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용 IT시장을 독식하려는 IT 공룡들의 대결이 시작됐다. HP를 끌어내리고, 마지막 상대로 IBM을 지목해온 오라클이 본격적인 IBM과 정면대결에 나섰다.
지난달 오라클은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엑사데이터가 IBM보다 20배 빠르다”라는 문구를 담은 광고를 게재했다.
오라클은 광고에서 “유럽의 대형 유통사가 IBM 파워시스템에서 엑사데이터로 교체해 보다 20배 빠른 성능 향상효과를 거뒀다”고 설명했다.
■“IBM 파워시스템보다 20배 빠른 엑사데이터”
오라클 홈페이지에 등록됐던 광고문구 원안에는 조금 더 자세히 언급된다. 이에 따르면, 한 유럽 유통업체는 폭발적인 사업 성장에 직면해 기존 IBM AIX 파워시스템에 워크로드의 압력을 받았다. 지난해 이 유통업체는 유럽 국가 중 최대 규모의 데이터베이스(DB)를 오라클 엑사데이터 DB머신 한 대로 통합했다.
이에 따라 28억 레코드의 쿼리처리가 20배 빨라졌고, 데이터 로딩 속도가 3배 빨라졌으며, 전체 백업 다운타임이 2배 개선됐다. 오라클은 이 고객이 모든 국가의 DB를 통합하기 위해 엑사데이터 머신을 추가로 구매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오라클의 이 광고는 지난달 26일 철회됐다. IBM이 미국 거래개선국(Better Business Bureaus, BBB)에 잘못된 비교광고라 압박했고, BBB 요청에 따라 미국의 전국광고심의기구(NARC) 산하 전미 광고국(NAD)이 오라클 광고를 중단하라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NAD는 미국 광고협회의 자율적인 심의기구로 과장광고를 규제한다.
NAD는 오라클의 비교광고는 IBM의 어떤 파워시스템 사양인지 불분명하며, 20배 빠르다는 점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광고를 중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유럽 유통업체에 국한된 하나의 사례가 마치 모든 상황에서 IBM보다 20배 빠르다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설명이다. 사실상 IBM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이에 오라클은 광고를 취소하면서도 미국 광고심의위원회(NARB)에 심의를 요청한 상태다. 오라클은 “NAD의 결정이 실망스럽다”라며 “오라클뿐 아니라 다른 IT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판매회사들이 진실된 비교 광고를 할 수 있는 행위를 심각하게 제한한다”라고 밝혔다.
오라클의 이 광고는 국내에도 등장했다. 지난달 24일 마크 허드 오라클 공동사장 방한 당시 열린 대외 행사장에서다. 한국오라클은 서울 역삼동 한 호텔에서 개최한 '데이터센터 최적화 세미나' 로비에 이 광고를 배치했다.
■HP 흔들기 성공한 오라클 “다음은 IBM”
오라클은 2009년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하면서 서버, 스토리지 하드웨어 제품군을 확보했다. 유닉스인 스팍과 x86 제품인 썬파이어를 확보한 오라클은 IBM-HP 양강구도를 무너뜨리는 작전에 돌입한다.
오라클의 첫번째 공격 상대는 HP였다. 오라클은 2010년 데이터베이스 라이선스 규정을 자사에 유리하도록 수정했다. 서버 CPU 코어수에 따라 SW라이선스를 받는 오라클의 정책은 각 서버 제조사마다 차등을 둔다.
현재 오라클DB의 코어 당 라이선스는 오라클 스팍 T4의 경우 코어당 0.5다. IBM, HP 등 경쟁사 서버의 경우 코어당 1.0의 라이선스를 설정했다. 오라클DB 제품 구매자 입장에서 IBM, HP 서버보다 오라클 서버를 구매하는 게 전체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상황이다.
