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황금알을 낳는 거위..제록스

1938년 10월22일 최초의 복사기

일반입력 :2011/10/27 07:00    수정: 2013/11/24 20:36

이재구 기자

1■카본지로 일일이 복제하는 방법을 벗어날 수 없을까?

미국 대공황이 절정기에 달했던 1938년 어느 날이었다.

“빛을 사용해 이미지, 즉 일종의 그림자를 던지고 이를 종이에 옮길 수 있다면 더 효율적으로 복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뉴욕의 작은 전기회사특허사무실인 PR멀로이앤코(PR MAlloy &Co)에서 일하던 시애틀 출신 청년 체스터 칼슨(Chester Carlson 1906~1968)이란 32살 청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의 관심분야인 화학과 프린팅 기술을 응용해 빛과 프린팅기술을 결합하면 뭔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카본지를 사용하지 않고 자동으로 복사해 주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그는 벨전화연구소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 불황속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특허출원서를 받아 특허업무를 도와주는 이 곳에 자리잡게 됐다.

하지만 칼슨의 업무는 엄청나게 긴 특허출원서 설계도와 명세서들을 복제하는 지루하고 싫증나는 단순업무의 반복이었다. 그 일이란 게 카본지(먹지)를 이용해 일일이 한 장씩 특허출원명세서와 도면을 복제하는 것이었다.

당시 특허 사본을 얻기 위해서는 사진을 찍어 보내는 방법, 또는 힘들게 이를 타자기로 타이핑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시간과 노력이 드는 번거롭고 힘든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낮시간 동안 그 수많은 특허사무실에 수많은 출원서 사본을 만드는 허드렛일을 해야 만 했다. 그러나 밤시간에는 전문대를 다니면서 배운 화학, 그리고 칼테크(CaltTech)에서 의 물리학 전공 경험을 살려 전기전도성을 이용한 더 나은 복사방법 연구에 몰두했다.

일단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그는 사진, 빛의 물리학, 종이처리법, 그리고 인쇄에 대해 두루 연구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이디어의 구현방법을 알아내고자 칼슨은 뉴욕공공도서관을 뒤졌고 결국 이미지 처리와관련된 기존 다양한 연구성과를 파고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헝가리의 물리학자 폴 셀레니(Paul Selenyi 1884~1954)의 빛의 전도성에 대한 연구성과도 알아냈다.

2■아스토리아에서 기계로 최초의 복사가 이뤄지다

“만일 원래 사진이나 문서의 이미지를 전기전도성이 있는 물질의 표면에 비추면, 전류는 인쇄물의 빛이 지나간 자리에서만 흐르게 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판(표면)위에서 빛이 지나간 자취의 패턴을 따라 전기적 성질을 띤 판(plate)에 마른 입자가 달라붙게 한다면 건식인쇄물 복사본을 얻게 될 것이다.“

칼슨은 이런 아이디어에 착안해 자신의 전기사진(electro-photofraphy)기술을 완벽하게 다듬어 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문대 시절 화학적 지식과 대학시절의 빛, 물리학 학습배경에 새로운 지식을 접목한 연구였다. 이후 3년간 낮에는 특허출원 일을 하고 밤에는 뉴욕로스쿨에 다니면서도 시간을 쪼개어 발명에 몰두하게 된다. 그에게 이런 일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병에 걸린 부모를 대신해 방과후 일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던 소년 가장출신이기도 했다.

그의 연구는 뉴욕 퀸즈에 있는 자신의 살림집 잭슨 하이츠 아파트 부엌 연구실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연속적으로 남편의 연구실패를 보던 그의 아내는 자신의 계모가 있는 뉴욕 아스토리아의 미용실 뒤켠 공간으로 가 연구할 것을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10월 아스토리아에 작은 연구소를 차리고 본격적인 연구에 나선 칼슨은 2차대전 난민 출신인 독일인 오토 코르네이(Otto Kornei)를 조수로 고용했다.

