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무해력’이라는 말이 화두다. 정의는 이렇다. 무해하기 때문에 가지는 힘. 작금의 우리 시대상과도 맞물리는 듯하다. 이 워딩은 매년 다음 해의 대한민국 소비트렌드를 전망하는 서울대 김난도 교수 연구팀이 지난해 9월 출간한 도서 ‘트렌드 코리아 2025’에 제시한 개념이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한편으론 작고 귀엽고 순수한 것들이 사랑받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해롭지 않고, 그래서 자극이나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며, 굳이 반대하거나 비판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방이 나를 공격해 오는 것만 같은 험한 세상, 작고 귀엽고 연약한 존재는 그 자체로 힘을 갖는다” 김난도 교수팀은 이것이 ‘무해력(Embracing Harmlessness)’이라고 설명했다. 대내외적으로 긴장하며 살아가야 할 일들이 많은 환경 탓에, 무해한 것을 소비하며 안온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무해력에 빠져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공동체가 그만큼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경기가 좋지 않다. 고물가·고금리로 소비가 위축되면서 내수부진이 이어지는 데다 자영업자들의 상황이 특히나 좋지 않다. 어쩌면 일시적인 경기 침체의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저성장이 굳어지면서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낙관조차 쉽지 않다.

무해력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지 귀엽거나 예뻐서가 아니라, 정치 불안과 경제 불황,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날로 심해지는 정치·사회적 갈등, 코로나 분노에 지친 청년들이 자신을 ‘긁힌 세대’라고 부르며 자조하는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러한 암울함의 반작용으로 귀엽고 순수하고 단순한, 해가 없는 대상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무해력은 이제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한 줌의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생존의 비결이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반려견, 반려묘가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지는 점도 여기에서 연유할 것이다.
마침, 필자가 사는 성남에 무해력을 예술작품으로 느낄 수 있는 전시회가 지난 25일 열렸다. 성남 지역의 미술지형을 한눈에 조망하는 주제기획전 2025 성남의 얼굴전 ‘무해한 이야기’다. 전시 오프닝에서 주최한 신상진 성남시장과 윤정국 성남문화재단 대표이사가 작가들을 격려했다. 미술계에서는 정용석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사장, 이기영 월간미술 대표와 성남 미술인들이 참석해 개막을 축하했다.
전시는 예술이 주는 공감과 성찰, 사유의 긍정적 에너지에 주목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가치 있는 관계와 소통을 가능케 하는 ‘예술적 무해력’을 화두로 했다. 성남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7명의 컨템포러리 작가가 참여해 각기 다른 매체와 형식의 예술적 언어를 담은 회화·도자·설치 등 총 90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성남큐브미술관 2층 기획전시실 중앙에는 옛 정원 양식과 놀이를 통해 인류가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을 탐구한 홍자영 작가의 ‘Table After the Goddess's Passing’(2023~2025)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작가는 자연의 지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원리를 읽어내는 풍수지리의 관점에서 전시장의 분위기에 따라 작품이 드러나는 방식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김한나 작가는 캔버스의 덩어리 면을 통해 변화하는 감정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형상화한 신작 ‘Eternal Blooming’(2025) 연작을, 박성수 작가는 종이에 점토를 얇게 바르는 반복행위와 가마에 굽는 과정을 통해 불완전한 결과물의 예술적 변형과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도자 연작을 선보인다.
또 3차원의 조각 작품이 평면에 닿았을 때의 공간을 2차원의 목탄 드로잉으로 재구성해 새로운 공간 감각을 제시하는 김민혜 작가의 신작 ‘Z-Colony’(2025). 하나의 화면 위에 각기 다른 속성을 가진 면과 획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교차와 충돌을 통해 심리적 깊이와 몰입을 구현한 최지원 작가의 신작 ‘Becoming air’(2025)가 발표됐다. 이 밖에도 배윤환 작가는 사회적 이슈와 개인적 경험을 풍자와 해학을 담아 동화적 화풍으로 풀어냈으며, 베리킴 작가는 일상 속 사물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즐거운 위로와 자아의 행복을 전하는 작품을 전시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최지원 작가는 현직 신기술융합콘텐츠 아트디렉터이자 디지털실감영상 미디어아티스트다. 본인의 주전공인 회화와 드로잉을 ‘무해한 이야기’ 展을 통해 되살렸다. 최 작가는 “신작의 제목 Air는 보편적이면서 필연적인 가치를 비유한 표현이다. 테스트 용지에 펜촉을 테스트해 보는 행동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했다”며 “불완전하면서도 얽매이지 않는 호흡을 작업에 담고자 했다. 감상자가 화면 위의 획에 담긴 시간성, 사용된 색감의 심리적 질감에 주목해 각자의 대기감을 투영해 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작품 의도를 전했다.
전시를 기획한 백혜원 성남큐브미술관 큐레이터는 “전시 주제 ‘무해한 이야기’는 작가들이 표현하는 각자의 시각언어가 관람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무해한 방식으로 전달된다는 의미에서 출발했다”며 “여기서 ‘무해(無害)’란 단순히 해를 끼치지 않는 소극적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촉진하면서도 상처를 유발하지 않는 예술의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어 “예술은 그 자체로 사람의 감각과 사고를 자극하며, 때로는 도전적 메시지를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반드시 파괴적이거나 급진적일 필요는 없다. 개인의 내밀한 서사와 감각의 경험, 혹은 사회적 이야기를 담아내되, 그것이 관람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소통과 공감의 기회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작가들의 방식에 주목하고자 했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2006년 첫 전시를 시작으로 올해 16회를 맞이한 ‘성남의 얼굴전’은 지역문화예술 저변 확대와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성남에 연고가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을 중심으로 입체적 연출로 구성한 점이 돋보인다. 인구 91만 도시 성남의 유일한 공립미술관 성남큐브미술관은 아티스트의 예술이 어떻게 사회와 소통할 수 있을지, 또 개인의 이야기가 어떻게 공감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실험하고 있다. 성남문화재단 전시기획부의 존재 이유다. 다행히 지난 2일 새 기관장에 신문사 문화전문기자 출신이자 균형감 있는 예술경영인으로 평가받는 윤정국 박사가 미술관, 성남아트센터를 포함한 성남문화재단을 이끌게 돼 성남 문화예술 중흥의 미래가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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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단지 카타르시스적 감동을 주는 것을 넘어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지고 그 존재 자체로 마음을 보듬는 위로의 선물이다. 이번 전시는 예술작품이 주는 무해한 매력을 깊이 느끼는 것은 물론 사람을 향한 공감의 매개로 예술융성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7월 6일까지 열리는 전시회에서 시민-예술가-기획자(행정가) 모두, 관계 속에서 무해한 역할을 우직하게 수행하는 하나의 실천적 모색이 되기를 바란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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