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RCA총수와 즈보리킨의 만남
1930년. 데이비드 사노프는 웨스팅하우스에서 일한다는 텔레비전 개발의 경험이 있는 한 연구원을 만났다. 블라디미르 즈보리킨이란 이름을 가진 이 과학자는 사노프와 같은 러시아이민자 출신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1906년 전자식텔레비전 개발에 성공한 러시아 과학자이자 TV의 선구자 보리스 로징으로부터 텔레비전 컨셉트를 배워서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1919년 미국으로 건너와 개발한 음극선 송신기(아이코노스코프)와 음극선 수신기(키네스코프)는 스승의 조잡한 기하학적 형상의 정적인 이미지 전송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하지만 기술적인 제한으로 인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그는 1923년 웨스팅하우스에서 연구원의 자리를 얻어 일하고 있었다. 1929년 자신이 개발한 시스템을 공식적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하지만 파일로 테일러 판즈워스가 이미 이미지 디섹터라는 세계최초의 전자TV를 공식 발표한 이후였다.
이 때 즈보리킨은 미특허청에 완전한 전자식텔레비전특허를 출원했지만 그 기술은 특허허여가 거부됐다. 웨스팅하우스는 그를 통한 연구성과에 가망이 없자 개발작업을 접고 말았다.
사노프는 즈보리킨의 경력을 알고는 그에게 자신의 RCA연구소에 와서 잘 준비된 연구설비를 사용해 TV를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다. 1930년 봄. 즈보리킨은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팅하우스 TV연구소를 떠나 뉴저지주 캠든에 있는 RCA연구소로 회사를 옮기기로 했다.
연구소로 오기 전에 샌프란시스코에 먼저 들르게. 그 젊은 발명가 친구가 RCA의 연구진전에 도움이 될 뭔가를 만들었는지 알아보고 오게.
이 과정에서 사노프는 더 주목할 만한 세부지침까지 내렸다.
웨스팅하우스엔지니어자격으로 혼자 판즈워스에게 접근하게. 이 청년의 발명이 특허를 낼 가능성이 있는지까지 알아보고 오게.
그는 즈보리킨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들를 다음 행선지인 뉴저지 캠든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왜 사노프가 판즈워스 모르게 그의 발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고 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RCA가 1918년 출범하면서 어느 새 이 회사의 모토이자 특징이 돼 버린 특허정책과 무관할 수 없었다.
라디오세트를 만들려는 기업들은 RCA특허소송의 먹잇감이 됐고 특허 료를 내지 못하는 기업들은 사업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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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노프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라디오특허를 받을 라디오시대는 끝날 것이고 다가올 TV시대의 특허는 판즈워스가 모조리 가져갈 것이라는 것을.
사노프는 자신이 개척하고자 하는 새로운 산업분야, 이 승자독식의 세계에서 RCA를 앞선 TV발명가가 나왔다는 소식을 도저히 그대로 묵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