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스마트폰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배경으로 디자인이나 하드웨어 스펙을 꼽는 이가 있다면 아마도 '세상 물정 잘 모른다'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애플 아이폰을 성공으로 이끈 일등 공신은 콘텐츠 업체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기존에 없는 새로운 생태계를 창조했다는 것이었다. 생태계를 통해 애플은 사용자들에게 그전에는 누릴 수 없었던 새로운 사용자 경험(UX)을 제공했다.
생태계에 포섭된 사용자들은 경쟁사에서 하드웨어 스펙이나 디자인이 괜찮은 제품을 내놨다고 해서 쉽게 부화뇌동(?)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로열티가 높은 우량 고객들이었다.
그러자 경쟁 업체들까지 애플이 짜놓은 프레임에 따라 움직이는 장면이 연출됐다. 구글, 노키아, 삼성전자, 리서치인모션(RIM), 이동통신 서비스 업체들까지 제품이나 서비스를 넘어 애플과 유사한 코드를 지닌 생태계를 전진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세계 스마트폰 시장은 생태계를 둘러싼 각축전 구도로 재편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콘텐츠 업체와 협력에 기반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못하는 플랫폼은 '필패'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구도다. 거대 플랫폼 업체들이 앞다퉈 콘텐츠를 외치는 이유다.
■콘텐츠 생태계 구축, 국경이 사라지고 있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펼치는 콘텐츠 생태계 대결에서 국경의 의미는 그리 크지 않다. 애플 앱스토어에는 이미 한국산 콘텐츠가 대거 올라와 있고, 다른 플랫폼들 또한 마찬가지다.
콘텐츠 생태계 전쟁은 큰 틀에서 보면 국경없는 경쟁 구도란 얘기다. 애플과 구글의 콘텐츠 확보 경쟁을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한국도 일찌감치 이들 플랫폼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섰다.
모바일 콘텐츠를 둘러싼 세계 시장 판세는 구글이 애플을 추격하는 구도다. 여기에 '소프트웨어(SW)제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마지막 한방으로 평가되는 윈도폰7 생태계가 다크호스로 등장했다. 나머지 대항마들도 있지만 존재감은 크지 않다. '듣보잡' 플랫폼들도 많다. MS외에 대항마로 거론되는 곳은 드물다.
모바일 시장은 이미 어설픈 접근 방식으로는 애플과 구글 '양강구도'를 좀처럼 깨기 힘든 상황이 됐다.
애플 앱스토어에 올라온 애플리케이션 수는 이미 30만개를 넘어섰다. 올해는 50만개를 돌파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안드로이드폰에서 쓸 수 있는 모바일앱을 사고파는 온라인 장터인 안드로이드마켓에 올라온 모바일앱수도 최근 20만개를 돌파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을 연지 얼마 안 되는 MS 윈도폰 마켓플레이스의 경우 등록된 앱 수가 최근 5천개를 넘었다.
MS의 경우 숫자에선 애플과 구글에 크게 밀리지만 최근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어 주목된다. 이들 외에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모바일 마켓 플레이스를 찾기는 쉽지 않다. 발표는 꽤 된것 같은데, 뒷얘기가 없는 무명 플랫폼들이 대부분이다.
수익성 측면에서 보면 모바일 콘텐츠 생태계 경쟁의 쏠림 현상은 더욱 심한 듯 하다. 약간 오버하면 애플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상황이다.
안드로드마켓의 경우 양적으론 팽창했지만 성공한 유료앱은 그리 많지 않다. 안드로이드 앱 전문가인 박성서 소셜앤모바일 대표는 여전히 안드로이드 유료 마켓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SNS 콘텐츠 경쟁도 선두권 업체가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양상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거침없는 질주가 압권이다.
페이스북은 지난 2007년부터 콘텐츠 생태계 전략을 본격화했다.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를 공개하고 외부 개발자들이 자유롭게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페이스북 API를 활용한 애플리케이션은 약60만개가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API 공개로 사용자들은 페이스북에서 뿐만 아니라 외부 사이트에서도 각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이를 기반으로 페이스북은 5억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린 초대형 네트워크로 급부상했다.
전세계적으로 트위터 API를 활용한 애플리케이션 및 서비스도 30만개에 달한다. 국내서도 트위터 응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부쩍 늘었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등은 모두 미국에 기반하고있지만 그 영향력은 세계 각국에 미친다. 트위터, 구글 지(G)메일, 아이폰, 페이스북 머릿글자를 따, 이른바 T.G.I.F로도 불리는 이들 4인방은 지난해부터 한국 콘텐츠 업체들을 상대로도 본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과 SNS 열풍을 등에 업고 검증된 글로벌 플랫폼의 한국 시장 공략이 본격화된 것이다. 국내 업체들로서는 안방 사수 전략 마련이 시급해졌다.
