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8억명이 열광한 친구사이트

2004년 2월 4일=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서비스 시작

일반입력 :2011/02/16 10:58    수정: 2011/11/01 13:15

이재구 기자

■구글 CEO의 갑작스런 보너스∙급여 인상

“...그래서 우리가 내린 결정은...여러분 모두에게 2011년 1월 1일부터 10% 임금인상을 한다는 점입니다. 이 급여는 전세계 구글 직원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누구든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구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급여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2010년 11월 9일. 검색제왕으로 불리는 구글의 에릭 슈미트 CEO가 느닷없이 사내통신망에 올린 편지였다. 이 메일은 ‘비밀: 사내한’ 이란 제목에 이어 ‘구글러(Googlers)에 한함(정규직원 및 임시직원에게)’이란 부제목이 함께 붙어 있어 뭔가 비밀스런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당장 이번 임금인상과 보너스 지불에 든 현금만도 거의 2000만달러로 연간으론 10억달러에 이르렀다

직원들은 느닷없는 이 메일에 어리둥절해 했지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튿날 이 소식은 월스트리트저널 같은 유력신문들을 필두로 앞다퉈 보도됐다.

“구글이 페이스북 등 경쟁사로 떠나는 임직원을 잡기 위해 직원 2만3천여 명의 임금을 10% 인상키로 했다.”

2년 전부터 시작된 구글 직원들의 이직자 수는 어느 새 2백명을 넘어섰다.

몇 년 전만 해도 야후나 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인재를 빼오던 구글로서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들이 간 곳은 미국 주식시장에서 최고의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인기절정의 애플이 아니었다. 지난 2004년 창업한 1700명 직원을 가진 페이스북이었다.

보너스 소식 한달 전인 10월 ‘구글맵’의 공동창업자인 라스 라스무센이 페이스북으로 옮겨간 것을 포함, 137명이 페이스북으로 옮겨갔다. 그 인기는 2000년 닷컴버블시대의 최고 인기주 AOL타임워너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친구 사귀는 온라인 웹사이트’로 정의될 이 회사 CEO는 하버드 대 출신의 25세 청년 마크 주커버그였다.

인력 유출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특히 그 시작을 알리는 가장 쇼킹했던 사건은 셰릴 샌드버그 최고운영책임자(COO)의 이직이었다. 애드센스는 그녀의 아이디어였다. 2008년 3월 그녀의 이직 후 2년간 광고담당 주요 임원, 프로덕트 매니저, 크롬 및 안드로이드 SW관련 엔지니어 등이 줄줄이 옮겨갔다. 심지어 구글의 자랑인 요리사까지 가세했다.

■하버드대를 뒤흔든 ‘얼짱고르기’ 웹사이트

“외모 덕분에 하버드에 입학했습니까? 아니오! 사람들의 외모를 평가하시나요? 네!”

2003년 11월 2일 일요일 오후. 미 하버드대 기숙사 커클랜드 H33호. 컴퓨터공학과 학생 하나가 마악 가동에 들어간 사이트의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글이었다. 사이트 이름은 ‘페이스매쉬(Facemash)’. 글은 물론 사이트의 내용과 형식 자체가 누가 봐도 도발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버드 9개 기숙사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얼굴을 비교해 최고 얼짱을 가리도록 한 사이트였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사진을 나란히 올려놓고 둘 중 한사람의 얼짱을 고르도록 해 이긴 사람만 남도록 했다.

개발자인 2학년생 주커버그는 기숙사 학생들이 만든 웹사이트 내 인명록, 즉 페이스북을 해킹했다. 그는 8시간 만에 완성한 이 사이트를 친구들에게 링크를 걸어 보냈고 친구들은 여기에 빠져들었다.

사이트 개설 한 시간쯤 됐을 때 주커버그와 가까운 기숙사의 한 게이남학생이 가장 매력있는 남학생으로 뽑혔다.

