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용자경험(UX) 인재 채용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제품/서비스를 경험해 보았는가를 채용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 면접관들이 있었다. 특히 UX 전공이 아닌 면접관에게 그런 경향이 있었는데, 그들 나름대로의 주장은 IT 제품/서비스의 사용자 경험을 만들려면 당연히 여러 가지 IT 제품/서비스를 써 본 경험이 많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경험의 양’을 놓고 UX 역량과 내공의 진검승부를 벌이자는 사람들은 면접 장소 밖에서도 가끔 볼 때가 있다. 이를테면 UX 조직과 긴밀하게 일을 하는 제품/서비스 기획, 개발, 마케팅, 영업 부서 등에서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가끔 출몰할 때가 있다. 심지어 UX 커뮤니티 안에서도 나올 때도 있다.
이들의 성향은 대부분 유사한 패턴을 지니는데 가장 최신, 최근, 또는 남이 잘 모를만한 것들을 어떻게 하든 먼저 그리고 많이 접해 본 다음 UX 얘기가 나오는 자리에서 그것들을 써봤냐 안 써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 식으로 시종일관 ‘IT 제품/서비스에 대한 과거의 경험의 양’을 강조하며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려는 자세이다.
■‘UX전문가=얼리어탑터’는 틀린 공식
UX가 사용자경험이다 보니 사용자로서의 경험이 많으면 UX에 대한 역량도 높다고 생각하는 오류. 도대체 이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사실 IT 산업계에는 경험의 양만큼이나 UX의 안목과 내공에 대해 잘못 사용되는 척도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얼리어답터는 UX 전문가일 것이다"라는 오해다.
얼리어답터는 표현 그대로 ‘남들보다 일찍 신제품, 신기술을 경험하는 자’로 얼마나 빨리 경험했는가가 얼리어답터를 규정하는 특징이다. 앞서 말한 경험의 양과 이를 합해서 정리해 보면 ‘갖가지 IT의 제품/서비스를 누구보다 신속하게 그리고 누구보다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훌륭한 UX를 창안하는 전문가’ 정도가 된다(여기에 ‘누구보다도 많은 가젯 - gadget: IT의 첨단신제품을 일컫는 표현 - 을 보유한 사람’을 추가할 수도 있겠다). 이게 과연 사실일까?
이러한 오류는 사용자 조사나 전문가 리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한다. 실제 필자가 직접 겪었던 사례를 보자. 피처폰 시절에 휴대폰의 불편 사항과 개선점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고자 FGD(Focus Group Discussion)를 시행한 적이 있다. FGD는 5-8명 정도의 사용자들을 초빙하여 그룹 토의를 하면서 고객의 선호도, 성향, 니즈 등을 파악하는 사용자 조사 방법이다.
필자는 당시 진행자(facilitator) 역할을 맡았는데 FGD 당일에 가 봤더니 초빙 받아 온 사용자들이 전부 매니아급의 고급 사용자들이었다. 이들은 얼마나 휴대폰 매니아인지 기본적으로 들고 다니는 휴대폰이 2-3개 이상씩은 됐고 서로 어떤 휴대폰을 지칭하며 이야기할 때 제조사 안에서나 쓰는 모델명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곤 했다.
왜 이런 분들로만 패널을 구성했냐고 FGD 전체를 담당하는 분에게 여쭤봤더니 “휴대폰 매니아들이니까 할 말이 더 많지 않겠어요?”였다. 실제 그들은 FGD를 진행하는 동안 누가 더 휴대폰에 대해 많이 아는지를 놓고 서로 혈전(?)을 벌여가며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문제는 그렇게 수집한 자료의 상당수는 ‘침묵하는 다수’에 해당하는 일반 사용자들과는 거리가 매우 먼 사용 행태나 요구였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용자들을 대표할 수 없는 소수의 빅보이스(big voice)들로만 리쿠르팅을 한 배경에는 ‘사용자 경험은 무엇인가 많이 써보고 최신 것을 제일 먼저 추구하는 얼리어답터형 파워 유저들이 제일 많이 알 것 같다’라는 잘못된 생각이 깔려 있었다.
■영문학과 학생은 영어를 잘하나?
이 같은 오해는 상식을 조금만 놓고 생각해 보면 금방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는 어이없는 오류이다. 영문학을 예로 들어보자. 필자는 영문학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적어도 영문학이 학생들에게 영어라는 외국어를 잘 말하고 이해하고 청취하게끔 훈련시키는 학문이 아닌 정도는 안다.
