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엔진’은 우리 문화의 가치 재창출을 위해 칼럼니스트의 비평적 시각과 기자의 보도적 시각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시리즈입니다. 이 연재는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를 비롯한 현장 전문가와 지디넷코리아 기자가 함께 집필하며, 독자에게 문화정책·콘텐츠산업·예술현장에 대한 새 소식을 전하고 인사이트를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K-컬처가 미래산업의 엔진으로 재조명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천개우주 하늘이요 지개조축 땅생길제 국태민안
신년 새해 맞이하여 건구 건명 여러분들
만사가 대길하고 백사가 여일하고
마음과 뜻과 잡순 대로 소원 성취 발원이라.
- 비나리 中 -
연말연시(年末年始).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고유의 소리로 복을 빌고 액을 막았다. 마을의 안녕과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며, 소리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매개가 되었다.
2025년 을사년의 마지막, 푸른 뱀이 동면을 준비하는 이때. 과거의 소리에서 미래의 답을 찾아본다.
600년 도읍 서울은 진산인 북한산을 시작으로 북쪽에 백악산, 남쪽에 목멱산 좌청룡 낙산과 우청룡 인왕산으로 내(內)닫음하는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이렇듯 명산이 많은 우리나라 산세를 흥미롭게 담아낸 소리가 있는데, 바로 판소리 춘향가 중 ‘산세타령’이다.
판소리는 창자가 고수의 북 장단과 추임새에 맞추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고, ‘발림’을 곁들여 풀어내는 1인 음악극이다.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짧게는 3시간에서 길게는 8시간에 걸친 완창(完唱)은 기네스북에도 기록된 바 있다.
숏폼(short-form)의 시대다. 오늘은 대목 하나를 짚어 함축적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판소리 춘향가 中 산세타령
[아니리]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사람도 산세 따라 나는 법이다. 내가 이를 터이니 들어보아라.
[자진모리]
산세(山勢)를 이를게 네 들어라, 산세를 이를게 네 들어.
경상도 산세는 산이 웅장허기로 사람이 나면은 정직허고,
전라도 산세는 산이 촉(矗) 사람이 나면 재주 있고,
충청도 산세는 산이 순순(順順) 사람이 나면 인정 있고,
경기도를 올라 한양 터 보면 경운동 높고, 백운산 떴다.
삼각산 세 가지 북주가 되고, 삼각산이 떨어져 인왕산이 주산이요,
종남산(終南山. 남산)이 안산(案山)인디,
동작이 수구(水口)를 막기로, 사람이 나면 선할 디 선하고,
악하기로 들면 별악지상(別惡之象)이라.
양반 근본을 니 들어라.
부원군 대감이 자기 외삼촌이요 이조판서가 동성 조부님이요
시직(時直) 남원 부사가 당신 어르신이라
네가 만일 아니 가고보면 내일 아침 조사(朝仕) 끝에 너희 노모를 잡어다
책방 단장(短墻) 아래 난장형벌에 주릿대 방맹이 굵은 뼈 부러지고
잔뼈 으스러져 얼게미 채궁이 진가리 새듯, 아주 살살 샐 것이니
갈테면은 가고 말테면 마라 떨떨거리고 나는 간다
화창한 봄날, 남원 광한루에 나온 이도령은 그네 타는 춘향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산란한 마음에 방자에게 속히 춘향을 데려오라 분부하고 방자는 총총 건너가 이를 전한다. 그러나 도도한 춘향이 쉽게 따라갈 리 만무하니 조급해진 방자는 팔도의 산세와 풍수를 이르며 따라갈 것을 종용한다.
이 대목은 극 중 명품 조연에 해당하는 방자의 소리로, 초반부 눈대목으로 꼽힌다. ‘인걸은 지령’. 좋은 땅에 훌륭한 인물이 난다는 복선적 ‘아니리’로 대목이 시작된다.
시작된 소리는 자진모리 장단에 매우 박진감 있게 흘러간다. 자진모리는 주로 방대한 사설을 촘촘히 엮거나 재치와 해학의 긴장감을 조성할 때 사용되는데, 중모리, 진양조와 같은 여유 있는 흐름과 대비된다. 여기서 장단(長短)이란 서양음악의 박자와 비교되는 개념으로 4/4, 6/8 같은 수학적 의미를 넘어 잦게, 빠르게 몰아간다는 직관적 악상(樂想)을 내포한다.
아니리와 소리의 요소가 갖춰졌으니, 이제 본 사설을 살펴보자.
‘산세타령’의 관전 포인트는 바로 방자표 풍수(風水)이다. 춘향을 겁주기 위해 지역의 산세를 설명하며 이를 인물됨으로 비유하는데, 경상도는 그 산세가 웅장하여 사람이 태어나면 매우 정직하고 전라도는 산이 뾰족하니 재주 있는 사람이 많으며 충청도는 산이 온순함에 사람이 나면 인정이 넘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경기도에 올라 바라본 한양은 어떠한가?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가 높이 솟아 그 줄기가 주산으로 이어지니 앞 남산까지 기세가 등등하고 동작이 수구를 막아 명당을 이루니 그야말로 선악이 공존하는 지세. 이에 사람이 나면 선할 때 선하나 악하기로 들면 끝을 알 수 없는 별악지상의 땅이라.
경상·전라·충청을 향한 칭찬 일색의 흐름 속에서, 서울의 산세는 유독 급발진한다. 이어지는 장황한 이도령 집안 내력은, 따라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종용(慫慂)의 정점을 이룬다.
또한 방자는 왜 이도령의 고향도 아닌 서울을 종용의 장치로 사용하였을까?
춘향전 속 이도령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다. 그는 임진왜란 중 경상도 봉화에서 태어나, 남원 부사를 지낸 부친과 함께 남원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후 급제해 암행어사가 된 그는, 유년기의 경상도, 소년기의 전라도, 입신한 청년기의 한양을 오가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몸으로 통과했다.
역사의 산증인으로 혼란의 시기를 지낸 방자의 사설을 따라 서울을 다시 바라보니,
남산 아래 인왕산 줄기가 마치 용의 형상한 진짜 별악지상의 땅이 보였다. 바로 용산(龍山).
용산은 이도령이 태어난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의 병참기지로, 생을 마감할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군 지휘소로, 그리고 강점기 조건총독부와 일본군의 본진이 자리한 치열한 곳이다. 동시에 장원급제한 이도령이 춘향을 보러 내려간 길목이기도 하며, 흥보가 속 제비가 박씨를 물고 지나간 반가운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방자는 종용을 말미암아 시류를 담은 풍수로 해학을 전한 것 아닐까.
이처럼 우리 소리에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사유와 유희가 담겨 있다. 판소리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유물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관통하는 문화의 엔진이다. 새해, 그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자. 별악지상이 아닌 선한 서울이 다시 태어날 것이다.
2026 병오년 붉은 말의 해, 산세타령의 자진모리 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글 = 최한이 국악 보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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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한이: 전통과 현대를 노래하는 국악 보컬리스트다. 초등학생 시절 판소리에 재능을 보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에 발탁됐고, 국립국악중·고를 거쳐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2012년 창작국악 신진 등용문인 「21c 한국음악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켜켜이 쌓인 전통의 숨결을 바탕으로, 크로스오버와 월드뮤직, 방송과 무대를 넘나들며 판소리의 동시대성과 문화적 확장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MBN <조선판스타>, tvN <국악스캔들 꾼>, KBS <조선미인별전> 등에 출연했으며, 2025년 12월부터 지디넷코리아 [문화엔진] 시리즈 필진으로 합류해 판소리와 창작국악, 한류를 음악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한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