“이것 봐, 내가 최고의 얼짱으로 나왔다구! ”

그는 친구들에게 이 사이트를 알렸고 친구들 역시 페이스 매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커버그가 밤 10시쯤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노트북은 갑자기 늘어난 페이스매쉬 사용자들로 인해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다.

“컴퓨터가 다운됐어.”

곧 시스템이 정지했고 사태를 파악한 대학전산당국은 사이트를 차단해 버렸다. 하지만 이 시점인 밤 10시30분까지 450명의 학생이 방문해 무려 2만 2천장의 사진에 투표를 했다.놀라운 인기였다. .

하지만 여성인권모임,하버드흑인여학생회 회원들은 성차별적이고 인종주의적이라며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학생처가 학생심판위원회를 열었다. 주커버그에게는 대학의 보안, 저작권 침해, 사생활 보호,측면에서 교칙을 어긴 죄로 근신과 면담조치라는 징계가 내려졌다.

주커버그-윙클보스 형제의 운명적 만남 이후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아. 그러니까 내가 내일 밤까지 모든 기본 기능을 완성하고 나서 보자구.”

2003년 11월 30일 이른 저녁. 하버드대 커클랜드 기숙사 식당. 캐머런 윙클보스, 타일러 윙클보스 형제와 디비야 나렌드라는 주커버그와 하버드 커넥션이라는 소셜네트워크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날 늦은 밤. 프로젝트에 대해 열정적 관심을 보였던 프로그래머 마크 주커버그가 윙클보스 형제와 디비야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A)신규가입자들은 Havard.edu가 붙은 e메일로만 등록할 수 있는 하버드생들만을 위한 사이트를 만든다. (B)하버드 커넥션을 하버드대 주변의 학교로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주커버그와 만난 3명은 이미 2002년부터 가져 온 아이디어를 구체화해 웹개발을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새학기가 되면서 웹 프로그래밍을 맡았던 빅터 가오라는 친구가 떠나야 했다. 가오는 페이스매쉬로 하버드의 명사가 된 주커버그를 떠올리고 그를 소개해 줬다.

첫 미팅 다음 날인 12월 1일. 주커버그는 신나 있는 듯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두 개 등록페이지 가운데 하나를 함께 모았는데 이제 모든 게 내 시스템에서 잘 돌아가. 아주 잘 돌아가기 시작했지. 이젠 나머지 잔잔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면 돼.”

하지만 며칠 뒤에 온 주커버그의 편지에서는 어조가 좀 변해 있었다.

16번 오간 편지 가운데 해를 넘긴 1월 8일자 주커버그의 마지막 편지까지 모두 바쁘다는 얘기 일색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편지에는 “나는 여전히 우리가 이사이트에서 충분히 운영할만큼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어....”라는 말이 포함돼 있었다.

1월 11일. 즉 네학생이 마지막 미팅을 가지기 사흘전 주커버그는 친구 에두아르도 세이브린을 통해 서버이용료 35달러를 지불한 ‘더페이스북(The Facebook.com)’이라는 소셜네트워크 사이트를 개설했다. 그리고 2004년 2월4일 주커버그는 하버드대생 대상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에 들어갔다.

■하드디스크 조사로 배상을 이끌어내다

“주커버그는 의도적으로 우리들을 도와 소셜네트워크인 하버드커넥션(HarvardConnection .com) 구축을 도와줄 것처럼 믿게 하고 나서는 우리 아이디어를 도용해 경쟁사를 만들었습니다.”

더페이스북 사이트가 출범된 지 6일 만인 2월 10일. 하버드대 3학년 윙클보스형제, 디비야 나렌드라 등 3명의 하버드생은 학생처에 심판을 요구했다.

