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과학기술 외교로 넘는다

과학기술계, '미중 기술 패권' 속 전략적 선택 중요성 강조

과학입력 :2022/12/06 08:53    수정: 2022/12/06 14:17

"이제는 외교 분쟁의 내용도 기술, 해결책도 기술인 시대입니다."

정병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이 최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2022 과학기술외교 포럼'에서 한 말이다. 과학기술 외교의 중요성이 커지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반도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사진=로이터=뉴스1)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신냉전으로 이어지면서 과학기술계에선 과학 외교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과학외교를 통해 다른 나라들이 협력하고 싶어하는 혁신 파트너 국가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 급변한 글로벌 환경에서 전략적 선택 해야

과학기술 외교는 국제 협력이나 표준 선점 문제를 넘어 국가 안보를 좌우할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의 주도권을 두고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산업과 시장의 영역에서 주로 움직이던 이들 산업이 이제 국가 안보와 외교 관점에서 다뤄지고 있다.

해외 시장에 깊숙히 통합된 산업 및 무역 구조를 가진 우리나라로선 이런 흐름에 따른 가치사슬과 공급망 변화의 영향도 크게 다가온다. 한국은 반도체나 배터리 등의 핵심 분야에서 제법 탄탄한 국제적 입지를 갖고 있지만, 미중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스스로 국제 질서의 판을 규정할 역량까지는 없는 소규모 개방 경제이기 때문이다.

이준 산업연구원 산업정책연구본부장이 '2022 과학기술외교 포럼'에서 발제하고 있다.

이준 산업연구원 산업정책연구본부장은 "자유무역과 FTA, 글로벌 가치 사슬, 중국 등 그간 당연하게 여겨웠던 질서가 갑자기 확 바뀌어 기업이나 산업의 불확실성이 크다"라며 "국가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판단을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현안을 풀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외교"라고 말했다.

■ 미국, 국가 안보 위한 산업-수출 정책 추진

현재 미국은 냉전을 감수하더라도 기술 중심으로 안보 전략을 끌고가겠다는 입장이다. 미국 정부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NSS)는 "다른 국가의 민주적 정치 과정을 훼손하고 기술과 공급망을 활용하여 다른 국가들을 강압 또는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정권을 미국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도전으로 지목하며, "기술은 현재 지정학적 경쟁과 국가 안보, 경제 및 민주주의 미래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제임스 김 아산정책연구원 미국연구센터장은 "미국은 국가 안보 강화를 위한 산업 정책과 수출 통제 제도를 추진 중"이라며 "이를 위해 중국의 첨단 기술 접근을 제한하고 전 단계에 걸쳐 주요 광물의 공급망을 확보하는 한편, 공급망 탄력성을 키우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산업 정책 및 수출 통제 제도 (자료=아산정책연구원)

중국과의 무역이 미국의 경쟁력 상실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미국의 엘리트와 대중이 모두 높은 비율로 공감한다는 미국 동서센터와 NORC 조사 결과도 이같은 흐름을 뒷받침한다.

미국은 반도체 분야 투자와 지원을 통해 동아시아에 편중된 생산지를 분산하고 나아가 자체 생산까지 확대하려 들 전망이다. 본격적으로 커지는 자국 내 전기차 수요를 바탕으로 배터리 시장의 주도권도 가져올 수 있다.

■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이런 변화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인식할 것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있다. 최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미국의 산업 정책은 무역 통제뿐 아니라 기업 활성화와 고용 창출도 겨냥하기 때문이다. 동맹과 파트너 국가를 중심으로 한 미국 내 산업 성장과 지역 국가들과의 협력을 추진한다.

김 센터장은 "파트너, 공급사, 계열사 소비자가 받을 영향과 압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면서 "제조 시설 설립에 대해 미국이 제안하는 인센티브를 검토하는 등 미국 정부 및 기업과 협력하며 기회를 잘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반도체 밸류체인 국가별 부가가치 비중 (자료=산업연구원)

중국에 대한 세련된 외교도 중요하다. 한국이 반도체 기술을 보유하면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있는 것이 낫다고 설득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남은영 동국대 글로벌무역학과 교수는 "중국에 미국과의 반도체 협력은 생존을 위한 필연적 선택임을 강조해야 한다"라며 "한국이 미국에 집중할 것을 중국이 우려하는 상황을 잘 활용, 중국이 강점을 지닌 분야에 협력을 끌어내는데 정부 외교 협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 여전히 어려운 길

이러한 변화가 결코 만만한 도전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미중 패권 경쟁, 공급망을 전략자산으로 삼으려는 주요 국가들의 시도, 탄소중립 강조 등 기존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 이슈들이 산재해 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급망 취약 품목 중 수입액 기준으로 32%, 품목 기준으로 53%가 중국 제품이다. 요소수 대란에서 겪었듯 기술이 있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결국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으로 생긴 단기적적 기회를 적극 활용, 장기적 초격차로 이어가고 중국의 보복에 준비할 세심한 전략을 준비하는 것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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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패권에서 거리가 멀면서 ICT 혁신이 활발한 국가라는 강점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글로벌 의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본부장은 "첨단 기술을 둘러싼 강대국 경쟁 과정에서 중요한 흐름에서 배제되지 않고, 확보한 첨단 기술로 최소한의 억제력을 유지하기 위한 과학기술 외교가 중요한 시점"이라며 "미국과 13개 인도태평양 국가가 참여하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가 우리 과학외교 지평을 넓힐 시험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오태석 과기정통부 차관은 "기술패권 경쟁에서 과학기술 외교를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과학기술의 외연을 넓혀 나가야 한다"라며 "과학기술 외교의 명확한 방향을 설정하고, 차별화된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과학기술계 및 외교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겠다"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