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북 표준화, 보신주의와 불신이 장애물"

일반입력 :2011/07/22 10:14    수정: 2011/07/23 21:32

남혜현 기자

미국도 전자책 표준이 중구난방이에요. 똑같은 e펍(Pub) 형식 파일인데, 아마존에서 산 전자책을 소니 단말기에선 못 읽죠. 온라인 서점마다 서로 다른 단말기가 필요하다면 소비자들이 전자책을 망설임 없이 구매할 수 있을까요?

전자책 표준화가 왜 필요한지 듣기 위해 숙명여대 멀티미디어과학과 연구실에서 임순범 교수를 만났다. 그는 현재 한국전자출판물표준화포럼(ODPF)의 의장을 맡고 있다.

ODPF가 올해 내세운 목표는 'e펍 한글 부합화'와 '저작 가이드라인 제정'이다. 소비자들이 어떤 단말기든 상관없이 자신이 구매한 콘텐츠를 읽게 하자는 게 요지다. 온라인서점이나 출판사마다 서로 다른 전자책 포맷을 사용하는 것이 시장 활성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란 지적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없던 전혀 새로운 표준을 만들자는 것은 아니다. 세계 흐름에 발 맞춰 가되, 한글에 특화해야 할 부분을 보완하자는 것이다. e펍이 세계 표준으로 통용되지만, 그 세부내용이 애매모호해 업체마다 상이한 해석이 가능한 점도 국내 표준을 만들어야 할 이유로 꼽았다.

임순범 교수는 우리만의 독자적 새 표준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을 우리 실정에 맞게 잘 다듬자는 게 ODPF가 생겨난 이유라고 설명했다.

■전자책, 표준화가 넘어야 할 산

표준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임 교수 같은 것은 아니다. 온라인 서점 일부에선 표준화 동참을 꺼리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임 교수는 이같은 분위기가 전자책 진입장벽이 낮아져 시장점유율을 뺏길까 걱정하는 보신주의라 비판했다.

표준화가 없다면 전자책 시장도 병목현상이 발생할 겁니다. 일부 유력 유통업체에선 표준화를 반대하는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죠. 그래야 자기 시장 점유율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시장 전체가 커야지, 지금 당장 내가 이 시장을 쥐고 있으면 뭐합니까.

표준화를 요구하는 출판계도 행보는 소극적이다. 아픈 기억이 있어서다. 10년전 북토피아 사건이 아직도 전자책 표준화의 발목을 잡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당시 북토피아가 주도한 표준화는 제대로 활성화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출판 대금 마저 제대로 지불되지 않았다. 일부 출판사는 대금 미지불로 부도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전자책=불신'이란 공식이 생겨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생존' 때문에 출판사들이 표준화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동일 콘텐츠를 업체별로 따로 변환해야 하니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게 표준화의 첫째 이유요, 파일 변환을 유통사가 이끌어 가는 형국이 결국 출판사 존립 이유를 흔들 것이란 게 둘째 까닭이라는 것이다.

임 교수는 표준화가 개인이나 기업 일부의 이익을 위해서 실행되면 필패한다는 게 북토피아의 교훈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표준화는 개인의 실적 때문이 아니라 시장에서 다 같이 잘되자고 논의하는 것이라며 열 명 중 한 명은 손해를 볼 수도 있어도 90%가 이득을 보자고 하는 것이라 덧붙였다.

■전자책, 왜 표준화가 중요한가

물론 e펍을 바탕으로 국내 실정에 맞는 표준을 개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밥이 되 있는게 아니라 생쌀만 그득하더라는 게 임 교수의 이야기다.

처음엔 국제 표준인 e펍이 있으니, 이걸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쓰자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철저히 분석해 보니 고칠 필요가 있는게 아니라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아예 새로 만들어야 할 수준이더라고요.

임 교수는 e펍의 문제점을 모호한 규정이라 꼬집었다. 커다란 틀에서 몇가지 원칙만 제시할 뿐, 세부적인 내용을 언급하지 않아 똑같은 e펍 포맷이라도 업체마다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다.

e펍 표준에서 한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ODPF가 존재해야할 이유로 설명했다.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국내선 전자책 표준화에 대한 논의가 더디다. 때문에 e펍을 관장하는 국제기구 IDPF에서 한국 참여를 요구해도 단기간에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ODPF에선 e펍 표준을 기반으로, 한글에 맞는 표준 저작 가이드라인을 개발한다는 방침이다. e펍2.0 버전을 기반으로 한 작업이 이미 절반 가량 마무리 됐다. 인큐브테크, 한글과컴퓨터 등 국내 전자책 솔루션 업체가 다섯군데 이상 합류해 실무진이 연내 개발완료를 목표로 작업 중이다.

임 교수는 기술적인 표준화 추진 외에 활성화를 위한 주문도 내놨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혜자인 출판사들이 호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표준화 추진에는 교보문고나 인터파크가 아닌 자그마한 출판사들이 먼저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표준이 없으면 유통사들이 원하는대로 분위기가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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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화가 없이 지금처럼 유통사가 전자책 파일 변환까지 도맡다보면 종국엔 출판사 입지가 흔들리게 될 것이란 경고도 했다.

임 교수는 출판사에서 원고를 잘 다듬어서 표준화된 형식으로 개발사를 통해 전자책으로 변환하고, 이를 출판사가 다시 받아 유통사로 납품하는 시스템이 돼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