주커버그는 2월17일 학생처장에게 보낸 장문의 경위서에서 그는 윙클보스형제가 만든 사이트가 형편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시작할 때부터 엉망진창에다 복잡한 사이트로 이전 프로그래머들이 작업해 놓은 결과물이 매우 실망스러웠어요...그들이 광고나 사이트 운영에 필요한 HW, 심지어 사이트에 올릴 그래픽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는 점이 불만스러웠습니다.”라고 적었다. 그 해 9월 하버드커넥션의 아이디어를 낸 세사람은 주커버그를 보스턴 법원에 고소했다.

3년 만인 2007년 매사추세츠법원의 더글러스 P. 우드록 판사가 판결을 내렸다.

“마크가 윙클보스 형제의 소셜네트워크 특허를 침해했다는 주장은 근거없다.“

기숙사에서 이뤄진 말은 계약이 될 수 없다는 데 기초한 판결이었다.

'커넥트유'라는 사이트를 만든 윙클보스형제도 물러서지 않았다.

“주커버그의 하드디스크드라이브에는 인스턴트메시지와 이메일이 들어있을 겁니다. 이를 보도록 해 주십시오.”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하드디스크 안에는 주커버그아 친우간에 오간 하버드커넥션 사이트 관련 이메일 및 AOL인스턴트메시지(AIM)내용이 들어있었다.

이 내용이 확인되자 주커버그는 결국 배상에 합의했다. 2008년 커넥트유는 페이스북과 현금 2천만달러를 포함해 모두 6천500만달러 규모(당시 페이스북 가치 기준)의 금전적 배상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페이스북 측은 주커버그가 그들 프로젝트를 돕겠다고 동의한 적이 없으며, 하버드커넥션 개발 시작 1주일 전에 별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학소셜네트워크의 주인공으로 우뚝서다

‘더페이스북은 대학생들 간의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사람을 연결하는 온라인 인명록입니다.우리는 하버드 학생들을 위해 더 페이스북을 만들었습니다. 학교의 인물을 검색하거나 수업을 같이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친구의 친구를 찾아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소셜 네트워크를 그려보세요.’ 2004년 2월 4일 수요일 오후. 서비스에 들어 간 더페이스북(Thefacebook.cm)에 주커버그가 네 번째로 가입했다. 테스트용으로 쓰인 3개의 계정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그가 1번인 셈이었다. 다섯 번째가 룸메이트 휴즈, 여섯 번째는 모스코바이츠, 일곱 번째가 세이브린이었다. 주커버그의 과 동기 앤드류 맥컬럼이 알파치노의 이미지를 수많은 '0'과 '1'로 채워서 페이스북의 로고인 굵은 'f'를 제작했다.

“300명 정도되는 커클랜드하우스 학생전체에게 메일을 보내자.”

누군가가 말했다. 메일이 나가자 마자 가입자가 늘어났고 입소문이 폭발적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더페이스북은 쉬는 시간마다 학생들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하버드생만 가입할 수 있는 이 사이트의 회원이 되려면 프로필사진과 몇가지 개인정보를 입력해 프로필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메뉴에서 '싱글''이성친구 있음''이성친구 원함' 중 하나를 골라 공개할 수도 있었다. 전화번호나 인터넷서비스회사인 AOL의 인터넷메신저 아이디나 이메일 주소를 쓸 수도 있었다. 그(또는 그녀)가 무슨 수업을 듣는지 입력할 수도 있고 가입한 클럽, 정치성향 좋아하는 문구를 써넣을 수 있었다. 더페이스북은 자체적으로는 아무 콘텐츠가 없는 빈 공책같은 것이었다. 가입회원들이 그 안에 자유로이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플랫폼SW였다.

하지만 주커버그는 처음부터 미 전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셜네트워크를 꿈꾸고 있었다.

오픈한 지 2주일째부터 다른 대학교 학생들로부터 자신의 학교에서 사이트를 개설해 달라는 이메일을 받기 시작했다. 더페이스북이 설치된 대학에서는 다른 대학간 연계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청까지 들어왔다. 설립후 몇주간 매출이 전혀 없었다. 회사설립 넉달째. 한 투자자가 더페이스북을 1천만달러에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냈다. .