HP에 대한 오라클의 결정타는 아예 HP 유닉스 서버에 사망선고를 내려버리는 것이었다. 작년 3월 오라클은 HP 슈퍼돔, 논스톱, 인티그리티 등에 사용되는 인텔 아이태니엄 CPU의 차세대 모델부터 SW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오라클DB 차기 버전은 HP 유닉스 서버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SW개발중단 발표와 동시에 오라클은 인텔 아이태니엄이 곧 단종될 것이라고 밝혔다. HP 유닉스 서버에 시한부 선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발표는 놀라운 효과를 낸다. 극적으로 작년 3월 이후 HP의 유닉스 서버 매출이 급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업계 전문가들은 “유닉스 서버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인식을 사용자에게 심어줌으로써, 기업들이 유닉스 대신 x86서버 구매를 검토하는 추세가 늘어났다”라고 분석했다.
오라클은 이후 아이태니엄 SW개발중단 발표를 철회하라는 HP와 소송을 진행한다. HP는 작년 6월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2일 법원은 오라클의 아이태니엄 SW지원을 지속하라고 판결해 HP에 승리를 안겼다. 오라클은 항소할 뜻을 밝혔다.
첫번째 소송전에서 HP가 승리했지만, 오라클은 실리를 다 챙겼다는 평가다. 유닉스 서버 시장에서 HP를 흔들었고, 그 틈을 타 자사의 유닉스 제품 공급을 늘릴 틈새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소송이 장기화되면 HP가 유닉스 서버에 대한 결단을 내릴 시점을 놓치고, 스스로 무너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전체 서버시장 트렌드가 유닉스에서 x86 서버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언젠가는 유닉스 사업 비중을 줄여야 하는데, HP가 적절한 시점에 결정내리기 힘든 상황으로 몰린다는 것이다.
HP 흔들기에 소기의 성과를 거둔 오라클의 다음 공격 대상은 IBM이다. 오라클 관계자들은 “결국 최후의 대결 상대는 IBM”이라며 두 회사의 전면전을 시사했다.
■오라클의 IBM 공격이 시작됐다
통상적으로 기업 간 경쟁이 프로젝트 수주전으로 이뤄진다면, 오라클의 전면전은 다르다. 오라클은 법정 소송, 비교광고, 바이럴 마케팅, 영업 등 각종 수단을 통해 총력을 기울여 공격한다. 시비 거리를 부각시켜 세간의 주목도를 높이고, 시장 분위기를 오라클에 유리하도록 조성하는 것이다. IBM에 대한 공격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뤄질 것이란 예상은 어렵지 않다.
오라클은 최근까지 엑사데이터를 HP나 테라데이타 제품과 비교해왔다. IBM 파워시스템과 비교는 수면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미들웨어, 애플리케이션 등 SW사업은 오래전부터 비교했지만, 하드웨어와 통합 어플라이언스 비교는 IBM을 향하지 않았다.
지난달의 광고 사건이 오라클의 IBM 하드웨어 공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읽히는 이유다.
오라클의 IBM 하드웨어에 대한 공격은 드러나지 않는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오라클은 지난해부터 최신 SW제품의 지원 운영체제(OS)에 IBM 유닉스 OS인 AIX를 제외하고 있다. 시끄럽지 않을 뿐 공격을 위한 준비는 하고 있는 것이다.
HP가 잦은 CEO 교체와 R&D 성과 부족, 전략 혼선 등에 흔들리는 것과 달리, IBM은 2000년대 솔루션기업 변신 선언 이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때문에 오라클에게 IBM은 HP보다 힘든 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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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처럼 SW 파워를 앞세우는 것도 쉽지 않다. 실제 판매량을 차치하고라도 IBM은 오라클에 대적하는 SW 제품군을 대부분 보유한 탓이다. 전략적으로 유닉스 시장 전체를 흔드는 것도 어렵다.
유닉스냐 x86이냐 선택의 고민에 HP가 내란에 빠진 것과 다르게 IBM은 하드웨어 사업전략 수정에 돌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에 따르면, IBM은 유닉스 하드웨어 매출이 고점을 찍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IBM은 유닉스 사업에 쏠렸던 내부 역량을 줄이고, x86 사업부 지원규모를 늘릴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