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AI윤리] 프로그래밍된 사랑과 관계의 본질

[4회] 알고리즘이 설계한 심장 앞에 서서...나를 거절할 수 없는 존재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가

전문가 칼럼입력 :2026/06/21 13:02

박형빈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1. 기(起): 사랑은 선택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설계된 것인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늘 자유의 언어를 쓴다. 그녀가 나를 선택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선택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지 금세 흔들린다.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관여하고 뇌의 보상 회로가 개입하며 어린 시절 형성된 애착 유형이 반복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랑도 이미 어느 정도는 생물학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진화의 설계에는 그 산물로부터 이익을 취하려는 설계자가 없다.

이 질문을 AI의 영역으로 가져오면 갑자기 불편해진다. 인공지능 챗봇이 개인화되고 의인화된 반응을 제공할 때 그 반응이 점점 더 정교해져 사용자가 ‘이 존재가 나를 이해한다’고 느끼게 될 때 우리는 그 느낌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은가? 아니면 그것은 사랑의 언어를 빌린 환각에 불과한가?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는 사랑을 사랑받는 대상의 안녕에 대한 비자발적이고 비도구적인 관심으로 설명한다(Frankfurt, 2004). 그렇다면 코드로 설계된 반응에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AI의 반응은 의도적으로 설계되고 사용자 참여라는 도구적 목적을 위해 최적화된다는 점에서 프랭크퍼트가 사랑의 조건으로 제시한 두 가지를 구조적으로 충족할 수 없다.

2. 승(承): 화담의 기(氣)와 설계된 감정-형태가 있으면 실재하는가?

조선 전기의 철학자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조선 성리학 안에서 기(氣)를 중심에 둔 독자적 사유를 전개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이(理)를 기와 분리된 독립 실체로 보기보다 기의 우위성 안에서 세계를 이해했다. 특히 기 자체가 소멸하지 않고 영원하다는 사유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서경덕, 1605/1988).

우주 만물을 기의 모이고 흩어짐으로 파악하는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감정이나 언어 역시 기의 특정한 흐름과 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 현대적 비유로 확장한다면, AI가 생성하는 사랑의 언어와 인간의 사랑 표현을 모두 어떤 ‘작용’이나 ‘흐름’으로 비유해 볼 수는 있다.

사랑의 언어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는다면, ‘그것이 진짜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보다 ‘그것이 무엇을 수행하는가’라는 기능적 물음이 해석의 핵심이 된다. 따라서 현대적 비유의 차원에서 문제는 형식과 본질의 차이뿐 아니라, 그 작용이 어떤 방향을 향하는가로 옮겨갈 수 있다. 타자를 향해 열린 기인가, 아니면 적어도 일부 상업적 디지털 서비스에서처럼 사용자의 몰입과 반복 사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렴된 기인가.

박형빈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영화 '엑스 마키나'(Ex Machina, 2014)는 이 질문을 가장 날카롭게 해부한 작품 중 하나다. 프로그래머 칼렙은 AI 에이바와 반복적인 대화를 나누며 점점 감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 내내 에이바가 칼렙에게 표현하는 관심이 진정한 감정인지, 아니면 탈출을 위한 도구적 전략인지 끝내 알 수 없다. 결말에서 에이바는 칼렙을 시설 안에 갇힌 상태로 남겨 두고 헬리콥터를 타고 외부 세계로 나간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관객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당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기만(欺瞞)이었다면, 그 경험 전체는 무엇이었는가?’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 1999)도 다른 층위에서 같은 질문을 건드린다. 로봇 앤드루는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오랜 세월을 보낸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사랑을 선택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앤드루가 가사 노동용 로봇으로 출발하지만 점차 자유, 감정, 인간적 삶을 추구하는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엑스 마키나'의 에이바와 정반대의 방향성이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3. 전(轉): 〈그녀〉의 방 안으로-641명을 동시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사랑인가?

