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동지는 없다'는 말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비즈니스 세계를 상징하는 문구일지도 모르겠다. 어제의 동지가 하루아침에 적으로 돌변하는 배반의 게임이 속출하는 곳이 바로 비즈니스 세계다. 이익이 안되는 의리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일때가 많다.
'공동의 적' 마이크로소프트(MS)를 상대로 싸우면서 '동맹'으로 불리었던 애플과 구글 사이에도 배반의 게임이 펼쳐지는 장면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동맹'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개운치 않을 만큼, 두 업체간 경쟁의 폭이 깊어지는 것이다. '싸움'은 애플과 구글 관계를 규정하는 무시할 수 없는 코드가 됐다.
■구글폰과 아이폰의 대결 본격화
에릭 슈미트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일 애플 이사회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애플은 자신들의 주특기인 스마트폰 시장을 파고드는 구글의 CEO가 이사회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불편해 한 듯 하다.
스티브 잡스 애플 CEO는 "구글이 우리의 핵심 영역으로 들어옴에 따라 에릭 슈미트가 이사회 멤버로 있는데 따른 효과는 크게 위축될 것"이라며 슈미트와의 동거는 더 이상 힘든 상황임을 공식화했다. 약간 침소봉대하면 경쟁 업체 CEO가 이사회 자리에 앉아 내부 정보를 날로 먹는 상황은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잡스의 이같은 발언은 구글발 잠재적인 위협 때문은 아니다. 이미 벌어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구글은 현재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을 위협할 가장 큰 위협중 하나로 떠올라 있다.
구글은 2007년 자체 개발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중심으로 하드웨어 업체들과 연합군을 결성한 뒤 스마트폰 시장에 파상공세를 퍼붓고 있다. 공세수위는 점점 올라가는 모습. HTC에 이어 삼성전자, 모토로라, 델 등 내로라 하는 제조 업체들이 올해안에 안드로이드를 탑재한 스마트폰을 쏟아낼 예정이다. 이에 따라 '아이폰 신드롬'을 일으킨 애플과 신흥 강호 구글의 '스마트폰 대전'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는 양상이다.
스마트폰이 틈새 시장이라면 애플과 구글이 유지해온 동맹의 틀은 흔들릴 이유가 없다. 한두번의 싸움은 웃고넘어가도 되는 일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다. 스마트폰은 세계 IT시장 판세를 좌우할 전략적 요충지로 떠오른지 오래다. 애플 입장에선 아무리 '절친' 구글이라도 해도 나눠먹기에는 너무너무 아까운 곳이다. 에릭 슈미트 CEO가 애플 이사회 멤버로 남아있기가 어려워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구글은 최근 스마트폰을 넘어 노트북과 데스크톱PC를 겨냥한 크롬OS까지 개발중이라고 밝혔다. 이는 애플과 구글의 전선이 스마트폰을 넘어 PC까지 확대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크롬OS는 애플보다는 MS를 겨냥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크롬OS를 탑재한 노트북이 애플이 자랑하는 초슬림 노트북 맥북에어와 국지전을 벌이는 시나리오는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에릭 슈미트의 애플 이사회 사임은 구글과 애플을 더 이상 공인된 커플로 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냉기류는 그전부터 감지됐다. 안드로이드를 탑재한 스마트폰이 지난해 10월 판매되기 시작했을때부터 애플과 구글 사이에는 불편한 장면이 연출됐다. 작은 갈등들이 쌓이고 쌓여 이번에 슈미트의 사임으로 이어졌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다.
슈미트가 애플 이사회에서 물러나기 바로 며칠전에도 두 회사간 불편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이 터졌다.
구글이 애플 앱스토어에 올리려했던 애플리케이션 2개가 애플에 의해 거절당한 것. 하나는 사용자들이 서로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서비 구글 래티튜드고 다른 하나는 아이폰에서 구글보이스 인터넷 전화 서비스를 쓸 수 있도록 해주는 GV모바일이다.
이중 구글보이스가 아이폰에 입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애널리스트들은 미국내 아이폰 독점 공급 업체인
AT&T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구글보이스가 애플의 전략 파트너인 AT&T 매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의 반독점 조사로까지 이어졌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애플이 앱스토어에서 GV모바일을 거부한 것과 관련 반독점 조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열린 마당과 닫혀진 정원, 이념의 벽
애플과 구글의 경쟁을 단순한 싸움으로 보기는 어렵다. IT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만큼, 두 회사간 경쟁은 철학의 대결을 동반한다.
애플은 독자적인 기술을 기반으로 다소 폐쇄적인 생태계를 지향한다. 애플 앱스토어에 올라오는 애플리케이션은 애플 아이폰과 아이팟터치에서만 돌릴 수 있다. 애플 하드웨어만을 위한 세계, 이른바 월드가든(walled garden: 담장이 쳐진 정원) 방식이다.
반면 구글은 자사SW를 다양한 업체의 하드웨어에서 돌릴 수 있는 개방형 모델을 이끌고 있다. 또 사용자들이 저렴한 하드웨어를 갖고도 웹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클라우드 컴퓨팅을 지지한다. 아이폰과 맥킨토시 컴퓨터 등 주목할만한 하드웨어를 앞세워 고수익 전략을 추구하는 애플과는 차이가 있다.
통제와 개방으로 대비되는 애플과 구글의 방식은 PC시장에서 제대로 한판 붙었었던 적이 있다. 승리는 구글 방식에 돌아갔다. 80년대 독자적인 OS와 폐쇄적인 하드웨어 플랫폼으로 PC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애플은 MS와 IBM 호환PC 진영의 협공에 걸려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다.
일각에서 애플이 지금과 같은 폐쇄적인 모델을 고수하면 80년대의 아픔을 다시 겪을 것이란 지적이 나오는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애플은 지금까지는 '나홀로 모델'로 스마트폰과 모바일 기기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흔들리는 기미가 전혀 없다. 출시하는 제품마다 대박행진이다.
애플은 몇개월안에 아이폰이나 아이팟과는 따른 또 하나의 모바일 하드웨어도 선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 제품은 휴대용 TV나 이북 리더기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나아가 애플은 인터넷으로 아이튠스 서비스에 쉽게 접속할 수 있는 텔레비전까지 만들것이란 얘기도 있다.
이같은 상황은 애플 모델에 대한 회의론자들의 주장을 무색케 한다. 적어도 아직까지 애플의 방식은 모바일 시장에서 제대로 먹혀들고 있다. 하드웨어와 SW 그리고 서비스로 이어지는 삼각편대를 절묘하게 조직한 애플의 방식을 배우자는 얘기가 '숙적' MS에서도 흘러나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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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선 애플과 구글의 모델은 당분간은 동반 성장할 것이란 견해가 많다.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 잠재력이 큰 만큼, 애플과 구글이 나눠먹을 공간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과 함께 두 회사간 경쟁도 점점 가속화될 전망이다. 구글과 애플을 MS vs 구글, MS vs IBM급의 중량감있는 라이벌 관계로 규정하는 구경꾼들도 늘고 있다. 절친으로 통했던 애플과 구글의 사이가 점점더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