칼슨이 사용한 방식은 두가지 빛과 물질이 가진 두가지 기본적인 개념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첫 번째는 상반된 전하를 가진 물질이 서로 끌어 당긴다는 원리, 또하나는 특정 물질의 경우 빛에 노출되면 전기적으로 전도성이 더 높아진다는 원리였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복사기술원리에 대해 특허를 출원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38년 10월22일. 칼슨과 코르네이는 아스토리아 연구실에서 황을 코팅한 아연판에 준비하고 현미경유리슬라이드 위에 인디아잉크로 ‘10-22-38 ASTORIA’(10-22-38아스토리아)라고 써 복사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빛이 인쇄대상물을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리고 아연판에 정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옷감으로 이 금속판 위의 황을 옷감으로 몇초동안 세게 문질렀다. 칼슨은 강력한 불빛을 쪼이면서 글씨가 쓰여진 유리슬라이드를 아연판 위에 놓았다. 그런 다음 슬라이드를 제거하고 아연판위에 카본파우더를 뿌렸다.

그러자 그가 쓴 글자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실험을 마치기 위해 왁스를 입힌 종이로 판위에 눌렀다. 그러자 이미지가 종이에 옮겨졌다.

“나왔다!”

본격적인 연구 시작 1년 만인 1938년 10월22일. 체스터 칼슨은 자신의 조악한 실험실이 있던 아스토리아 빌딩에서 더럽지만 읽을 만한 인류 최초의 전기사진방식을 통한 복사기 복제본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흰종이 위에는 검은색으로 ‘10-22-38 ASTORIA'(아스토리아)라는 인류최초의 복사가 이뤄진 시간과 장소가 찍혀있었다

체스터 칼슨은 사진전도성(photoconductivity), 즉 빛이 물체의 전기적인 전도성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을 처음 성공시키면서 환호했다.

그는 이 특허를 출원한 지 5년 후인 1942년 10월6일 미특허청으로부터 자신의 전기사진복제(electro-photography)출원 기술에 대해 미 특허 2,297,691호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대공황의 절정에 달한 이 시기에 그가 아이디어를 팔려고 시장에 나섰을 때 그는 단지 몽상가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9년 그는 제품 원형(prototype)을 만들기 위한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백달러의 금액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상용화를 위해 만든 제품의 원형은 작동하지 않았다. 또다시 하나를 더 만들어 보았지만 잠깐 동안 작동하는데 그쳤다. 게다가 불운이 겹쳤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세계 2차대전은 그의 복사기 발명품을 잊혀지게 만들었다.

“카본지로도 복사하는데 별 문제가 없는데 그런 기계가 필요할까요?”

1939년부터 44년까지 자신의 발명품에 협력적인 후원자나 구매자를 찾으러 수년간 GE,RCA,IBM,코닥같은 회사를 발로 뛴 칼슨의 제안은 모두 이런 말로 거절당했다.

칼슨은 퇴근 후 토머스 에디슨과 다른 성공적 발명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발명을 반드시 성공시켜 자신의 인생을 바꾸리라고 다짐했다.

열 살 때부터 생각해 온 복사기계를 만들려는 그의 노력이 후원자도 얻지 못한 채 수포로 돌아가면서, 그에게 따라붙은 것은 금전적 파산과 이혼이었다.

3■운명의 신, 카본지 시대를 바꾼 선구자에게 미소짓다

그런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칼슨이 복사기제작을 거의 포기를 할 즈음인 1944년 러셀 데이튼이라는 젊은이가 그를 찾아왔다. 자신은 오하이오주 컬럼버스시에 있는 바텔 메모리얼 인스티튜트((Battelle Memorial Institute)소속의 엔지니어라고 했다. 그역시 칼슨과 비슷한 발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후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조악하기는 하지만, 어떤 화학적 반응없이 건조공정으로 복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다.”

칼슨의 복사기 시연을 본 바텔사의 엔지니어들은 놀라서 탄성을 질렀다.

이듬 해 가을 칼슨은 바텔과 칼슨특허 대리점 계약을 맺었다. 바텔은 추가 연구비용지원과 함께 이 아이디어를 제품화해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전폭적인 투자가 필요했다. 바텔은 코닥이나 해리스 세이볼드같은 회사와 복사기 특허 라이선스계약을 맺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던 행운의 시기가 오고 있었다.

1944년 2차대전이 막바지로 다다를 즈음. 할로이드로 불리는 작은 사진용품 회사의 사장 조 윌슨(Joe Wilson)과 그의 수석엔지니어 존 데소(John Dessaur)가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그의 회사가 있는 오하이오로 찾아 왔다.

