬운 듯하지만, 우리는 타인과 완벽히 똑같은 체험을 할 수 없다. 떄문에 최대한 타인의 입장과 같아지도록 창의적 시도를 하게 된다.
“미국의 어떤 사람이 혼자 사는 노인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어요. 노인의 일상을 체험하기 위해 그는 나이든 사람의 동작이 느리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옷을 하나 만들었어요. 옷 안에 무거운 물건을 넣어서 팔을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서 자연스럽게 동작이 느려지게 했죠. 마음은 빨리 움직이고 싶은데 몸이 따라가주지 못하는 그 심정을 공감하게 된다는 발상입니다. 이렇게 창의성은 타인을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실할 때 나옵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라도 해주려고 항상 치열하게 고민하잖아요. 이게 큰 동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동기가 없으면 결과도 안 좋죠.”
3차례에 걸쳐 진행된 디자인싱킹투어는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해 프로그램을 짰다. 일단 대학생들에게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최대한 문제를 찾아 정의하게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참가학생에게 공감을 위한 기회를 주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유도하고 싶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공감과 문제 정의를 거쳐 상상의 단계로 넘어간다. 팀원들이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게 된다. 브레인스토밍, 롤플레잉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여기선 목적은 아이디어를 최대한 많이 창출하는 것입니다. 왜 소그룹으로 활동하는가가 여기서 나옵니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으니, 다양한 전문성, 관점, 경력을 가진 사람과 모여서 하게 되죠. 팀을 짤 때 배경, 기술, 관점이 다양할수록 좋고, 목표에 대한 마음은 같은 게 좋습니다.”
실제로 SAP코리아가 참가자들을 그룹으로 나눌 때 이 방식이 적용됐다. 한 그룹에 속한 학생들은 전공, 경험, 사고방식 등에서 같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갖는다. 하나의 목표를 향할 때 다양한 사람이 있어야 한쪽으로 치우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모이고 정리되면 4단계인 견본 단계로 넘어간다. 이 때 견본은 최종 해법에 근접한 게 아니라, 일단 만들어보는 것이다.
“견본은 ‘바로 이거야!’가 아니라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아이디어는 추상적이고 머리 속에 있지만. 견본은 개념과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것이죠. 현실 속에 내 생각을 내보이는 것입니다. 이 견본을 갖고 다시 팀과 더 구체적인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대화를 도와주기 위한, 배우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견본을 계속해서 수정하면서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구체화를 더 강하게 해 나가게 됩니다.”
견본을 만들고 조금이라도 최종 모습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면 다음으로 실험 단계를 진행한다. 테스트를 누구에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벌어진다.
“형태가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에게 사용하도록 하고, 형태없는 서비스 디자인 같은 것이라면 스토리보드를 그려서 보여주면서 설명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만들어진 견본보다 더 좋을 거 같다는 문제 당사자가 조언하게 되죠. 팀과 문제 당사자의 대화가 연결되는 시점으로 ‘모어 러닝(more learning)’, 더 배우는 시점입니다. 테스트를 통해 문제 당사자의 피드백을 반영해 새 견본을 만들 수 있고. 어느 경우 문제정의 자체도 수정할 수 있습니다. 문제설정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면 정의 단계부터 다시 상상, 견본 등의 단계로 돌아가는 선순환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렇게 진짜 문제를 찾아 더 완벽한 솔루션을 다듬어서 자신있게 프로덕트를 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디자인싱킹의 일련의 단계는 어쩌면 매우 익숙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문제 설정 단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에게 부여받은 문제를 푸는 것에만 익숙하다. 남에게 받은 문제니 절실한 동기도 없는 게 당연하다. 한국사회의 청년들이 주어진 문제를 풀고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을 가지면 된다는 동기부여 외에 절실한 동기를 찾는데 힘겨워 하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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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무는 현재의 스타트업 육성 정책 붐에 대한 언급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기업은 제품 출시에 대한 다양한 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내부 자원이 풍부한 회사라면 빨리 만들어서 뿌리거나, 다양하게 만들어서 잘 된 것만 살리고, 나머지는 죽이는 방법을 쓰기도 하죠. 그런데 스타트업은 자원이 적기 때문에 이미 생존하고 있는 카테고리가 아닌 전혀 새로운 제품 카테고리를 만들 때 대기업처럼 할 수 없습니다. 디자인싱킹의 프로세스는 최소의 자원을 갖고 최대의 가치를 창출하는데 유용할 것입니다. 산업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이 방법론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구요. 학생 스스로도, 선생님이나 부모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