물론 영문학을 공부하려면 기본적으로 영어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또 오랫동안 영문학을 전공 하다 보면 남들보다 아무래도 영어를 많이 접하게 되어 자연스레 영어를 더 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영문학이 영어 회화나 청취와 같은 외국어 실력을 다루는 학문이 아닌 만큼 영어를 잘한다고 무조건 영문학 전문가라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영어 스킬이 좋은 것이 곧 영어영문학(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언어학 + 영어로 쓰여진 문학에 대한 문예학)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 영국, 호주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문학 학위를 수여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의 논리를 영화를 놓고 생각해 보자. “영화 많이 보면 영화감독 될 수 있다"라는 논리에 동조하는가? 영화를 많이 보면 영화를 덜 본 사람보다는 영화에 대한 지식이 자연스레 많을 것이다. 이런 저런 영화에 대해 나름 논리와 설득력이 있는 비평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극장에 가서 영화를 많이 보는 것과 영화감독이 되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차원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영화감독이 자신의 꿈을 펼치는 커리어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생계유지용 직업이기에 영화감독은 그야말로 직업상 영화를 많이 보기는 할 것이다. 마치 영문학 전공자가 자연스레 영어를 더 잘하게 되듯 말이다.
■창의력 원천되는 ‘경험 에너지’ 쌓자
경험을 창안하는 것과 경험을 소비하는 것은 그야말로 서로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경험을 창안하는 자가 직업상의 여건으로 자신의 일과 관련된 다양한 소비 경험 - 이를테면 많은 IT 제품과 서비스를 써 본 경험 - 을 보유하고 또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그것들을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직업에 따르는 긍정적인 부차적 효과(positive side effect) 같은 것이지 UX 역량을 보여주는 주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사용자 경험도 여느 타학문처럼 기반 이론, 각종 개념과 지식, 원리, 여러 스킬셋(Skillset, 기본능력)을 전공 수준으로 공부해야 하며 덧붙여 상당한 창의력 개발 훈련을 통해 창의성을 키워야한다(아니면 신의 선물처럼 타고나든가 - 이것이 더 좋겠지만 그런 사람은 매우 드물며 대부분은 전자에 속한다).
물론 필자가 전공근본주의자 같은 주장을 펴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반드시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해야만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유사 학과도 아닌 전혀 다른 학과 출신, 아니 심지어 대학과 같은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훌륭한 프로그래머들이 있으며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단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과학의 학위 여부를 떠나 프로그래밍이란 어려운 스킬과 전산학의 여러 고등 이론에 대해 다년간 공부하고 수련해야만 훌륭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된다. 컴퓨터 좀 다룰 줄 아는 것과 - 이를테면 조립 잘하고, 이런 저런 유틸리티나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좀 아는 등 - 컴퓨터과학에 기반한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는 것은 엄연히 차원이 다르다.
UX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잘 모르는 제품을 일찍 좀 경험해 보았다고, 이런 저런 앱과 서비스를 만져보았다고, 그래서 UI에 대해 이런 저런 훈수 좀 놓을 줄 안다고 훌륭한 UX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 말했듯 영화 많이 보았다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직업이 영화감독인 사람조차도 상업적으로 성공하거나 작품성이 뛰어난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 힘들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대학생들이나 UX 분야에 갓 들어온 초년생들을 대상으로 UX 특강을 할 때 종종 받는 질문이 “얼마나 많은 IT 제품과 서비스를 경험해 봐야 하나요?”이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한결같은 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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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디자인이 그러하듯 훌륭한 경험 디자이너가 되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자신의 역량은 많은 부분 자신이 소화한 경험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경험이 꼭 IT 가젯에 대한 경험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IT 가젯 경험만 하는 사람들은 경험의 폭이 좁아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디서 꼭 본 것 같은 UX만 되풀이해서 만든다.
창의력의 원천이 되는 경험 에너지는 IT 밖에서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안 해 본 것 해보기, 낯선 곳에서의 배회, 여행, 음식, 음악, 명상, 산책 등등. 갖가지 새로운 삶의 경험으로부터 UX 창의력의 원천 에너지를 누적시킬 것.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열심히 UX 학문을 공부할 것.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