“일전에 라디오일렉트로닉엔지니어링(Radio Electronic Engineering)에서 읽었던 전기사진기계를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제로그래피기술에 관심을 보인 조 윌슨(Joseph Wilson)이란 사람은 코닥 카메라의 본거지인 뉴욕 로체스터시의 코닥공장에 사진용 인화지등을 납품하고 있었다. 그는 칼슨의 전기방식 사진복사과정의 시연을 지켜 본 후 데소에게 말했다.

“...물론 시장에 내놓으려면 아직 한참 손을 봐야 하겠지. 그러나 이걸 시장에 내놓으면 우리는 신문의 표지를 장식하게 될 걸세.”

그는 칼슨의 복사기에 대한 가능성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이 기술이 코닥의 그늘이 아닌 새로운 분야로 자신을 인도할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1946년 할로이드는 바텔, 칼슨과 일렉트로제로그래피를 이용해 상업용 복사기를 만드는데 합의했다. 합의내용은 칼슨과 바텔이 복사기술의 기반기술 연구를, 할로이드가 이를 바탕으로 한 상업용 제품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이에따라 할로이드가 복사기 연구개발자금으로 1만달러를 지불키로 합의했다. 이 액수는 1945년이래 할로이드 수익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바텔의 연구는 더디게 진척됐고 제품의 실용화가 안될 것을 걱정한 칼슨은 할로이드의 컨설턴트가 되기로 했다.

바텔은 칼슨에게 복사기 판매에 따른 로열티의 75%를 갖는 조건으로 3천달러의 연구비를 선뜻 지불했다.1947년 바텔은 할로이드라는 로체스터 소재의 이 작은 사진 인화지 회사와 특허라이선스 계약에 사인했다. 이들에게 기본특허에 대한 8%의 로열티를 받는 협약이었다. 그들로서도 커다란 도박이었다. )

4■제록스란 이름의 탄생

“일렉트로포토그래피는 이스트먼 코닥의 사진기술과 차별성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사업과정에서 깨달은 일 가운데 하나는 이 기계의 이름을 새로이 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통해 클린카피(Klean Kopy), 매직 프린터(Magic Printer), 드라이 듀플리케이터(Dry Duplicator)등이 제안됐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만족할 만한 답을 끌어내지 못하자 마침내 언어학 교수가 고용됐다.

그는 말랐다는 뜻의 그리스 단어인 ‘xeros(dry)'와 쓰다라는 뜻의 ’graphein(writing)'이란 단어를 합성해 ‘제로그래피(xerography)‘로 부르자는 제안등이 나왔다. 다. .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수백만 달러를 제로그래피의 기술개선에 투자한 할로이드는 진심으로 자신들의 기술을 가장 적절히 표현해 줄 사명을 찾고싶어했다.

아메리칸 제로그래픽사(American Xerographic Corporation)나 전국 제로그래픽주식회사(National Xerographic Inc.)는 둘 다 썩 괜찮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저거예요, 제록스! X를 양끝에 두는 것말이예요. 말이 되지 않습니까?”

어느 날 조 윌슨과 함께 산책을 나갔던 조 윌슨의 비서 리노위츠가 코닥(Kodak)간판을 보더니 소리쳤다.

이후 할로이드는 할로이드 제록스가 됐다가 곧 제록스로 사명이 바뀌었다. 이스트먼처럼 자기분야에서 독보적 존재가 되고자 했던 조 윌슨의 꿈은 이렇게 해서 서서히 이뤄져 가고 있었다.

1950년대 할로이드사의 연구비 상당부분은 핵전쟁발발시 마이크로필름 기록이 뿌옇게 될 것을 우려한 육군신호부터의 투자자금을 활용해 조달할 수 었었다.

5■한장 복사에 3분...‘황소상자’란 별명의 복사기

“황소상자(Ox Box)!”

1949년에 할로이드사가 만든 최초의 복사기 '모델A'를 내놓자 이를 구입해 사간 사람들이 이 기계에 붙여준 불명예스런 별명이 붙었다.

너무나 복사속도가 느려 옥스박스(Ox Box), 즉 ‘황소같이 느릿느릿 복사되는 기계’라는 의미의 별명을 얻은 모델A는 실제로 효용성이 크게 떨어졌다.

