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하늘을 나는 그림...TV의 발명⑲애증 엇갈린 필코

일반입력 :2013/02/15 06:00    수정: 2014/04/23 18:28

이재구 기자

21■후원자 필코와의 만남, 그리고 결별

판즈워스의 회사는 1931년 봄 보다 좋은 조건에 기존에 사업을 하던 동맹군을 찾았다. 필코라디오코퍼레이션이었다.

필코는 당시 전자산업의 메카인 뉴욕과 필라델피아 중심의 동부지역에서 라디오제조 회사로 꽤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RCA,AT&T,GE같은 이른 바 라디오특허 풀을 형성한 이른바 ‘라디오트러스트(Radio Trust)’의 그늘 아래에서 로열티를 내며 사업을 해야 했다.

필코가 이 특허우산 그룹에서 탈피해 특허의 빅리그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판즈워스의 연구성과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 시기에 필코는 유럽 대성당의 모습을 본 뜬 라디오로 라디오 시장에서 나름대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라디오트러스트의 그늘아래 있을 수는 없었다.

“필코를 TV사업 본궤도에 진입시키려면 6개월은 족히 걸릴 것입니다.”

필코의 부탁을 받은 판즈워스는 자신의 전 연구소를 필라델피아로 이전해 필코가 TV사업을 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을 맡아 주기로 동의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필코연구소는 샌프란시스코와 매우 달랐다.

판즈워스와 그의 연구팀 랩갱에게는 격식을 따지는 이 거대한 회사 시스템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동부의 멋진 교육을 받은 필코의 엔지니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코 연구소사람들에게 필과 그의 친구들은 캘리포니아의 미친 카우보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지독하게 더운 여름날. 한 여름의 열기는 환기구가 없는 연구소꼭대기를 오븐처럼 만들어 버렸고 이는 필의 연구원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필과 그의 친구들은 타이와 와이셔츠를 벗어 던졌다. 이는 아래 층의 임원들을 히스테리 상황으로 몰고 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판즈워스 일행은 필의 전자식 TV이미지를 꾸준히 향상시켜 나가고 있었다. 화면을 보면 먼저 안개가 끼고 희뿌연 모습이었다가 점점 초점이 맞아가는 식이었다. 당초 6개월로 잡혔던 개발일정은 어느 새 2년으로 늘어났다.

이 시기에 판즈워스는 FCC로부터 공중으로 TV영상 전송실험을 할 수 있는 실험 라이선스를 확보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 TV수신기 원형을 설치했고 그의 아들 판즈워스3세는 최초의 텔레비전 세대가 됐다.

판즈워스가 테스트용으로 사용한 프로그램은 디즈니사의 미키마우스 만화 애니메이션인 스팀보트 윌리였다. 그는 이 만화영화를 연구소에서 수마일 떨어진 집에 전송하고 또 전송했다. 판즈워스의 어린 아들이 TV만화를 즐길 때 그의 아버지와 필코의 엔지니어들은 TV화면과 회로를 조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판즈워스가 가장 걱정스러워 했던 것은 이미지디섹터 진공관의 감도문제였다. 그는 광전표면(photoelectric surface)테스트를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이고 있었는데 아주 새롭고 근본적인 2차방전(secondary emissions)이라는 현상을 적용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효과를 사용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연구에 매진했다.

불행히도 그의 연구에 대한 평점심을 깨뜨리는 일이 생겨나고 있었다.

필은 필코 측이 자신의 연구예산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회사측이 자신과 이곳에 오기 전 합의한 일정보다도 자금지원 일정을 더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는 필코가 확실한 특허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당초 주기로 한 연구비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던 중 필코와 맥카거가 자신도 모르게 자금지원 문제를 재협상했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렸다.