■한국형 플랫폼, 콘텐츠를 잡아라
TGIF의 공세를 막기위한 국내 대기업들의 행보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키워드는 역시 의미있는 콘텐츠 생태계 구축이다. 인터넷과 모바일 모두 플랫폼 기반 콘텐츠 생태계 구축 경쟁 구도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2천500만 회원을 확보한 싸이월드를 앞세워 네이트 앱스토어를 출범시킨 SK커뮤니케이션즈는 지난해말 누적 매출 27억원을 기록했다. 회시측에 따르면 네이트 앱스토어는 11월말 기준으로 5천여명의 개인 개발자와 60여개 개발사가 참여하고 있으며 125개의 소셜앱이 등록된 상태다.
플랫폼을 향한 SK컴즈의 행보에는 더욱 가속도가 붙은 모습. 개방의 폭이 깊어졌다. SK컴즈는 지난해말 미니홈피, 사진첩, 다이어리, 방명록, 네이트온, 커넥팅 등 핵심 응용 API를 외부 개발자들에게도 공개했다. SK컴즈는 그동안 네이트 앱스토어 참여 개발자들에게 API 공개해왔는데, 이번에는 전체 개발자 대상으로 확대하게 됐다.
이를 활용해 외부 개발 업체들은 미니홈피, 네이트온 기능을 조합한 서비스는 물론 국내외 사이트와 접목한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할 수 있다. SK컴즈는 싸이월드 일촌 및 C로그 API도 추가로 공개하기로 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무선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SDK)도 공개하기로 했다.
국내 최대 포털 네이버를 운영하는 NHN도 개방형 생태계 구축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NHN은 지난해 9월 소셜앱 활성화를 위해 네이버 소셜 앱스토어 '소셜앱스'를 오픈했다. 네이버 소셜앱이란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SNS인 블로그, 카페, 미투데이에 설치해 친구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웹 애플리케이션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애플리케이션을 한눈에 볼 수 있고, 평가 등을 남길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 페이지가 네이버 '소셜앱스'다.
'소셜앱스'는 오픈한지 한 달 여 만에 매출 1억원을 달성했다.
지난달 31일 기준 전체 앱을 통틀어 집계한 총 누적 설치 수는 90만에 달한다. 세부적으로는 마이시티(게임), 해피아이돌(게임), 마이팜(게임) 등이 각각 약 9만, 약 8만 5천, 약 7만 6천건 설치되며 상위를 차지했다.
모바일 콘텐츠 생태계의 경우 SK텔레콤과 KT간 양자대결 구도다.SKT가 운영하는 모바일 앱스토어인 'T스토어'는 최근 일 평균 다운로드가 100만건에 이르렀다. 누적 다운로드 수는 오픈 1년3개월 만에 1억건을 돌파했다. 등록된 콘텐츠 수도 7만6천여개로 매일 300여건씩 새로운 앱이 등록되고 있다.
SKT 관계자는 콘텐츠 수나 개발자 수 등 질적 양적 부분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다면서 등록 콘텐츠 수도 7만개를 넘어섰고 다운로드 건수도 1억건을 초과하는 등 자생력이 있는 마켓을 구성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KT는 '종합 콘텐츠 마켓'을 표방하며 맞불을 놨다. 지난해 10월 KT는 '쇼앱스토어'를 콘텐츠와 애플리케이션을 종합적으로 판매하는 통합 스토어인 '올레 마켓'으로 확대 개편했다. 올레마켓에서는 스마트폰 앱 뿐만 니라 최신음악, 영화, 이(e)북 등 32만 여개의 다양한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제공중이다.
스마트폰 중심으로 콘텐츠를 이용하던 것에서 나아가 N스크린 전략의 일환으로 구매한 콘텐츠를 스마트폰 뿐아니라 PC, 태블릿PC, 쿡TV 등 다양한 기기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한원식 KT 개인고객부문 무선데이터사업본부장은 올레마켓은 앱 뿐만 아니라 영상이나 음악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종합 콘텐츠 마켓을 추구하고 있다며 콘텐츠를 구입한 고객들이 여러 기기에서 편하고 자유롭게 콘텐츠를 사용할 수 있도록 N스크린 전략을 활성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행보도 주목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콘텐츠 전략을 양에서 품질 위주로 전환했다.