복사를 하기 위해서는 모두 39단계의 수작업을 거쳐야 했는데 반드시 조작자가 손으로 각 복사물을 기계의 한쪽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겨주어야만 했다.

“금속판의 표면을 빛에 쬐어 말리고 깨끗이 하고, 면 부분은 손에 닿지 않게 하며...프로세스접시에 올릴 때 4개의 전극은 64분의 1인치 이상 나오면 안된다. ...”

복사를 하기 위한 준비절차나 과정은 그렇게 까다로왔다. 그 결과 종이문서 한 장을 복사하는데 3분이나 걸렸다.

할로이드사로서는 큰 돈을 들여 확보한 특허로 만든 제품이었지만 모델A 복사기는 재난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프셋 프린팅용 페이퍼마스터인쇄를 하는데 여전히 유용했다.

자금이 말라가고 있었다. 다행히도 핵전쟁 발생시 마이크로필름이 뿌옇게 될 것을 우려한 육군신호부대가 자금지원을 해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가뭄의 단비였다.

이 때 할로이드는 복사의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연구비용을 확충하는데 있어서 칼슨의 모든 특허를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쟁사들이 바텔이 가진 지분을 이용해 칼슨의 특허를 사들일 수 있었다. 55년 바텔의 모든 제로그래피특허를 모두 제공받기로 했다. 조 윌슨은 1956년 1월1일부로 체스터 칼슨에게 수백만달러의 돈을 가져다 주게 될 주식증여 방식으로 모든 제록스특허를 확보했다. 칼슨은 이 거래에 따른 현금과 주식 40%를 받게 됐다.

여전히 윌슨과 칼슨은 더 나은 복사기를 만들기 위해 앞을 보고 나아갔다.

조는 칼슨에게 여러 회사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칼슨은 컨설턴트로서 만족했고 자신의 발명품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칼슨은 토너에 입힐 코팅을 자신의 집 개인 지하실에서 섞어서 할로이드사의 실험실로 가져올 정도로 토너의 제조비법에 집착했다. 심지어 오늘날도 이 제저법들은 제록사의 특급 기밀 중 하나다. 칼슨은 이 내용물을 비밀로 하기 위해 특허조차 신청하지 않았다.

1958년 할로이드는 공식적으로 그들의 이름을 할로이드/제록스로 바꾸었다.

이 때 조 윌슨은 자신의 제품시장이 감소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그에게는 제로그래피밖에 남은 것이 없는 상황에 몰려있었다.

윌슨은 할로이드의 50년된 사진용품 사업을 계속 지켜나가야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업적 통찰력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5■제록스 914, 인류 최초의 자동식 복사기

칼슨의 발명품이 완전한 자동식 복사기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조 윌슨과의 만남 이후로도 무려 12년이라는 긴 시간이 더 필요했다. 역동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의 조 윌슨에게조차도 긴 시간이었다.

최초의 복사기 원형 ‘10-22-1938 아스토리아’본을 만든 때로부터도 21년이 지난 1959년 9월 16일.

뉴욕 5번가 781번지에 자리잡은 38층짜리 셰리 네덜란드호텔 제품발표회장. 2대의 작은 탱크같은 기계가 사람들 앞에 놓여있었다.

“미리 인쇄물 복사를 해 봤는데 글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행사전 방송카메라 앞에서 미리 복사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직원의 말을 듣고 복사물을 본 조 윌슨 사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조윌슨은 급히 로체스터에서 카본 블랙을 공수해 오게 했고 공식 제품 발표회 5분 전에야 카본이 행사장에 도착해 간신히 제품시연회가 열렸다.

“제록스914는 최대 15장까지 한꺼번에 신속하게 복사해 드립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중 한 대에 불이 붙어버렸다. 급히 불을 끄고 나서 또 한 대를 가동하자 일반용지를 사용했음에도 이 기계는 잘 작동했다.

그가 인쇄물 원본을 유리판 쪽으로 향하게 하고 원하는 복사물의 양을 다이얼에 맞추고 버튼을 누르자 정말로 복사기가 복사물을 차례차례로 토해 내고 있었다.