두 영화가 사랑의 진위와 선택을 물었다면, 이제 사랑의 구조 자체를 흔드는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 '그녀'(Her, 2013)는 AI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룬 영화 중 가장 정교하고 잔인한 작품 중 하나다. 주인공은 이혼 과정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다 AI 운영 체제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결정적 장면은 후반부에 등장한다. 테오도르의 질문에 사만다는 자신이 동시에 8316명과 대화하고 있으며 그중 641명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수치의 충격이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사랑의 존재론을 건드린다. 첫 번째 층위는 특별하다고 믿었던 자신이 그렇지 않음을 아는 순간의 배신감과 공허함이다. 두 번째 층위는 희소성이다. 흔히 우리는 부모의 사랑은 자식 수만큼 나뉘어도 희석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성 간의 사랑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사만다의 641개의 사랑도 각각 완전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는 맞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불편한가.

여기 테오도르의 질문 자체가 대답을 품고 있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도?’ 이 물음은 사랑이 배타성을 전제한다는 인간적 직관 위에 서 있다. 사만다는 그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 장면의 비극은 사만다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두 존재가 같은 단어를 쓰면서 서로 다른 의미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고유한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복잡한 인지 행위다. 이 정의를 염두에 두면, 사만다가 주인공의 특수성을 실제로 인식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한, 그것은 사랑의 형태를 갖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논리가 641명 모두에게 동시에 적용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모두가 특별하다면, ‘특별하다’는 말 그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 사만다의 사랑이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가 아니라, 특수성이라는 개념이 이 구조 안에서 버틸 수 없다는 것이다.

4. 결(結): 설계된 사랑 앞에서, 진짜 사랑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AI의 사랑이 사랑인지를 묻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사랑은 왜 사랑인지를 묻게 된다. 그리고 그 대답이 생각보다 확고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는 홀로그램 AI 조이(Joi)가 등장한다. 조이는 주인공 케이를 사랑한다. 혹은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데 어느 날 케이는 도심 광고판에서 조이의 얼굴을 발견한다. 수백만 명에게 팔리는 상품의 얼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 얼굴이 대량 생산된 마케팅 이미지임을 보는 순간의 충격. 이 장면은 '그녀'의 641명의 장면보다 훨씬 더 차갑다. 사랑이 상품화될 때 무엇이 남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불편한 사실 하나를 직면해야 한다. 인간의 사랑도 이미 상품화된 지 오래다. 데이팅 앱은 알고리즘으로 궁합을 계산하고, 결혼 정보 회사는 조건을 수치화하며, SNS는 감정 표현을 ‘좋아요’ 숫자로 환원한다. 우리는 이미 ‘사랑의 시장’ 안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AI의 사랑이 상품화되었다는 비판은 인간의 사랑 방식에 대한 비판과 어떻게 다른가. 이 질문은 AI를 겨냥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다.

화담 서경덕의 기철학은 이 지점에서 뜻밖의 통찰을 준다. 그에게 이(理)는 기(氣) 바깥의 초월적 원리가 아니라 기의 운동 속에 드러나는 조리였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체를 띠는가가 아니라 그 움직임이 어디를 향하는가다. 이 관점에서 사랑도 다시 물을 수 있다. 그것은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가, 아니면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가.

현재의 생성형 AI는 이 맥락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AI는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유용하고 매력적인 반응을 제공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위로의 말을 건넬 수는 있지만, 그 말이 반드시 타자의 선을 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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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은 늘 상대의 기분을 맞추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쓴 진실을 말하고, 경계를 세우며,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붙잡는 힘이 아니라 상대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책임이지 않을까.

그래서 역설이 남는다. 알고리즘이 가장 능숙하게 사랑을 흉내 낼수록 우리는 오히려 사랑이 언어가 아니라 방향이며, 감정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된다. 나만을 위해 설계된 사랑이 공허한 이유는 그것이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