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하늘을 나는 그림...TV의 발명 ⑳거인 RCA, 특허소송

일반입력 :2013/02/16 08:25    수정: 2014/04/23 18:48

이재구 기자

22■거인 RCA의 특허공세

1932년 12월 27일 뉴욕 라디오시티뮤직홀 개관식에 참석중인 사노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즈보리킨이었다.

“괜찮은 그림을 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약 2년 전 판즈워스연구실에서 배운 그 방식 그대로였다. 그것도 모든 판즈워스연구소의 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배운 바로 그 기술이었다.

1934년 초가 되자 즈보리킨은 자신이 ‘아이코노스코프(Iconoscope)’라고 이름지은 TV카메라 진공관을 시연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발명 소식은 즈보리킨이 판즈워스의 연구소를 방문한 지 2년 후에 처음 알려졌고 시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했다.

그 발명품의 근원이 어디서 나왔는지 수상쩍었지만(혹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사노프는 아이코노스코프를 기반으로 자신의 제국을 확장하고자 했다. 그리고 훗날 역사가들이 자신을 TV를 세상에 퍼뜨린 사람으로 기록되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사실 즈보리킨은 11년전인 1923년에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 특허출원을 했지만 실질적인 영상을 전송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특허청은 아이코노스코프가 출원한 이 기술에 대한 특허를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RCA의 특허변호사들은 “즈보리킨이 1932년말 내놓은 발명품(아이코노스코프)이 판즈워스의 발명품보다 더 먼저 만들어졌으며, 판즈워스의 특허들이 즈보리킨의 특허출원내용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특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이코노스코프로 명명된 이 새로운 카메라 진공관은 지난 1923년 즈보리킨이 특허출원한 부품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억지 주장까지 내놓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RCA는 막후에서 “판즈워스와 손잡고 사업하는 그 어느 누구도 RCA의 (라디오)특허를 바탕으로 한 사업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까지 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판즈워스가 TV특허라이선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났던 회사들은 라이선스를 받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결국에 가서 포기하곤 했다.

아직 TV가 시장에 상품으로 나오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RCA의 라디오 특허를 사용하면서도 TV제조를 생각하고 있는 전자업체들에겐 이보다 더 강력한 위협은 없었다. 그들 역시 TV가 미래산업이란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들은 제왕 RCA에게 조공(로열티)을 바치고 하사품(라디오라이선스 패키지)을 감사히 받고 있는 제후에 불과했다. 자칫 판즈워스와 교섭해 TV특허를 받으려다가 RCA의 눈밖에 나면 기존 라디오사업까지 뿌리째 흔들릴 판이었다.

이제 판즈워스와 후원자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는 미국특허청의 판결을 얻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최초의 전자식TV발명가이며 내 특허가 최초임을 입증해 하고 말테야.’

판즈워스의 특허기술 청원서 제출에 대해 RCA측도 소송으로 대응했다.

데이비드 사노프 RCA부사장은 다급했다. RCA는 판즈워스텔레비전이 TV개발에 사용하는 돈의 10배에 달하는 돈을 연구개발에 쓰고 있었다. 사노프가 이처럼 거침없이 거금을 투자한 것은 라디오제국 RCA명성을 유지하고 그에 뒤이은 TV발명기업으로서의 이미지와 성과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RCA이사회는 사노프의 TV연구성과가 지연되면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사노프는 재빠른 TV투자비 자금회수를 통해 이사회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다.

‘판즈워스와의 이 TV 특허 소송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RCA는 라디오에 이어 또다시 세상을 움직이는 산업의 패권을 거머쥐게 되리라...’

이 특허소송전은 자신의 명성을 이어가게 해 줄지 여부를 가름할 분수령이 될 싸움이었다.

사노프가 볼 때 판즈워스텔레비전은 분명 급성장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법적소송 경험과 거대 자금력을 가진 RCA에겐 또다른 특허전쟁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라디오제왕 RCA는 이보다 큰 대형 특허소송에서도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쳐 왔지 않은가. 게다가 판즈워스가 십년도 더 된 특허에 대해 독창적이라는 것을 증명해 낼 수는 없으리란 계산도 깔려있었다.

RCA의 물고늘어지기 전술은 주로 판즈워스가 1930년에 낸 미특허 1,773,980호의 15번 주장에 집중됐다.

판즈워스 브라운관TV 발명의 핵심요소(정수)를 그대로 묘사한 특허 15번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TV를 위한 장비로서 전기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수단과 각 전기이미지의 기본적인 영역을 스캐닝하는 수단을 포함하며, 전기이미지가 스캐닝되는 기본영역의 세기정도에 따라 전기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수단을 포함한다.”

빛을 전기로 바꾸는 필수적이고도 핵심적인 단계를 보여주는 단순하고도 정확한 컨셉트가 담겨 있었다. 이 단락은 1927년에 최초로 구성된 것으로서 사실상 인류에게 최초로 전자식 TV의 도래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14살된 파일로 T 판즈워스라는 이름의 한 소년이 이 특허를 출원하기 5년 전에 이미 아이다호 리그비시에서 불현듯 떠올린 아이디어 그대로였다. 그 햇볕 따가운 어느 날 오후 말이 끄는 써레가 사탕무우 밭을 오가는 것을 보고 주사선의 원리를 생각해 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1934년 RCA변호사는 즈보리킨이 낸 전자식 TV 아이디어가 최초라고 우기면서 이를 증명하려 억지 주장을 하고 있었다.

수주일 동안 RCA의 합법적이고도 거대한 특허소송에서는 엄청난 개별증거와 주장이 제기됐다. 판즈워스는 이 엄청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연일 자료준비에 몰두했다. 이는 TV성능 향상에 들여야 할 시간조차 모두 빼앗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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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A의 허구를 무너뜨리기 위한 이 최초의 전자식TV발명자를 밝히는 초대형 특허소송의 변호사는 도널드 K 립핀코트(Donald K. Lippincott)였다. 판즈워스의 TV발명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판즈워스의 천재성을 흠모하고 있었다.

판즈워스의 기억대로라면 그의 발명당시 고등학교 선생님이 그의 발명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