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블루스(팔레스타인 서안지구)=김양균 기자] 팔레스타인 서안지구(West Bank)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최근 유혈분쟁 증가에 따른 이스라엘 당국의 이동 제한 조치로 의료접근에 심각한 침해를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기자는 사단법인 아디의 도움으로 지난 5일~16일(현지시각) 서안지구의 여러 도시와 의료시설, 주요 검문소 등을 방문해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인 이동제한과 그러한 조치가 의료접근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 지를 취재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충돌은 지속돼왔지만 최근 격화된 유혈분쟁은 더 강화된 통행 차단 및 이동 제한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OCHA)에 따르면, 올해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사망한 팔레스타인인은 아동 26명을 비롯해 최소 105명이다. 이는 지난해보다 57% 가량 증가한 것이다. 팔레스타인인 외에도 ▲이스라엘 민간인 10명 ▲이스라엘 군인 4명 ▲외국인 3명 등이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에 의해 살해됐다.
이달 들어서만 팔레스타인인 15명이 이스라엘군과의 총돌 과정에서 사망했다. 사망자 가운데는 6명의 어린이와 제닌(Jenin) 난민 캠프의 외과의사 압둘라 아부 알 틴 박사(Abdullah Abu Al Teen)도 포함됐다.
참고로 제닌은 서안지구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그 뜻은 아랍어로 ‘정원의 샘’이란 낭만적인 의미이지만, 현지 난민 캠프는 이와는 정반대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사업 기구(UNRWA)에 따르면, 1953년 만들어진 제닌 캠프는 평방 킬로미터당 3만3천여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서안지구 내 19개의 캠프 가운데 가장 높은 실업률과 빈곤율을 기록하고 있다.
서안지구 내 도시 나블루스(Nablus)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지난 9일과 11일(현지시각) 각각 동예루살렘과 나블루스 검문소에서 두 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인에게 총격 피살된 이후 이스라엘 방위군(IDF)는 용의자 수색을 위해 광범위한 이동 제한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이동 제한이 지속되자 OCHA는 18일(현지시각) 성명을 통해 “이동 제한 증가에 우려하고 있다”며 “2명의 이스라엘 군인 사망 이후, 이스라엘군은 광범위한 이동 제한을 실시해 많은 사람들이 의료·교육·생계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했다”고 밝혔다. 이어 “나블루스에서의 이동제한이 계속되자 하와라(Huwwara) 지역에서의 이스라엘 정착민 폭력의 심각성과 빈도가 증가했다”고 우려했다.
루시아 엘미(Lucia Elmi) 유엔 인도주의 조정관은 “이스라엘 당국은 모든 팔레스타인인을 보호할 법적 책임이 있다”며 “여기에는 취해진 조치가 팔레스타인인에게 (의료 접근 등의) 불균형적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단계적 이동 제한 조치 완화는 추가 인명 손실을 방지하고 민간인을 보호하며 필수 인도적 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권고했다.
관련해 안토니우 구테흐스(Antò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2017년 보고서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이후 군이 팔레스타인 마을 폐쇄 등의 조치를 내리는 것에 대해 “집단 처벌(collective punishment)에 해당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 통행 제한에 이송 중 응급 환자 상태는 계속 나빠져
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OCHA)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이스라엘 당국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West Bank) 주요 도로에 설치한 이동 제한 시설들은 ▲검문소(checkpoint) 71개 ▲지역별 부분 검문소(partial checkpoint) 108개 ▲개방 철문(road gate) 78개 ▲폐쇄 철문(road gate) 76개 ▲방어벽(road block) 68개 ▲흙더미(earthmound) 86개 ▲흙벽(earthwall) 20개 ▲도랑(trench) 3개 ▲도로장벽(road barrier) 49개 ▲기타 34개 등 총 593개다.
기자가 체류했던 나블루스(Nablus)의 경우, 이동 제한 시설은 ▲검문소 6개 ▲지역별 부분 검문소 1개 ▲개방 철문 4개 ▲방어벽 1개 ▲흙더미 9개 ▲흙벽 3개 ▲도로장벽 3개 등 총 27개가 있었다.
OCHA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과의 긴장 정도에 따라 해당 지역을 빠르게 폐쇄하거나 개방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긴장 발생 시 차량이 더 자주 정차해 지연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특히 동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도로에서는 더 엄격한 검문이 실시되고 특별 허가를 받은 팔레스타인 보행자만 통과가 가능하다. 기자의 체류 기간 동안 현지 긴장 상황에 따라 검문은 더 강화돼 있었다.