■냅스터 창업자 션 파커와의 운명적 만남

“...샌프란시스코의 벤처투자자들에게 자네를 소개시켜 주지. 나는 최근 이 분야에 중요한 핵심 특허를 취득한 링크드인과 트라이브의 CEO와도 친구지. 자네에게 이들 특허가 더페이스북에 불리하게 사용되지 않도록 논의하기 위해 만남을 주선해 줄 용의가 있다네.”

주커버그는 설립된 지 한달 만에 션 파커라는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자는 199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숀 패닝과 함께 전세계 음악산업을 송두리째 뒤흔든 P2P 음악서비스 냅스터를 만든 션 파커였다. 냅스터는 2001년 2천600만 사용자들 끌어들이며 성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션 파커는 소셜네트워크가 큰 비즈니스가 되리라 확신한 실리콘밸리 사업가 중 한명이었다. .

닷컴버블이 꺼진 지 3년째. 당시 더페이스북만이 유일한 소셜네트워크는 아니었다. 이미 1997년 뉴욕에서 식스디그리스닷컴(sixdegrees.com)이 만들어졌었다. 이 사이트는 세상 사람들은 최측근부터 시작해 누구라도 여섯단계면 모두 연결될 수 있다는 개념을 재확인시켜 준 바 있었다.

닷컴버블로 식스디그리스가 사라진 2003년 가을.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들은 당시 인기있던 4개의 소셜네트워크회사인 프렌드스터, 링크드인,스포크,트라이브에 수천만달러를 투자하고 있었다.

2003년. IT트렌드가 소셜네트워크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초고속 인터넷망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15%였던 초고속인터넷 사용자가 25%로 늘어났다.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돼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기가 쉬워졌다.

그 해 4월 뉴욕. 션 파커가 주커버그를 만난 저녁식사 자리에서 파커에게 걸려온 변호사의 전화는 두사람을 맺어준 운명의 전화가 됐다.

“온라인주소관리서비스회사인 플락소이사회가 남은 지분 중 절반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네.”

이후 주커버그는 파커로부터 실리콘밸리에서의 경험을 듣기로 했고, 그를 사장으로 불렀다. 새로운 사업을 하고 싶었던 파커역시 적극 적으로 나섰다. 파커는 그때까지 더페이스북을 이성에만 관심있던 하버드대생들의 장난처럼 치부하던 실리콘밸리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그는 회사설립이나 자금투자에 대해 문외한인 페이스북 창업자들을 대신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보호해 주는 바람벽 역할을 톡톡히 했다.

MTV, 젊은층에 어필하는 소셜네트워크에 눈뜨다

2005년11월 초 MTV사장으로 부임한 마이클 울프는 조바심하고 있었다. 맥킨지 컨설턴트 출신인 그는 페이스북의 독특하고 강력한 힘에 대해 알고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주고객층인 대학생 포커스그룹은 조사 때마다 페이스북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었다.

이 회사 고위경영진들도 내심 언젠가 이런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가 자신들을 밀어내고 떠오를지도 모른다며 긴장했다. 그래서 울프 사장에게 페이스북이란 새로운 미디어는 더욱더 위험하면서도 손에 쥐고 싶은 존재였다.

이들이 특히 걱정하는 것은 경쟁사랄 수 도 있는 뉴스코프의 폭스방송국이 자회사 마이스페이스를 이용해 TV광고영업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소셜네트워크와 TV광고상품을 합쳐서 패키지로 파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울프사장은 주커버그를 설득해 회사를 살 요량으로 팰러앨토에 있는 주커버그 사무실로 날아갔다. 어느 정도 가격이면 회사를 팔 수 있는지요?

적어도 20억달러 이상입니다.