삼성전자의 권강현 전무는 스마트폰 사용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기위해 생활 밀착형 앱을 비롯한 게임, 전자책 등 다양한 카테고리를 제공하하고 제품 출시 시점에 소비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파트너사들과 협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속가능한 플랫폼으로 성장하려면
국내 대기업들은 개방형 콘텐츠 생태계 구축에서 해외 업체들에 비해 한발 늦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전략적 가치를 파악하고, 추격에 속도를 내고 있는 만큼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질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국형 콘텐츠 생태계의 지분이 커질 것이란 얘기다.
외부 시선도 대기업들이 '변하기는 변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갈길이 멀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큰틀에선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각론에선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선 콘텐츠를 확보하는 스타일이다. 대기업은 아직도 콘텐츠 업체와 직접 거래하는 것보다는 일명 마스터CP로 불리는 업체들을 통하는 일을 추진하는 경우가 있다. 나아지고는 있지만 개방의 깊이와 폭도 아직은 글로벌 플랫폼과 급이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모 업체 대표는 페이스북은 오픈API 이용해 콘텐츠 개발 업체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바닥부터 고려하는 편이지만 한국 업체들은 기존에 갖고 있던게 많다보니, 페이스북처럼 많은 것을 내어주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플랫폼을 지향한다면 개발사들이 원하는 것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대응 속도를 갖춰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콘텐츠 분야에서 상징성을 갖는 소리바다의 양정환 대표는 국내 콘텐츠 산업 발전을 위해 대기업들에게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그는 국내 기업들이 애플이나 구글을 못 따라가는 것은 후방을 지원하는 아군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면서 대기업들은 플랫폼을 이용해 작은 기업들이 플랫폼들과 융합할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들은 아군을 많이 확보하는 것보다는 가급적 많은 것을 직접함으로써 적을 만드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이런 방식은 20세기에는 통했을지 몰라도 협력이 경쟁력으로 부상한 지금에는 먹혀들기 힘들다는 것이다. 양정환 대표는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이용해먹는 도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면서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같은 관행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니편 내편 따지는 줄세우기 관행도 문제로 지적된다. 해외의 경우 애플 앱스토어에 등록했다고 안드로이드 마켓에서 퇴짜맞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한국은 아직도 '니편 내편마인드'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모 업체 관계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최근 제조업체들이 3D나 스마트 TV 만들면서 콘텐츠 업체와 제휴를 하는데 업체간 신경전이 심하다. 한 회사가 LG와 거래하는게 공론화 되면 삼성에선 연락을 하지 않거나 계열사 통해서 간접적으로 의사를 타진해 오는 식이다.
그의 말은 콘텐츠 업체가 어떤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를 제공하면 다른 업체 플랫폼에는 진입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방형 생태계의 시대, 심하게 폐쇄적인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콘텐츠도 외산에 득세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3D TV 시장이 대표적이다.
2013년까지 국내에서 3D 콘텐츠 제작 붐이 안 일어난다면, 사실상 힘들어 질 것이다. 콘텐츠 만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게 얘기한다. 시장이 개방되면서 대기업들이 3D 콘텐츠를 앞다퉈 들여오게 되면, 국내 콘텐츠가 설자리는 사실상 없어진다.
어느 콘텐츠 제작사 관계자의 이 말은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 중소 콘텐츠 업체의 위기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지난해를 기점으로 콘텐츠 업체들과의 소통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세미나도 열고, SNS를 통한 의견 수렴에도 적극적이다. 상하 논리로 나왔던 예전과 비교하면 긍정적인 신호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좀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이 많다. 건전한 콘텐츠 생태계 구축에 있어 대기업들의 역할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관련기사
- [CES2011]삼성 스마트TV, 빅5와 맞손…콘텐츠 고민 날렸다2011.01.10
- "콘텐츠 없는 스마트 혁명 종착역은 무덤속"2011.01.10
- 인터넷 사용자 65%, 유료 콘텐츠 돈 낼 의사 '있다2011.01.10
- 대교출판, 콘텐츠 생태계 구축 나선다2011.01.10
상생은 이제 거룩한 담론이 아닌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등장했다.
필립 코틀러 등 저명한 마케팅 전문가나 학자들이 21세기를 지배할 경영 코드로 협력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생태계가 판을 들었다놨다하는 지금의 상황도 이를 반영한다. 바야흐로 신뢰에 기반한 '협력의 시대'가 도래했다. 국내 대기업들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