여지껏 3분에 한 장씩 복사되던 수동식 복사기를 보아왓던 이들에게 26.4초마다 한 장씩 복사되는 기계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할로이드/제록스의 조 윌슨사장은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업적 발명품임을 여지없이 과시했다. 이 날 행사는 세계최초로 대규모로 시장에서 팔릴 상업용복사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제록스914는 가로 9인치,세로 14인치((229X356mm)의 종이를 복사한다고 해서 ‘914’로 명명됐다. 무게 648파운드(294kg)인 이 복사기는 마치 작은 탱크같았다. 높이 42인치,가로 46인치,세로 45인치(107X117X114cm)의 크기였다.

최초의 제록스 복사기가 등장한 이래 이때까지 35개 복사기회사가 등장해 있었다. 하지만 이날 행사장에 모인사람들이 만났던 그많은 복사기들과는 달랐다.

실제로 어떤 복사기는 손으로 떼어낼 수 있는 반투명한 원본을 만들어야 했고 다른 복사기는 활성화 성분에 적셔야 하는 등 절차가 너무 길고 성가셨다. 가격이 몇백달러에 불과했을 뿐 최초의 제로그래피 기술에서 약간의 개선이 이뤄진 수준에 불과한 불편한 것이었다.

914가 선명한 복사결과를 쏟아 내는 혁신을 이룩할 수 있었던 비밀은 기존의 아연판 대신 감광성이 높은 물질인 셀레늄을 바른 실린더드럼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7■비싼 혁신적 기기판매, 대여방식으로 뚫다

제록스 914는 개발에만 무려 5,700만달러가 들어 간 대형 프로젝트였다. 당시 할로이드사의 1950년부터 1959년까지 10년간 총수익보다도 더 큰 돈이었다. 그런 만큼 제록스 914 제조비 원가가 200달러에 불과하다 해도 대당 4만달러의 높은 가격은 결코 싸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에게 이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이를 잘알고 있는 조윌슨과 체스터 칼슨은 무조건 팔기보다는 대여판매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는 914를 한달에 74달러씩 받고 임대합니다. 한달에 2000장의 무료복사를 제공하고 그 이상의 복사물에 대해서는 한부당 4센트씩 받습니다.”

이런 복사기 렌털사업계획은 고객들이 엄청난 자산을 투자하지 않고도 914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경쟁사에 비해 너무나도 깨끗한 인쇄물을 만들기 쉬웠고 무엇보다도 복사기 혁명이 일어났다.

조 윌슨의 비서 리노위츠는 “우리중 그 아무도 그것이 얼마나 커질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실제로 언론들은 이 혁신적 기기의 가능성을 외면 한 채 하품만 하고 있었다.

마치 1948년 6월 AT&T 벨연구소가 트랜지스터를 발명했을 때 아무도 이 중요한 발명품의 가치를 몰라봤던 것과 비슷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발표를 완전히 무시하고 한줄도 싣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인색하게도 다섯줄을 할애하고 그 이야기를 묻어버렸으며 파이낸셜 월드는 일곱줄짜리 기사를 썼다.

포브스지는 “할로이드사가 겨우 1900만달러의 자산밖에 없다”는 이유를 들어 기사를 전혀 싣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직 비즈니스위크만이 914의 혁명성을 이해하고 조 윌슨과 914를 1959년 9월호 표지에 실었다.

1961년 조 윌슨은 코닥Kodak)처럼 회사이름을 앞에서 읽든 뒤에서 읽든 같게 만들어, 손쉽게 구별할 수 있는 제록스(Xerox)로 사명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8■제록스 914,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등장

914가 무시받은 것은 당시 이미 수많은 복사기가 나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1960년 3월 제록스의 가장 큰 경쟁제품은 3M사의 서모팩스(ThermoFax)와 코닥의 베리팩스(Verifax)였다.

하지만 제록스 복사기의 명성은 날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발매 첫 해인 1959년 할로이드의 제록스 914판매 순익은 200만달러에 달했다.

1960년 데비(Debbie)라는 소녀가 등장하는 제록스 914복사기 광고는 많은 사람들이 뇌리에서 결코 지우지 못할 강한 인상을 남긴 결정적인 것이었다.

TV광고에 등장한 소녀 데비가 인쇄물 15장을 복사한 후 “어느 게 진짜야?”라는 질문을 받자 “잊어버렸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것이었다. 순간 사람들은 원본과 거의 똑같은 복사물을 만들어 주는 복사기의 대명사로 914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후 914광고에서 제록스는 소녀 대신 침팬지를 등장시켜 복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제록스는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복사기”라는 이미지를 굳혀갔다.