다음 달 울프사장이 그에게 뉴스코프의 페이스북 인수설이 나도는 가운데 이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주커버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뉴스코프는 너무 할리우드 같은 미디어 회사여서 우리 같은 기술중심의 회사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걸요?”

울프는 대규모 파트너십체결과 함께 바이어컴이 페이스북 일부를 사는 거래를 제안했지만 또다시 간단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돈은 그리 필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페이스북만큼 좋은 아이디어를 다시 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2006년 3월말 비즈니스위크는 ‘페이스북이 우리동네에 떴다“는 제목으로 페이스북과 MTV 간 거래불발 스토리를 실었다.

하지만 한달 후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 엑셀파트너스는 페이스북의 투자 전 회사가치를 5억달러로 매겨 주었다.

■IT거인들, 페이스북을 향해 달리다

10억달러에 귀사를 인수하고자 합니다.

2006년 6월 테리 시멜 야후 CEO가 10억달러 투자제안서를 공식 전달했다. 하지만 주커버그가 즉각 반대입장을 냈다. 인수 제안은 무산됐다.

두달 후 구글이 마이스페이스 사이트에서 검색과 광고를 제공하는 대가로 3년간 9억달러를 제공키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다음날 구글의 거래에 자극받은 MS가 페이스북 상의 광고거래 조건을 물어왔다. “MS의 광고영업망을 이용해서 페이스북의 배너광고를 팔아주고 싣는 광고마다 적절한 CPM(1000명당 메시지 전달 비용)을 보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두 회사는 ‘MS가 페이스북 매출의 대부분을 산출하는 광고부문의 배타적 파트너가 되며,페이스북은 MS광고 인벤토리에 있는 광고만 서비스한다’는 조건으로 합의서에 사인했다.

2007년 10월 10일. 구글은 자사 주최의 '자이트가이스트'라는 광고 클라이언트 대상의 연례행사장에서 주커버그에게 페이스북 인수의사를 밝혔다. 구글은 넌지시 150억달러를 제시했다. 얼마 안가 MS도 그가격을 제시했다.

“제가 통제권을 가질 수 없다면 회사를 팔 생각이 없습니다.”.

주커버그에겐 급할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2007년 10월22일 월요일 오전 11시 팰러앨토 유니버시티애비뉴 2층 페이스북 사무실. 페이스북은 MS에게 “오른쪽 아래 공간에만 광고할 것, 그리고 최소 보장 광고수량이나 페이스북에 지급할 최소보장 금액 같은 조항을 없앤다”는 데 사인했다. 물론 광고매출은 두회사가 나눠 갖기로 했다.

이틀 후인 24일 MS가 페이스북의 주식 1.6%를 약 2억4천만달러에 구입했다고 발표했다. 페이스북의 회사가치는 1년만에 150억달러로 치솟았다.

거래가 공개되자 월스트리트저널은 페이스북을 ‘새로이 떠오르는 진주’라고 불렀다. 이 계약이 2000년 끝난 인터넷 버블을 환기시킨다고도 적었다. 2010년 10월 13일부터 MS는 빙과 페이스북 콘텐츠를 통합해 제공하기 시작했다. MS는 향후 10년간 야후에게 검색엔진으로 자사의 빙을 쓰도록 설득한 데 이어 구글을 공격할 신무기로 페이스북을 추가하는데 성공했다. 연초 뉴스코프가 더블클릭 닷컴을 31억달러에 인수했다는 소식에 쇼크받았던 스티브 발머 MS CEO는 이로써 간신히 한시름 덜 수 있었다.

■ 이 쓰레기 같은 기능을 꺼버려

“페이스북의 새 기능을 보노라면 마치 내가 스토커처럼 느껴져요.”

2006년 9월 5일 화요일. 주커버그가 1년 가량 야심차게 준비한 새 서비스를 내놓자 이용자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뉴스피드'라는 이 기능은 페이스북 사용자들이 생산해 내는 정보를 해부하는 여러 개 알고리듬을 이용,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사용자 친구들의 관심사항,프로필 상의 변화 등을 선별했다. 그리고 이를 친구들에게 최신 순서대로 15분 단위로 보내주는 컨셉트였다.

