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누군들 하고픈 걸 하고 살겠어

기자수첩입력 :2025/05/20 16:04    수정: 2025/05/20 16:04

전날 오후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되자 모두 그쳤지만, 길은 젖어 있었다. 이어폰을 꺼내 스마트폰과 연결하고는 잠시 고민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의 장난인지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백발이 성성한 생전 사카모토 류이치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재생되었다.

음악은 곧 귀를 통해 가슴으로 전해졌다. 파란 불이 깜박이던 건널목을 내달려 후덥지근한 버스에 올라타 자켓을 벗을 때까지 내 눈에는 주책맞게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1987)의 주제곡인 ‘The Last Emperor’는 작고한 사카모토 류이치가 젊은 시절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그는 그해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상을 받으며 앞으로 하고싶은 음악을 원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안도했다는 후일담도.

마지막 황제는 서양악기로 만들어낸 동양의 선율이란 사실이 이상한 감동을 주었다. 서양 관객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에 오케스트라로 동양의 감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고 그것을 유연하게 구현해 낸 결과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Bust of Elie Lotar, 알베르토 자코메티. 루이지애나 현대 미술관. (사진=김양균 기자)

버스가 마포대교에 이르렀을 때 버스 뒷자리에서 지나온 세월을 떠올렸다. 혼란스럽고 불안했던 이십대의 마지막 날. 찬바람이 들이치던 싸구려 숙소에서 서른을 맞았다. 고열에 들뜨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엇을 해보겠다는 열망. 그에 이르는 길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청춘을 바쳐 찾아 헤매었다.

서른.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그러다 마흔이 되었다. 이번에는 더 빨리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다시 지나 마흔 중반이 되었고, 나는 아침마다 바삐 운동을 하거나 건강기능식품을 챙겨 먹으며 혈당이나 혈압 수치를 따지는 아저씨가 되어 뒤뚱거리며 출근을 하고는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무엇도 찾지 못했다. 때로 근접한 적도 있었지만 본질에 닿지는 못했다. 고민이 현실에 부딪쳐 그날은 무뎌졌어도, 이따금 마음을 헤집어 놓고는 했다. 나 같은 풋내기는 평생을 하기 싫은 일만 하다 끝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여기기 시작(혹은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생존만을 위해 휩쓸려 살고 있으므로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혐오와 포기에 젖기도 했다. 이를 잊기 위한 작은 성취와 행복을 맛보며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능숙하게 하기 싫은 일들을 해내곤 했다. 마치 그것을 정말로 원한다는 듯이.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도 잊어버리면서.

이날 아침 느낀 이상한 감동은 본질을 망각하려는 몸과 망각을 거부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후자가 반 발짝 앞서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어쩌면 백발이 성성해질 무렵이라면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닿지 못해도 괜찮다.

‘엿같은’ 현실을 마냥 참고 버티면 좋은 날이 온다는 헛소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하고픈 일을 원 없이 하며 살아갈 자유를 얻지 못하는 나와 당신 같은 보통의 사람들은 매일 타인으로부터 요구받고 강제당하며 산다.

그러니 우린 우리를 지켜야 한다. 일상의 파도에 묻히더라도 휩쓸려 떠밀려 사라지지 않으려면 본질을 인지해야 한다. 이어 반발씩, 한발씩 나아갈 때 수십 년이 지나 이러한 변주가 우리 삶의 궤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설사 찾으려는 것에 닿지 않더라도, 아무런 노력의 보상조차 없더라도. 그때라면 질문의 답에 근접할 수 있으리라 희망해본다.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