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간 큰 변화가 없던 반도체 분업 공식이 흔들리면서 디자인하우스(DSP) 생태계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
기존 디자인하우스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가 짜온 도면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정에 맞춰 최적화하는 단순 백엔드 가교 역할에 머물렀다. 그러나 최근 맞춤형 반도체(ASIC) 수요가 폭증하면서 경계가 허물어졌다. 국내외 주요 디자인하우스가 설계 극초기 단계인 프론트엔드 영역까지 빠르게 흡수하며, 칩 빌딩 전체를 일괄 수주하는 '턴키(일괄 수주) 플레이어'로 체질을 바꾸는 흐름도 나타난다.
"단순 가교 역할 끝났다"…설계 진출하는 DSP
1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브로드컴으로 대표되는 프론트엔드 설계 대행사와 백엔드 설계 대행사(디자인하우스) 간 교집합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과거 디자인하우스의 설계영역은 칩의 물리 배치와 공정 최적화에 집중된 백엔드 영역에 주로 머물러 있었다. '팹리스-디자인하우스-파운드리'로 이어지는 반도체 분업 공식 안에서, 디자인하우스는 파운드리 양산을 돕는 '가교' 역할에 그쳤다.
하지만 최근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디자인하우스들이 아키텍처 설계부터 핵심 회로 구현까지, 그간 팹리스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졌던 프론트엔드 설계까지 깊숙이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치솟는 ASIC 수요·비싼 브로드컴 단가가 만든 '전용 주방'
이러한 사업 모델 변화 배경에는 AI 반도체 시장의 폭발적 수요가 깔려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 같은 범용 AI 프로세서의 높은 가격과 수급난에 지친 기업들이 자체 서비스에 최적화가 가능한 ASIC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브로드컴 같은 시장 선도업체의 높은 가격은 디자인하우스들이 고객사의 ASIC 파트너로 진출하는 촉매제가 됐다. 디자인하우스들은 이제 팹리스들에 '칩을 찍어내는 환경'과 'IP(설계자산) 접근권'을 묶어 공급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과거의 팹리스는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만드는 '개인 요리사'였다. 지금은 다르다. 레시피만 건네면 디자인하우스가 식재료 조달부터 요리 환경까지 통째로 책임지는 '전용 주방(턴키 플랫폼)' 모델로 바뀌고 있다.
K-디자인하우스 체질 개선…프론트 설계 전문기업 등장
변화는 국내 디자인하우스 업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K-브로드컴'을 표방하는 세미파이브가 대표적이다. 세미파이브는 독자 시스템온칩(SoC) 설계 플랫폼을 구축하며 프론트엔드 역량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팹리스가 원하는 사양만 전달하면 아키텍처 기획부터 자체 IP(설계자산) 통합, 양산까지 일괄 제공한다.
가온칩스도 SoC 설계능력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회사는 지난 2020년부터 전담 팀을 구성해 프론트엔드 역량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설계 초기 단계인 레벨 제로 과제를 다수 진행하며 실질적인 설계역량을 내재화했다.
관련기사
- '구글 이탈' 맞선 역발상…브로드컴이 '종합 플랫폼' 택한 이유2026.06.09
- 韓 AI 반도체에 손 내민 브로드컴…퓨리오사AI와 계약2026.05.28
- 韓 디자인하우스, 2·4나노 선단공정 앞세워 해외 시장 확대 박차2025.09.16
- 韓 반도체 DSP, 중국 넘어 유럽·일본 신시장 개척2026.05.11
프론트엔드 설계만 전담하는 기업도 등장했다. 수퍼게이트는 칩의 초기 기획과 회로 설계 등 프론트엔드 영역 특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도화된 설계 인력이 부족한 국내 팹리스 및 스타트업 수요를 빠르게 흡수하며 생태계 다양성을 더하고 있다.
한 디자인하우스 관계자는 "디자인하우스가 단순히 파운드리 가교 역할만 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이제는 아키텍처 설계와 프론트엔드까지 포함한 진정한 턴키 플랫폼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완전히 탈바꿈해야 생존할 수 있는 단계"라고 진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