600만명 회원에게 보내는 만큼 설계 프로그래밍 상으로도 커다란 도전이었다. 하지만 사용자의 입장과 서비스제공자의 입장은 달랐다.

“이 쓰레기 같은 기능을 꺼버려!”

일리노이 노스웨스턴대 학생 벤파는 로그인한 페이스북에서 발견된 느닷없는 기능변경에 대해 이러한 첫반응을 보였다. 분노한 그는 재빨리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모임’을 결성했다.

“페이스북, 이번에는 너무 심했어, 각자 업데이트하는 내용이 모든 사람에게 자동으로 알려지길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너무 오싹하고 마치 스토커같아. 이런 기능은 없어져야만 해.”

약 세시간 만에 그룹 회원수는 1만 3천명을 넘었다. 사흘만인 금요일이 되자 회원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70만명에 이르렀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보내는'뉴스피드에 대한 거부감은 극에 달했다.

주커버그는 뉴스피드에 대해 “당신 친구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주는 ”가장 멋있는 방법이라고 재강조하면서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고집스럽던 주커버그도 결국 손들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정말 큰 실수를 했습니다. 새 기능을 제대로 설명시켜 드리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회원들이 직접 기능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른 점도 깊이 반성합니다. 또한 즉시 적합한 프라이버시 보호기능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저희 실수가 컸음을 인정하며 이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새로운 프라이버시 보호기능이 배포됐다. 사용자들이 뉴스피드로 중계되는 개인정보를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구글, MS 수준의 플랫폼 영향력을 꿈꾸다

“오늘 모두가 함께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겁니다. f8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페이스북에서 세상을 더욱 열린 장소로 만들 겁니다. 그리고 정보를 더욱더 효율적으로 공유하는 커넥션을 만들 겁니다...”

2007년 5월 24일 오후 3시 샌프란시스코 디자인센터 f8 행사장. 몰려든 800명의 앱 개발자 앞의 연단에 오른 주커버그가 말했다. 그는 이 행사를 기폭제로 삼아 페이스북 중심의 새 인터넷사용자 생태계를 만들고자 했다. 페이스북 프로그래머들은 3개월 전부터 시내 호텔에서 내내 플랫폼을 꿈꾸며 개발해 왔다. 그의 꿈은 PC용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고자 하는 개발자 누구나가 PC앱 사용의 근간으로 삼는 MS윈도 같은 플랫폼을 꿈꾸고 있었다.

주커버그는 30여분짜리 연설에서 새 뉴스피드를 설명했다. 새 뉴스피드에서 즉석 동영상 녹화기능까지 설명을 마치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앱 개발자들은 앱을 자유로이 배포할 수 있었고 새 앱을 페이스북에 덧붙이고 싶다면 원클릭으로 충분했다.

주커버그가 단상에서 “광고해도 좋고 거래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이를 장려합니다. 매출은 다 가지세요‘”라고 말하자 객석에서는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f8 이후 초기 소셜네트워크 창업경험자인 소셜네트워크 특허 보유자 핀커스는 징가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이어 페이스북에 텍사스홀뎀포커라는 앱을 만들었다. 이어 팜빌(Farm ville)과 마피아전쟁(Mafia Wars)이라는 게임앱도 만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앱을 설치하면 친구들에게 뉴스피드로 알려졌다.

앱 무료배포권까지 가진 개발자들에게 일종의 골드러시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듬해 6월1일까지 페이스북에는 2만 4천개의 프로그램이 자랐다.

2011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날 월스트리트저널은 4년전 창업한 세계 최대 소셜 게임 업체 '징가'의 몸값은 최대 90억달러에 이르면서 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의 INQ와 대만의 HTC는 페이스북폰을 새로 만들어 공급준비를 하고 있었다. 페이스북 플랫폼의 영향력은 SW를 너머 HW로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과시했다.