결정적인 사건은 1932년 겨울에 터졌다. 필코측은 병으로 사망한 아들 장례식을 치르려는 판즈워스 부부의 솔트레이크시 여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판즈워스씨는 회사가 투자한 너무 중요한 분야의 인물이라서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회사가 이같은 이유를 내놓자 결국 그의 아내 엠마 펨 판즈워스가 혼자 유타주로 향해야 했다.

“내 특허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맥카거나 필코에게 기댈 수는 없게 됐어.”

판즈워스의 실망과 의혹은 너무나도 컸다. 그는 자신의 연구노트를 적는 일조차 그만 두었다. 이제 필코의 그 어느 누구도 판즈워스의 노트를 근거로 이후 연구성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실제로 판즈워스는 자신의 복잡하고 강화된 아이디어를 어떤 필기기록도 없이 실물로 만들어 냈다.

1933년 여름이었다. 필은 자신에게 온 엄격히 통제된 작업의 고통이 더 이상 필요 없어졌을 때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제스 맥카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는 이제 필코를 떠나려고 합니다.

뭐라고?

맥카거는 격분했다.

전세계를 뒤흔든 대공황의 와중이었다. 판즈워스가 필코를 떠난 것이 제스와 필코 간에 있었을지 모를 어떤 막후협상 내용을 망가뜨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맥카거에게 불만족스러웠으리란 것은 분명했다.

사태를 더욱더 나쁘게 만든 것은 제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판즈워스가 자신의 연구소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기길 거부한 것이었다. 그는 동부가 발명을 하는 활동무대로서 더 좋다는 것을 느꼈다.

판즈워스의 결심이 분명해지자 맥카거는 자금줄을 끊겠다는 말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 했다.

자네가 어디서 돈을 모으겠는가?

전화선 너머에서 맥카거의 갈라진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돈을 찾을 수 없다면 내가 찾지요라고 굳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제스와 조지는 필이 전화를 끊자마자 대륙횡단특급을 타고 급히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판즈워스는 이미 필코에서 최대한 장비를 떼내 버리고 작업장을 만들 새로운 곳을 물색하고 있었다. 장비는 혼란스럽게 판즈워스의 거실 여기저기에서 나뒹굴고 있었었다.

1933년 초여름 조지 필 제스가 한자리에 모였다. 맥카거는 모두의 감정이 가라앉고 사업을 재개하기로 결정되자 다시 발명자금을 모아 필의 발명을 완성시키자는데 동의했다.

맥카거는 사업을 떠안았다. 대다수 임원들이 필라델피아에서 필이 기반을 잡을 때까지 계속 발명을 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고 한 때 해고했던 랩갱들을 재고용했다. 이후 ‘판즈워스 텔레비전’이라는 이름의 이 벤처는 더욱더 공고해졌다. 연구소장소로는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이스트 머미드레인 127번지 건물이 선택됐다. 필은 클리프 가드너와 그의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해상도 높은 TV브라운관 제작작업을 시작했다.

연구에 필요한 대다수 중요 장비는 필코의 재산이었지만 남겨놓고 와야 했기에 맨손으로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시스템에는 파일로와 그의 랩갱들이 지난 수년간 독자적인 창안을 통해 개선시켜 온 모든 것들이 녹아있었다.

여기에는 이미지디섹터의 출력과 쌍을 이루는 전자 멀티플라이어,성가신 화면 먼지와 얼룩을 극복시켜준 새로운 파형의 발명, 이제는 익숙해진 톱니모양: 즉 수평 블랭킹 신호가 제거된 고스트현상, 그리고 카메라진공관과 화상관이 프레임당 220주사선의 화면을 만들어 내게 해 준 자기편향코일 등이 있었다.

이번에 만든 그의 전자식 TV는 그가 샌프란시스코 그린스트리트 202번지에서 만들던 나무박스속의 그것과도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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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가 진전돼 가면서 판즈워스의 특허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머미드 레인 127번지에서 실험한 TV화면은 날로 개선돼 그들도 고생한 보람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