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스페인)=박수형 기자> 넷플릭스가 망 이용대가 법안 논의에 맞불을 놨다. 유럽연합이 기가비트 커넥티비티 액트 법안을 꺼내자 관련 논의가 진행되는 MWC23에 신임 CEO가 다급하게 나선 것이다.
유럽연합의 망 이용대가 법안 제정 추진이 MWC 개막 직전에 이뤄지고 대용량의 트래픽 유발하면서 네트워크 추가 투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받는 구글, 넷플릭스, 메타 가운데 넷플릭스가 전장터에 오른 점이 이목을 끈다.
그렉 피터스 넷플릭스 신임 CEO는 28일(현지시간) MWC 기조연설에 참여해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ISP)들이 엔터테인먼트 기업에 세금을 부과해 네트워크 인프라를 위한 보조금을 마련하자는 방안을 제안했다”며 “이는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네트워크 투자에 대한 분담이 불공정하다는 유럽연합의 의견에 신임 CEO가 직접 반박에 나선 것이다.
넷플릭스의 설립자인 리드 헤이스팅스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지난달 말 신임 CEO에 올라선 인물이다. 앞서 헤이스팅스는 지난 2020년 그렉 피터스를 최고운영책임자(COO)로 발탁했다.
그렉 피터스 CEO의 MWC 기조연설 참여를 두고 GSMA는 이를 개막 이틀 전에서야 발표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티에리 브르통 역내시장 담당 집행위원이 공정한 망 이용대가 법안 논의를 위해 MWC 첫 기조연설 세션에 연사로 이름을 올린 다음 날에 이뤄진 일이다.
브르통 위원과 피터스 CEO의 MWC 참여는 이미 훨씬 이전에 조율됐지만, 망 이용대가 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깜짝 발표 형태로 이뤄진 것은 GSMA의 정무적인 판단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GSMA는 MWC를 주최하는 세계 각국의 통신사업자 연합 단체다.
넷플릭스 “통신사가 콘텐츠 제작비용 보태라”
피터스 CEO는 “ISP는 비용 지출 변화 없이 증가하고 있는 사용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왔다”며 “규제기관 역시 인프라 비용은 트래픽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증가하는 트래픽 소비는 효율성으로 상돼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상 궤변에 가깝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는 인터넷 데이터 트래픽의 급증을 불러왔다. 데이터 트래픽이 늘어나면 네트워크 투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유동인구가 늘어나면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해야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즉, 넷플릭스는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 2차선의 도로만 둬도 차가 밀리지 않는다는 논리로 반대 의견을 꺼낸 것이다.
실제 MWC가 열린 유럽지역에서 넷플릭스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유럽연합의 협조 요청에 따라 데이터 트래픽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팬데믹 초기에 거리두기 문화 확산으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면 OTT 이용량 증가에 따른 네트워크 트래픽 유지가 어렵다는 유럽연합의 우려에, 넷플릭스는 네트워크 부담을 줄이기 위해 트래픽을 줄일 수 있도록 스트리밍 콘텐츠의 데이터 전송 압축률을 개선하겠다고 화답했다.
아울러 트래픽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진보된 기술을 적용했다는 발표를 통해 이를 마케팅으로 활용키도 했다.
피터스 CEO는 또 망 이용대가 법안이 시행되면 ‘오징어게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의 국내서 제작된 인기 넷플릭스 콘텐츠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한국발 인기 콘텐츠를 사례로 든 점은 망 이용대가를 두고 SK브로드밴드와 법적 분쟁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SK브로드밴드는 넷플릭스의 데이터 트래픽을 처리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 홍콩 사이의 별도의 해저 케이블 전용망을 구축했지만, 넷플릭스는 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법무법인 김앤장을 내세워 소송에 나섰다. 이 소송의 결과는 넷플릭스 측의 완패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네트워크 투자의 공정한 분담 논의에 대해 콘텐츠 투자 분담이란 반박 논리도 눈길을 끈다.
피터스 CEO는 “넷플릭스가 통신 사업자에게 콘텐츠 제작 비용을 같이 부담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모든 디지털 서비스의 근간인 네트워크 인프라에 대한 투자와 넷플릭스와 같은 특정 회사의 매출을 올리기 위한 장사 품목에 대한 투자를 동일시한 주장이다.
네트워크 투자 분담이 싸우기만 할 일인가
피터스 CEO가 과격한 발언만 늘어놓은 것과 달리 넷플릭스는 EU의 망 이용대가 법안에 회사의 불리한 입장을 줄이기 위한 조율 논의를 동시에 이어가고 있다.
이날 피터스 CEO가 참여한 MWC 기조연설 세션은 컨퍼런스 현장에서 공개된 자리고, 인터넷 생중계도 이뤄졌다. MWC에 참여하지 않고 한국에서도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는 무대였다.