■가면무도회 같던 인터넷 세상을 끝냈다.

'세계각국에 있는 5억5천만명의 페이스북을 가진 가입자들을 연결시켰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사는 방식을 바꿨다.‘

2010 12월16일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자 마크 주커버그를 선정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타임은 그가 인터넷 이전의 인류의 삶을 기억할 수 있는, 그것도 아주 조금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1984년생)라고 설명하면서 그런 그가 기업 설립 7년 만에 지구상 인류의 12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을 연결했다고 평가했다.

타임지가 주커버그를 평가한 것은 60년대 이후 두세대를 뛰어넘어 평등과 익명성에 대한 느낌이 없는 세대로서 사어버공간을 훨씬 더 현실과 가깝게 만든 인물“이라고 정의했다. 즉, 그가 가면 무도회같던 인터넷 세상을 끝낸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유로와지고 싶어하지 않으며 더욱더 그 안으로 묻혀버리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깊은 통찰역의 소유자다.”

그에 대한 기사에서 타임지는 그가 그 정도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고 평가를 내렸다.

타임은 70년대의 평등과 익명성의 전자코뮨이 있었다면 80~90년대에는 온라인에 접속해 인터넷에 자신의 짐을 던져 버릴 수 있었고, 서열 인종 직업 결혼여부 거주지 다닌 학교 등 모든 것을 버리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이른다.

“인터넷초기의 인터넷사업자는 ‘sex'를 팔아서 수백만달러의 돈을 발었다. 하지만 주커버그는 '친구(friend)'를 팔아 수십억만장자가 됐다.”

타임지의 분석에도 불구하고 남는 궁금증은 페이스북이 어떻게 그리 빨리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다.

‘페이스북이펙트(Facebook Effect)'의 저자인 포춘지의 데이비드 커크패트릭은 이렇게 분석했다.

“페이스북은 구글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디자인만으로 기술의 엄청난 복합성을 교묘하게 가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쟁사이트인 마이스페이스는 완전히 공개되고 화려하며 제약이 없는 반면 페이스북은 매우 유연하고 단순했다.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여러나라에서 인기를 끌만한 근본적 특징. 즉 ,친구들만 본다는 점이있다. 미국적 색채가 가장 덜하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페이스북은 75개국에서 사용하는 자국어 서비스가 언어의 장벽마저 무너뜨리고 일상생활에서의 언어를 페이스북으로 고스란히 옮겨가게 만들었다.”

이미 2007년 11월 초 주커버그는 광고업계 대상의 행사에서 인터넷 세상을 보다 큰 관점에서 예언하고 있었다.

“ 백년마다 미디어는 바뀝니다. 지난 백년은 매스미디어가 지배했습니다. 다음 백년에는 정보가 단순히 밀어내기 식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되지는 않을 겁니다. 정보는 수백만의 사람들로 이뤄진 연계고리를 타고 공유될 겁니다....신뢰할 만한 추천 시스템이야 말로 광고의 성배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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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골드만 삭스와 러시아의 투자회사 디지털 스카이 테크놀로지가 페이스북의 투자자가 됐다. 이들의 참여로 페이스북의 주식가치는 500억달러가 됐다.

이미 페이스북은 단순한 친구맺기 사이트나 광고를 만드는 공간을 넘어섰다. 미 최초의 흑인대통령 버락 오바마 탄생을 성공시킨 인터넷선거의 핵심이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11년 2월 이집트에서 페이스북은 30년간 독재통치하던 대통령을 몰아내는 사이버상의 민주혁명 본부가 됐다. 페이스북은 2011년 7월부터 페이스북크레딧결제를 시행하고 있다. 세컨드라이프라는 가상공간에서 실패했던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경제실험이 페이스북을 통해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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