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선 알아주지 않았지만, 한때 한국 전자책 콘텐츠는 해외에서 '품질'로 유명했다. 먼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다. 3~4년 전만 해도 일본 등 해외 전자책 전시회에선 한국산 콘텐츠가 전체 부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해외 유명기업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잇달아 출시되면서 전자책 성공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런데 국내 콘텐츠 시장 상황은 달라졌다. 태블릿에서 볼만한 국산 인터랙션북은 손에 꼽힐만큼 그 수가 적다. 시장이 없을 땐 콘텐츠가 있더니, 시장이 열리니깐 콘텐츠가 사라진 역설적인 상황.
김상환 스포크시스템즈 대표는 그 이유를 각개약진하는 콘텐츠 업체와 앱 개발사들에서 찾는다. 일본이나 대만같은 나라에선 출판사, 솔루션, 디바이스 업체들이 합심해 새로운 콘텐츠 개발에 매진할 때 국내선 따로국밥마냥 혼자서 모든 걸 끌어 안고 갈 생각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독일에서 열린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한국이 부족한 게 뭔지 알았다며 비주얼로 선도적이던 한국업체들이 저마다 각자의 길을 가는동안 그들은 저만큼 발전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 대목에서 '협력'을 이야기한다. 제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고 해도 앱개발 전문가가 하드웨어에 최적화한 솔루션을 구축해주지 않는다면 인터랙션북의 장점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앱개발사로선 독자들이 원하는 콘텐츠 기획 부분이 취약하다.
시너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희같은 앱개발사은 콘텐츠를 잘 만들고 싶어도 몰라서 못해요. 대신 우리는 솔루션을 잘 하죠. 각자 잘 하는 영역을 가진 업체들이 협업해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생태계를 구축해야 길이 열리는 거죠. 스포크시스템즈가 하루가 멀다하고 출판사들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 여기에 있다.
■TV부터 시작…N스크린 공략 선언
김상환 대표를 최근 배화여대 창업보육원에 위치한 스포크시스템즈에서 만났다. 수줍은 듯 말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TV리모컨부터 잡는 모습에는 힘이 있다. 집안 소파도 아니고, 회사에서 리모컨을 이리저리 조작하는 모습은 생경한 풍경이지만 말이다.
스포크시스템즈는 사실 지난해 삼성전자가 개최한 스마트TV 애플리케이션 대회에서 '다국어 동화책' 앱으로 대상을 수상하며 더 많이 알려졌다. 전자책이라고 하면 보통 e리더 단말기나 태블릿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전자책, 특히 동화책은 TV로 봐야 제맛이라고 말한다.
막상 전자책 시장에 진출하고 보니 출판사들의 움직임이 늦고 수동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성공사례를 보여주지 않으면 투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고민을 하다보니 저희가 비주얼 표현에 강점이 있다는 것을 내세우기로 했죠. 움직이는 그림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스크린이 바로 TV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이 회사가 TV용 전자책만 개발한다는 것은 아니다. 핵심 전략은 바로 'N스크린'. 보고 싶은 콘텐츠를 스마트폰이나 PC, 태블릿, TV 등 디바이스 종류에 관계없이 아무 때나 볼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김 대표는 강조한다.
그가 N스크린을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김 대표는 진짜 콘텐츠 산업이 살려면 특정 디바이스에서만 종속되서는 안된다며 여러가지 스크린에서 모두 돌아가는 전자책이어야만 소비자들도 더 편하게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 덧붙였다.
글로벌 파트너도 김 대표가 강조하는 부분 중 하나다. 이 회사가 내놓은 다국어 동화 앱도 현재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한국어 등 4개국어를 지원한다. 앞으로는 포르투갈어도 추가할 예정이다.
김 대표는 글로벌 앱을 만든다고 세계적으로 다 팔린다는 실증은 아직까진 없다면서도 그렇지만 시장이 60~70배 정도 커지기 때문에 그만큼 기회도 많을 것이라고 본다고 설명한다.
앱 개발에 있어서도 국내 출판사와만 손잡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각 나라마다 잘 팔리는 전자책 앱을 만들기 위해선 지역화가 필수이기 때문. 예컨대 한국의 전래동화를 필리핀에서 판매하기 위해선, 이 나라 문화에 맞도록 번역하고 가치를 얹어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역에 최적화해 재가공된 콘텐츠를 스포크시스템즈 솔루션에 올려놓는 방식이 정착되면, 어떤 나라에서 만든 콘텐츠이던 간에 어느 시장에서나 판매가 가능하다고 김 대표는 설명했다.
■대안 유통시스템, 상반기내 출범할 것
스포크시스템즈의 실험이 성공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콘텐츠를 어떤 플랫폼에서 판매하느냐는 거다. 전자책이 1인 출판의 시대를 가져왔다고들 하지만, 아직까지 유통면에서는 기존 대형 업체들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현실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김 대표가 꺼내놓은 아이디어는 ASP(Application Server Provider) 모델이다. 그는 다국어 동화책을 기획과 제작, 유통까지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모델을 상반기내 출범시킬 것이라며 월정액제로 이런 솔루션을 1인 출판사에 대여해 주는 것이 ASP모델이라고 설명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 모델은 출판사 사이트에서 종이책이나 전자책을 판매할 수 있는 마켓을 임대해 주는 것이다. 업로드된 파일로 미리보기 서비스를 할 수 있으며 홈페이지내에 매대가 마련되는 형태로 출판사 고유의 인터넷 서점을 운영하게 한다는 이야기다.
소비자 입장에선 어떨까. 검색만 하면 다 찾아주는 대형 온라인 서점이 있는데 굳이 개별 출판사를 방문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할까?
그는 국내 대형 유통업체들이 베스트셀러 위주로 판매하는 것과 달리 소수지만 마니아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양서가 판매되는 조합이 만들어진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며 출판사가 자체 매대를 통해 책을 팔면서 그 이상의 가치를 제공하는 모델로 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종의 협동조합 모델이다. 상호 계약을 맺은 중소 출판사들이 상대방의 책을 자신의 홈페이지에서도 판매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1천명의 회원을 가진 10개 출판사가 합심하면 1만명도 모일 수 있다.
희망을 말하는 김 대표지만 우려는 있다. 생각보다 출판사들의 호응도가 낮기 때문이다. ASP모델과 관련해 기존에 전자책 관련 수업을 받았던 교육생 1천200여명에 이메일 설문지를 돌렸지만 응답이 온 곳은 30여군데 안팎이었다. 사람들이 관심은 있어도 확신은 없는, 그런 시장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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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김 대표의 올해 목표는 전자책 성공 레퍼런스를 만드는 것이 됐다. 지난해부터 분위기는 뜨고 있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 수익이 날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말들에 대해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농산물을 직거래 하는 것처럼 출판사들이 자기 제품을 직접 판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출판사 수익구조가 좋아질 겁니다. 그 데이터가 한 곳에 모여 연동이 될 수 있다면 다른 출판사들의 책도 팔 수 있겠지요. 그러면 기존보다 더 큰 내 책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어요? 진짜 책 시장을 살려내려면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진리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