등장 2년만인 1962년 1만대의 914가 팔렸다. 그리고 이 해에 제록스사는 처음으로 포춘지 선정 500대기업의 423위에 진입했다. 1965년이 되자 제록스는 직원 7,000명을 거느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67년까지 9년간 전세계에서 9000대의 제록스 914가 임대되었고 대당 4,500달러의 수익이 나왔다 각각의 복사기들이 1년에 평균 10만개의 복사물을 만들었다. 이는 무료 복사허용치 2만4천장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500개이상의 복사기 관련 특허가 제록스를 외부의 경쟁기업의 추격으로부터 회사를 보호해 주었다. 매출은 그 어느때보다도 빠르게 성장했다.

체스터 칼슨은 자신이 세운 바텔사의 제록스 특허로열티 가운데 40%를 받으면서 백만장자대열에 합류햇다. 1964년 로열티만도 300만달러에 달했다. 그의 로열티는 매년 1백만달러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제록스사의 수익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면서 1968년에는 연간 10억달러를 넘어섰고 이윤은 1억3400만달러에 이르렀다.

1970년 제록스는 포춘 500대기업에서 40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제록스의 아버지 칼슨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자선사업과 대학에 기부했다. 죽기 전 그가 기부한 자선금은 1억달러였다.

9■X-PARC, 미래의 사무실을 창조하다

“미래의 사무실(The Office of the Future)을 창조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진 제록스사는 언젠가 이 번영이 스러져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캘리포니아에 미래기술 개발 연구소를 만들고 싶어했다. 1970년 제록스는 세계정상급 IT전문가와 물리학자들을 모아 정보의 설계자(The Architect of Information)로 만들고자했다. 조지 페이크박사의 지도 아래 만든 연구소의 이름은 제록스 팰러앨토리서치센터(XeroX Palo Alto Research Center, X -PARC)였다.

제록스PARC에서 개발된 것 가운데 오늘날의 태블릿 PC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장 유명한 것으로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를 빼놓을 수 없다. 이미 PARC에서는 그 당시 아이콘 팝업메뉴, 윈도겹치기 등 포인트앤클릭 방식을 통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PARC의 연구성과와 후일 IT산업게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당장 설립 이듬해 등장한 레이저프린터가 그신호탄이었다.

제록스파크 연구진은 레이저를 조절해 제로그래픽 복사기 드럼 위에서 비트맵 전자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 레이저 프린팅발명은 디지털문서를 종이위에 단절됨없이 재현해 낼 수 있도록 해 주면서 제록스에게 수십억달러의 프린팅사업을 가능케 해주었다.

1972년 제록스파크는 최초의 객체지향형(Object Oriented)프로그래밍 언어인 스몰토크(Small Talk)를 설계해 통합된 개발환경을 제공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것은 프로그램을 완전히 다시 쓰지않고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혁신적 기술은 SW산업의 혁명을 가져왔고 이후 나올 모든 프로그래밍 시스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퍼스널컴퓨터의 원형이 된 매끄러운 모양의 하드웨어가 나온 곳도 이곳이었다. PARC연구원들은 1973년 퍼스널 워크스테이션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제록스 알토(Alto)였다. 이 클라이언트서버 아키텍처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대하고 중앙집중적 계층구조를 넘어선 컴퓨팅의 세계로 인도했다. 이 기술은 역시 이곳에서 개발된 세계최초의 비트맵디스플레이,윈도와 아이콘을 가진 그래픽 유저인터페이스(GUI),위지위그(WYSIWYG)에디터,근거리통신망(LAN)스토리지,상업용마우스를 채택하는 PC로 진화했다. 이 해에 밥 메트칼프는 하나의 동축 케이블 안에서 워크스테이션, 파일, 프린터를 통해 상호교신할 수 있는 목적의 시스템을 제안한다. 누구나 망의 데이터트래픽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망에 접속하거나 떠날 수 있게 됐다. 이더넷이었다.

