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죽고 싶은 사람 지금 한두 명이 아니에요."
일명 '배터리 아저씨'라고 불리는 박순혁 작가 등 유명인을 사칭한 사기범에게 속아 노후자금이나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투자금 전액을 잃은 투자자들이 경찰에 줄고소를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피해자 대다수는 고령층인 데다가, 빚내서 거액을 투자한 경우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피해구제는커녕 사기범을 추적하는 것조차 난항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SNS의 발달할수록 '사칭 사기'의 수법은 지능적으로 진화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처벌 강도를 높이는 등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한편, 금융에 취약한 고령층을 위해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일 경찰 등에 따르면 대구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박 작가 등 유명인 사칭에 속아 거액의 투자금을 잃은 류모씨 등 투자자 30여명이 성명불상의 피고소인을 상대로 하는 집단 고소 사건을 수사 중이다.
피해자모임에 피해를 호소한 인원은 고소에 참여한 인원을 비롯해 130여명이다. 이들의 피해액은 100억원이 넘는다. 집단 고소 이후 추가 피해자들은 서울 송파경찰서 등 각 지역별로 개별적으로 고소를 진행하고 있다.
피해자모임 운영자 50대 류모씨는 "6월 기준 피해액은 70억 정도였는데 10월에 취합해보니 100억원을 돌파했다"며 "피해자모임을 모르거나 개인적으로 고소하시는 분들을 합하면 500억원 정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박순혁입니다"…'금융 전문가' 사칭해 거액 편취
피해자들에 따르면 주범은 주로 투자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진 '금융 전문가'를 사칭했다. 증권시장 안팎에서 일명 '배터리 아저씨'로 불리는 박 작가뿐만 아니라 베스트셀러 작가 김미경 MKYU 대표, 존리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염승환 이베스트투자증권 이사가 주로 사칭의 대상이 됐다.
범행은 인스타그램이나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대화나 광고를 통해 투자자들을 모집한 뒤 텔레그램과 같은 해외에 서버를 둔 메신저로 유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주범은 정보제공 및 교육을 통해 투자자들의 신뢰를 쌓은 뒤 특정 종목에 투자하라는 방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피해자들은 주범이 저명인사라고 확정적으로 말해서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8800만원을 잃고 지난 10월 고소를 진행한 50대 김모씨는 "본인이 박순혁 작가라고 했다"며 "배터리, 2차 전지 관련 종목도 추천해주고 향후 트렌드 강의나 교육도 많이 해줬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까지 투자했다. 피해자 대다수는 중년·고령층으로, 평생을 알뜰살뜰 모은 노후자금을 투자하거나 가족에게서 빌려 투자했다. 심지어 빚투(빚내서 투자)·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 등 가능한 대출을 모두 끌어모아 투자한 경우도 있었다.
70대 A씨는 "박 작가(사칭)를 믿고 6000만원을 투자했는데 팔고 살고 할 것도 없이 순식간에 떨어졌다"며 "전화도 안 받고 단톡방을 폭파(폐쇄)시켜버렸다"고 했다. 이어 "연금 타는 걸로 그 많은 집 대출 이자도 갚고 자녀 의료보험도 지급해주고 있는데 막막하다"며 "경기도 어렵고 물가도 비싼데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순진한 사람들의 등꼴을 빼먹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류씨는 "1억을 대출받아 투자했기 때문에 원금에 이자까지 갚으려면 투잡, 쓰리잡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피해자 분들 중에서는 '죽고싶다'고 말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이 있다"고 말했다.
전 재산을 잃었지만 주변에 호소도 못한다는 것이 피해자들의 설명이다. 최근 피해사실은 인지하고 6억원을 잃은 60대 A씨는 "평생을 알뜰살뜰 살고 과유불급이긴 하지만 노년에 여유를 누리고 싶어서 투자했다"며 "자녀들에게 말하긴 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울먹였다.
피해자는 자책하고 수사도 험로…대안은
SNS 등 사이버 범죄 자체가 차명, 가명 등으로 이뤄져 범인을 특정하기 어려운 만큼 수사도 쉽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특히 텔레그램은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어 기본적으로 IP 추적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범인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으면 피해구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금융소비자연대회의 소속 박현근 변호사는 "범인들은 주로 대포폰, 대포계좌를 사용하고 서버는 해외에 있다보니까 해외 수사기관과 공조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피해자도 불특정 다수인 데다가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어서 일선 경찰서, 지방경찰청 단위에서 수사하기에는 인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찰청 차원에서 기획해 수사하지 않으면 범인을 잡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SNS의 발달로 사칭 사기가 늘어나고 수법도 교묘해지는 만큼 사칭 사기 범죄의 처벌수위를 높이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사이버 수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갈수록 사이버 범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과거의 오프라인 전통적인 범죄 중심의 수사체계에서 벗어나 조직과 기능을 재정비하는 등 경찰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며 "인력 수급도 잘 안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하루빨리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경찰로 흡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금융에 취약한 고령층의 경우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나온다.
국회도서관이 발간한 '고령자 금융 피해 방지 관련 미국·영국·일본 입법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고령자안전법을 제정해 65세 이상 고령자의 금융 사기 피해가 의심될 때는 금융기관이 본인 동의 없이 금융당국에 보고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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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고령자가 고액 출금할 경우 경찰에 통보하게 하고, ATM 인출 한도액을 줄이는 등 사기 방지 대책을 시행 중이다.
제공=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