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28일(현지시간)부터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에 따라 자국 내 반도체 시설 투자에 나선 기업들에 대한 보조금 지원 신청을 받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간 미묘한 입장 차이가 감지된다. 이미 미국 내 텍사스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를 들여 반도체 위탁생산(Foundry·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와 아직 부지도 확정하지 않은 SK하이닉스의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의 예상대로라면 삼성전자는 보조금 신청에 나설 것으로 보이지만, SK하이닉스가 당장 나설 지는 미지수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해 7월 26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영상 통화로 "SK그룹은 미국에서 반도체 패키징 공장(Fab)을 짓고 연구·개발하는 데 150억 달러를 쓰겠다"고 말한 것이 전부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은 미국에 이미 공장을 짓고 있지만 SK하이닉스는 짓고 있는 팹이 없다"며 "이들 두 기업 모두 중국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미국의 중국 장비 수출 통제 강화에 따라 출구전략을 신중히 고민해야 하는 만큼 결이 다를 수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 지원은 자국 내 반도체 시설 투자를 확대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담겨 있다. 또한 50조원이 넘는 막대한 세금을 보조금으로 지원하는 까닭에 매우 까다로운 세부 기준을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미국에서 보조금을 받으면 10년 동안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을 키우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을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 정부는 조만간 상세 기준을 마련해 공지할 예정이다.
업계는 미국이 반도체 장비 수출을 통제한 것처럼 보조금 기준도 정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중국이 첨단 반도체를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겠다며 ▲18나노미터(1㎚=10억분의 1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나노 이하 로직칩을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통제한 바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보조금 신청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만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 공장을, SK하이닉스는 우시에서 D램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낸드 생산량의 40%를 중국에서 만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 수준은 128단 제품으로 전해진다. SK하이닉스도 D램의 40%를 중국에서 만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10~20나노 제품이다.
김재준 삼성전자 부사장은 지난달 31일 온라인에서 열린 지난해 4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삼성전자가 중국에 공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까지 오랜 시간 많이 투자했다”며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지 매우 신중하게 검토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미국 테일러에서 파운드리 말고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 수도 있느냐’는 물음에는 “파운드리 중심으로 계획했기 때문에 지금 답변이 어렵다”면서도 “국내외에 새로운 생산 거점을 확보하는 데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놨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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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는 첨단 극자외선(EUV) 공정을 국내에서 지원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다.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해 10월 26일 열린 3분기 컨퍼런스콜에서 “우시를 포함해 중국 공장을 운영하기 어렵다고 가정하면 공장이나 장비를 팔거나 그곳에 있는 장비를 한국으로 가져올 수 있다”며 “그런 비상 상황이 오지 않고 공장을 운영할 수 있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는 "반도체 등 첨단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중 경쟁에 격화되고 있고 국제적 헤게모니 싸움은 단일 기업 혼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만큼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매우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