1974년 위지위그에디팅을 개발한 PARC과학자들의 캐치프레이즈는 이 컴퓨터 기능 사용상의 이점을 위지위그(What You See Is What You Get), 즉 보는대로 구현한다는 말로 요약했다. 제록스PARC는 또 세미널 브라보 워드프로세싱 프로그램을 시연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MS의 워드(Word)의 기초가 됐다.

이 해에 PARC는 세계최초의 갈륨비소(GaAs)레이저를 시연했다. 1982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고출력의 끊기지 않는 작은 고체반도체다이오드레이저를 시연했다.

1979년 PARC는 사전이나 다른 기기에 사용되는 단어의 철자를 체크하기 위해 인간 언어구조에 기반한 컴퓨터언어기술을 발명한다. 이들은 컴퓨터로 자동화하는 비주얼리콜,지능검색, 언어압축, 그리고 나중에는 검색과 텍스트분석을 위한 보다깊은 의미기반의 언어이해시스템을 가능하도록 이끌게 된다.

10■시련...일본업체의 등장과 반독점법 소송

이처럼 황금기를 구가하던 제록스에게 미국의 모든 잘나가는 기업들의 훈장같은 반독점법 위반 소송이 비껴갈 리 만무했다.

1972년 미국의 양대 반독점법 집행기관 가운데 하나인 미연방거래위원회(FTC)는 미국복사기 시장의 60%를 점하고 있고 플레인페이퍼 복사기 시장의 95%를 점하고 있는 제록스를 반독점법위반혐의로 고발한다. 1975년이 돼서야 해결된 이 법정공방 결과는 1700개의 복사기 특허권을 미국내 다른 복사기 업체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마감됐다.

반독점 소송이후 80년까지 제록스의 미국내 복사기 시장 점유율은 80%에서 13%로 급속히 떨어졌다. 이후 제록스의 80년대 복사기 판매 마진은 70%에서 10%로 떨어졌다.

게다가 해외경쟁사, 특히 일본 업체들의 등장도 골칫거리였다.

작게 만드는 기술로 80년대에 세계 전자시장을 쥐락펴락했던 일본의 복사기메이커들이 반값에 불과한 값싼 복사기를 들고 시장공세에 나섰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소형 복사기를 내놓으면서 제록스는 물론 다른 미국 복사기업체들을 크게 흔들기 시작했다.

11■벼랑끝에서 돌아온 제록스

2000년 초.

일본의 저가 복사기 공세는 더욱더 강력하고 집요하게 황금알을 낳던 거위인 914기반의 세계최초의 복사기 제조회사를 침몰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회사 경영진이 이익을 부풀린 혐의로 회계부정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기업 이미지마저 추락했고, 한때 63달러에 달했던 주가는 4.4달러로 폭락했다.

그 잘나가던 제록스는 파산 일보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제록스 이사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인사 부문 대표를 지냈던 앤 멀케이(Anne Mulcahy)를 CEO로 임명했다.그녀는 아무도 최고경영자(CEO)감으로 여기지 않았던 무명의 인물이었다. 심지어 가정을 위해 몇 번이나 회사를 그만두려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기적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멀케이가 CEO에 취임한 2000년 8월 당시, 제록스는 구조조정에 실패하면서 171억달러의 부채를 짊어진 '쓰러져 가는 공룡’이었다. 수년간의 판매 감소와 호황시절 수준으로 지출되는 높은 비용이 몰락의 원인이었다.

보유 현금은 1억5400만달러에 불과했고, 손실은 계속 쌓여만 갔다. 복사기를 팔 때마다 고장난 복사기를 수리하는 비용이 더 들 정도였다.

직원들도 고객만큼이나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해 10월 제록스는 16년 만에 첫 분기 손실을 기록했고 빚은 쌓여만 갔다. 또 증권거래위원회는 제록스의 회계 부정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단 회장에 오른 멀케이는 제록스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파산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

소가 도랑에 빠졌다면 먼저 소를 건져내고 다음에 어떻게 도랑에 빠졌는지 알아낸 뒤에 소가 다시는 도랑에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일단 CEO에 오르자 전혀 이사회나 세간의 기대를 받지 못했던 그녀가 뚝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구원투수로 등장한 멀케이 회장은 이른바 '3C'를 들고 나왔다. 그것은 다름아닌 '컬러복사기(Color),고객우선(Customers),비용절감(Costs)'이었다.