지난 15일(현지시각) 기자는 팔레스타인 행정수도 역할을 하는 라말라(Ramallah)에서 예루살렘행 버스를 타고 있었다. 버스가 동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검문소에 다다르자, 이스라엘 무장 경찰 두 명이 버스에 올라 검문을 실시했다. 버스 양 옆에는 무장한 군인 두 명이 더 있었다. 경찰들은 팔레스타인 탑승객 한 명의 특별 허가증을 문제 삼고 강압적인 질문을 이어가자 버스 안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그 사이 더 많은 경찰들이 버스를 에워쌌다. 결국 해당 탑승객은 버스에서 강제로 끌려 나갔다.
또 베들레헴 검문소 300(Checkpoint 300 in Bethlehem)도 이동 제한이 팔레스타인인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2005년 만들어진 검문소 300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여러 관광지를 향하려면 검문소 300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검문소 300의 입구에는 본보야지(Bon Voyage, 좋은 여행이라는 프랑스어)라는 간판이 걸려있지만, 이곳은 좋은 여행의 관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곳은 한 명씩만 통과할 수 있는 강철 보안회전문과 성인 세 명이 나란히 지나기 어려운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로 되어 있어 혼잡함과 긴 대기시간으로 악명이 높다. 보안회전문을 통과하면 L자형의 통로가 15~20미터 가량 이어졌다.
시멘트 바닥 위로 벽의 회색 페인트는 먼지와 검은 얼룩이 있었고, 다시 붉은 페인트가 통로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층높이가 높고 진행하는 방향의 오른쪽에 설치된 창문들은 복도를 이어지며 설치돼 있었지만 잠겨있었다. 통로를 지나면 넓은 대기 공간이 있었고, 여기에서 두 번째 보안회전문을 지나야 검문소 300을 완전히 통과하게 된다.
이스라엘 현지 언론인 하레츠는 “검문소 300에 도착하는 순간 하루를 잃어버리게 된다”며 “밀집한 인파가 콘크리트와 금속 막대로 둘러싸여 좁은 통로를 지나야 한다”고 비꼬기도 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대기 시간 감소를 위해 생체 인식 판독기를 설치하는 등 시설 개선을 추진 중이지만, 비판은 여전하다. 주된 이용자가 팔레스타인인인 탓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태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당국은 안보를 이유로 이러한 이동 제한 시설을 만들고 운영하고 있지만, 이러한 이동 제한 시설은 앞선 OCHA의 우려처럼 의료 접근권 등 인도주의 위기를 초래했다. 헬스워커스커뮤니티(Health Workers Community) 나블루스 지부의 나세르 나제(61) 총괄은 서안지구의 의료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했다.
“이곳은 분쟁과 사고로 환자가 너무 많다.”
나블루스(Nablus) 소재 안나자(An-Najah) 대학병원의 관계자도 “환자의 상태는 총격 등 중증의 응급 상황이 많아 이송 환자는 중환자실(ICU)로 옮겨 치료가 이뤄진다”면서도 “이송이 잦고 지연되면서 환자의 상태는 계속 악화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가자지구(Gaza Strip) 거주자가 우리 병원에 내원하려면 이스라엘 정부의 허가증이 필요한데, 허가를 받지 못하면 병원에 올 수 없다”며 “제닌(Jenin)과 나블루스 인근 환자들은 이스라엘 군이 도로 통행을 제한해 병원에 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동 제한은 의료 접근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기도 한다. 서안지구 남부 헤브론(Hebron)에는 십여 개의 소규모 마을로 이뤄진 마사퍼 야타(Masafer Yatta)란 지역이 위치해 있다.
이곳이 국제사회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이스라엘군이 마사퍼 야타 내 상당수 마을이 포함된 지역을 ‘파이어링존 918호(Firing Zone 918, 사격 구역)’으로 공포, 퇴거 명령을 내리면서부터다.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이스라엘 고등법원(HCJ)은 원 거주민들이 다시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임시조치를 내렸지만, 지난 5월 4일 HCJ는 최종 퇴거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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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링존으로 지정된 마을 대부분은 양과 염소를 키우거나 농작물을 가꿔 생계를 잇는다. 이곳에는 전기·물·의료기관과 같은 사회 기반시설이 전무해 물을 얻거나 목축을 위해서는 이동이 불가피하다.
기자가 만난 현지인 하페즈 후레이니(52)는 “HCJ판결 이후 이스라엘 당국은 파이어링존 내 마을들에 대해 이동제한 조치를 내리고 차량을 압류했다”며 “타 지역에 갔다가 불법 침입 명목으로 체포되는 일이 잦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차 대신 트랙터로 이동하고 있는데 이제 트랙터도 타깃이 되고 있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