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은 제품 제조기술은 뛰어나지만 고유 디자인을 드러낼 수 있는 브랜드만의 색깔은 없습니다. 브랜드 정체성을 드러낼 '언어'를 만들지 못한다면 소니처럼 기업 운명이 부침을 겪을 수도 있죠.
10일 서울 잠실 종합경기장에서 열린 '테크플러스 2010'에서 강연자로 나선 카림 라시드를 만났다. 그는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애플엔 있고 삼성에 없는 것을 '언어'라 표현했다. 예컨대 어떤 장소에 놓여 있더라도 소비자들은 애플의 제품을 알아챈다는 것이다. 그것이 소비자에게 전해지는 애플의 고유 언어다.
그런데 국내 기업들에서 만들어낸 제품은, 미안하지만 그가 보기엔 차별성이 없다. 적어도 디자인에선 말이다. 전자기기 상품점에 늘어선 저 다양한 TV와 냉장고들을, 상표를 떼놓고 본다면 어느 제조사에서 만든 건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카림 라시드는 지금까지 3천여 디자인을 발표하고 300여개의 상을 받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업 디자이너다. 현대카드, 삼성TV, LG하우시스, 순샘 버블 등 한국기업과도 협업을 자주해 국내서도 잘 알려졌다. 그는 한국 기업들의 혁신성을 높이 사면서도 한가지 안타까운 점으로 디자인에 대한 '철학의 부재'를 꼽았다.
■기술이 철학을 만나면 카림 라시드의 디자인이 된다
철학을 얘기하는 그의 눈빛은 제법 날카롭다. 그도 그럴것이 카림 라시드의 디자인이 각광 받는 것은 단지 작품들이 독특하다거나 아름다워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오히려 디자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고 편하게 다가서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더 나아가면 디자인 자체에서 존재 자체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다분히 철학적이다.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은 단지 '예술'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예술(democratic art)'입니다. 일부 사람들만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 아니라 일상적인 디자인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의 경지를 추구하는 거죠. 둘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카림 라시드는 이러한 민주적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게 다름 아닌 '기술'이라고 설명한다.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에는 부유층이나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일부 계층에서만 예술을 업으로 삼을 수 있었다면 지금세상에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음악을 만들고 디자인을 할 수 있습니다. 노트북에서도 음악을 만들 수 있죠. 누구에게나 일할 수 있는 도구와 시간이 주어지는 셈입니다. 엄청난 시대라고 볼 수 있죠. 또 만들어진 저작물을 블로그나 소셜네트워크 등을 통해 전세계에 알릴 수도 있어요. 킨들을 통해 책을 팔수도 있고요.
■대량 맞춤화 시대 온다
기술이 가져온 또 하나의 특별한 점으로 카림 라시드는 인간 경험의 극대화를 끌어온 것을 꼽았다. 상품 생산에 있어 기획, 디자인, 제조 심지어 유통까지도, 인간은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디지털 세상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 발전은 3D 세계를 가져왔습니다. 입체적인 디자인이 가능해졌죠. 이제는 4차원까지 생각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사물까지 다양한 기술로 디자인하며 이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낼 수도 있죠. 예컨대 딸기향이 나는 신발같은 것은, 다차원적인 생산 방식에서 나옵니다. 또한 중간 도매, 소매상이 없이 얼굴을 모르는 이에게 즉각적으로 창작물을 판매도 할 수도 있죠.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술 발전이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기를 거쳐왔다면 이제는 다품종 대량생산까지도 가능해졌다고 설명한다.
소프트웨어로 몸 치수를 잰 후 만들어진 가상의 몸으로 다양한 옷을 입어볼 수 있죠. 자신만을 위한 맞춤복이 탄생할 수 있는 겁니다. 옷뿐만이 아니라 샴푸 같은 일상용품도요. 다양한 생산기법으로 모든 걸 맞춤화 할 수 있는 대량 맞춤화(mass customize)가 가능해 진겁니다. 매우 흥미롭죠. 미래에는 진정한 디자이너들이 하는 일이 바뀔겁니다. 나에게 맞게 주변을 재구성하게 될 수 있죠. 자동차를 구입할 때 운전석을 내 몸에 맞게 인체공학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고, 외장을 160만 개 색상 중 하나를 골라 칠할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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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근 자신이 아는 모든 기술을 총 동원해 끊김없는(seamless)한 디자인 적용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런던의 호텔 객실을 디자인 하며 방 전체가 하나의 기계처럼 끊김없는 곡선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을 채택한 것처럼 말이다. 마치 꿈을 꾸고 있듯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 여기에 작은 쇼파 하나라도 사람들이 무언가,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는게 지금 그가 생각하는 디자인이다.
의자가 가상 세계와 경쟁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또 지금 이 작은 방을 전세계와 연결된 공간으로 승화시킬 수 없을지도 고민하고 있죠. 제가 10년 전에 '정보미학'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처럼 우리 주위를 둘러싼 엄청나게 다양한 언어와 표현들이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디자인과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기술과 디자인은, 그래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