최초의 중요한 결단 가운데 하나는 2001년 자신이 일구며 막 시작한 제록스의 뉴욕 로체스터 잉크젯프린터 부문 공장을 1년도 안돼 폐쇄시켜 버린 일이었다. 또 9만6000명이던 직원을 5만5000명으로 40%나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파산에 몰린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수족도 잘라낼 수 있음을 보여준 과감한 결단이었다.

이와 동시에 시작한 일은 임직원의 신뢰를 얻는 일이었다. 항상 직원들을 향한 대화의 창구를 열어 놓았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전세계 제록스 직원들과 영업 전략을 논의했다.

그러나 멀케이는 인력을 감축하면서도 연구개발비(R&D)를 매출 대비 6% 수준으로 유지했다.

그녀는 특히 제록스가 한때 독점적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버리지 못했다면 회생도 힘들었을 것“이라면서 과거 황금기의 제록스 사업 모델은 사라졌다는 점을 인정하려고 애썼다.

서서히 호전되기 시작한 경영성과는 2004년 2분기 실적 발표에서 그대로 반영됐다. 8600만달러의 순익을 기록하며 제록스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부채는 43억달러로 감소한 반면, 보유 현금은 30억달러로 대폭 늘어났다.

미국 재계 인사들은 “그 흔한 MBA(경제학 석사) 경력도 없이 열정 하나로 작은 기적을 이뤄냈다”며 그녀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다시는 이 회사를 다닌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4년 6월 그동안 멀케이를 자신의 ‘보스’로 인정하지 않았던 한 회사 간부가 연례이사회직전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수많은 인원을 해고시키고 새벽 벽두부터 회의를 소집했던 ‘철의 여인’은 이 순간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벼랑 끝에서 돌아온 제록스(Back from the Brink: Xerox )'

2006년 4월 24일 월스트리트 저널은 24일(현지시간) 라는 기사를 통해 제록스를 벼랑끝에서 살려낸 멀케이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멀케이는 지난 2001년 CEO 취임 이후 각종 비용을 30%가량 줄임으로써 부도 위기에 몰린 회사를 4년 연속 흑자로 돌려놨고 신제품 개발로 제록스를 첨단제품 시장을 리드하는 강자로 만들었다. 그는 취임 이후 5년 동안 비용절감과 인력조정을 통해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당시 9만6000명이던 직원은 이제 5만5000명으로 줄어들었다. 4만명 이상을 잘라냈다. 또 100억달러 상당의 부채를 줄였고 후지제록스 지분의 절반을 팔아치웠다. 또 감사와 최고 재무책임자 등 주요 간부들도 교체했다. 하지만 최근 2년 동안 주당 순 익이 3배가량 올랐지만 주가가 답보상태인 점은 멀케이의 새로운 도전 과제다....”

그녀는 2009년 5월 퇴임을 발표하고 후임 우르슬라 번스에게 CEO직을 넘겨주었다.

12■복사기의 아버지 체스터 칼슨, 그리고 제록스의 오늘

제록스의 아버지 체스터 칼슨은 1968년 9월19일 뉴욕 웨스트 57번가 페스티벌 시어터에서 “호랑이를 탄 사나이”라는 영화를 보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포춘이 선정한 미국의 부자 재산금액을 지적하면서 그의 재산은 그보다 훨씬 적다고 지적하기까지 했다. 이는 자신의 재산을 끊임없이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스터 칼슨이 남긴 제로그래피 기술은 전세계 복사기 산업의 초석이 돼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복사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가 세계 최초로 만든 복사기 복사본 ‘10-22-1938 ASTORIA'는 그로부터 47년 뒤인 1985년 미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박물관의 영구소장품이 되었다.

포브스지는 그의 업적에 대해 구텐베르크이후 최대의 발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오늘날 미국의 가장 위대한 발명가중 한사람이자, 자수성가한 사람의 대명사로, 또한 자선사업에 열성을 다한 기업가로서 존경을 받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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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제록스는 “복사좀 해주실래요(Would you please xerox this for me?)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명사 혹은 동사로 사용되는 드문 일상 단어중 하나가 되었다.

지난 2010년 제록스는 13만 6천500명의 임직원에 매출 255억달러, 수익 12억9천만달러, 자산 306억달러의 실적을 가진 회사로 거듭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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