반면 같은 날 MWC 현장 취재진에도 비공개로 이뤄진 장관급 프로그램에 넷플릭스의 정책로비 담당 최고 임원인 딘 가필드 부사장은 ISP와 콘텐츠 사업자는 상호이익 관계며 파트너십을 통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가필드 부사장이 참여한 정책논의는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참여하려 했으나 MWC 개막 직전에 관절염을 이유로 급작스레 불참을 통보한 정책 협의체 자리다.
즉, 비공개로 논의되는 자리에서 넷플릭스는 ISP와 협의할 부분을 찾았고 대중에 공개된 자리에서는 ISP에 반대하는 논리만 펼쳤다는 뜻이다.
망 이용대가 법안을 관철시키려는 유럽연합도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빅테크 회사들과 싸우며 유럽의 보안관으로 불리는 티에리 브르통 EC 집행위원은 MWC 직전까지 망 이용대가 법안을 두고 자신의 SNS 계정이나 공식석상 발언에서 날 선 발언을 쏟아냈다.
하지만 브르통 위원은 실제 MWC 기조연설에서 “망 이용대가를 둘러싼 논의가 통신사와 빅테크 간의 공정 분담을 둘러싼 분쟁으로 묘사되고 있다”면서 “통신사와 트래픽을 유발하는 사업자 사이에서 이분법적인 선택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빅테크의 잘못을 강도 높게 꼬집어온 인물이 망 이용대가 법안 논의는 특정 진영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GSMA도 비슷한 모습이다. ISP와 콘텐츠 사업자 혹은 대용량의 트래픽을 유발시키는 사업자가 대립할 게 아니라 협의에 나서라는 태도를 취했다.
MWC 주최 측인 GSMA는 기조연설 첫 세션의 주제를 ‘공정한(Fair) 미래’로 내세워 불공정한 문제를 따지겠다는 태도를 취했지만, 개막 직후에는 ‘열린(Open) 미래’로 변경했다.
공정 위한 협의가 핵심
브르통 위원은 “우리의 새로운 디지털 규정인 DSA(디지털서비스법)와 DMA(디지털시장법)로 보장된 공정한 경쟁 수준의 경기장을 갖췄다”고 밝히며 유럽의 망 이용대가 법안도 공정 경쟁을 보완할 것이기 때문에 추진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실제 유럽의 망 이용대가 법안보다 이미 마련된 DSA, DMA가 넷플릭스와 같은 빅테크에는 향후 더욱 강력한 규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또 구글과 메타 등 인터넷 광고가 주력 사업모델인 회사에는 유럽의 개인정보보호규정(GDPR)이 강력한 규제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유럽연합이 공정한 디지털 시대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망 이용대가 법안인 기가비트 커넥티비티 액트 법안도 시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한국의 입법예고와 같은 의견수렴 절차를 진행하고 5월 중순께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기간 ISP와 콘텐츠 서비스 진영 간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항을 담기 위한 논리 공방이 치열하게 이뤄질 전망이다.
브르통 위원이 이분법적인 시선을 경계하고, 딘 가필드 부사장이 피터스 CEO와 달리 협의점을 찾기 위한 논의를 진행한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유럽의 망 이용대가 법안의 기본 철학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구글이나 넷플릭스를 옥죄는 것보다 미래 디지털 인프라 투자를 어렵게 하는 일을 막겠다는 것이 법안의 추진 배경이다.
MWC에 참여한 통신사 한 관계자는 “한국의 망 무임승차 방지법이나 유럽의 법이나 구글과 넷플릭스에 네트워크 투자 비용을 내라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다”며 “유럽은 네트워크와 같은 디지털 인프라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싶은데 현지 통신사들의 네트워크 투자 비용이 구글과 넷플릭스 트래픽 대응에 쏠리면서 추가 투자 여력이 상실된다는 점을 문제 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SK브로드밴드도 전용회선 비용이든 넷플릭스가 말하는 캐시서버 설치 운영 비용 협의가 이뤄졌다면 특정 회사 서비스에 이뤄진 투자금을 SK텔레콤에서 오로지 5G 품질 향상에 쏟았을 것”이라며 “넷플릭스를 보지 않는 사람들의 통신비로 넷플릭스 트래픽 대응에만 쏠리는 상황이 유럽연합에서 실제 불공정한 사례로 고민하는 부분이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향후 공정한 분담을 위한 논의가 생산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망 이용대가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전망이다.
MWC 현장서 열린 포럼에 참여한 이상학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 부회장은 “국내 ISP는 인터넷 생태계의 지속적인 발전에 대한 책임을 글로벌 콘텐츠 사업자와 분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적정한 네트워크 사용료를 요구해왔지만, 소수의 회사들이 우월한 시장지배력을 내세워 협상조차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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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원만하고 자발적인 협상을 통한 분쟁 해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시장 실패로 무임승차가 방치된 상황을 극복하고 바람직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적 보호장치가 마련되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무법인 광장의 조대근 전문위원은 “당사자 간 신의성실에 입각한 협상과 정산을 하면 가장 좋지만 자신의 시장 지배력, 구매력, 여론 형성 능력, 규제 레버리지 등을 이용해 대가 지불 자체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은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