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박수형 기자> 오는 20일 민영화 20년을 맞이하는 KT가 137년에 이르는 한국의 통신 역사를 공개했다. 1885년 한성전보총국 개국으로 시작된 이후 KT가 원주연수원에 보관하고 있는 6천 점 이상의 통신 사료를 16일 외부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KT가 통신사료관에 소장한 통신사료는 19세기 말부터 사용된 전화기부터 스마트폰에 이르는 통신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사료는 1800년대 말 사용된 전화기 덕률풍이다. 덕률풍은 ‘텔레폰’ 영어발음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명칭이다.
시대별 전화기부터 교환기, 공중전화기, 팩스로 일컫는 문자통신 인쇄전신기, 삐삐 등이 이목을 끈다. 5G 통신과 디지코에 이르는 현재 KT의 모습 이전에 대한민국 ICT 발전 역사를 한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한국 통신역사 보고...등록문화재도 전시
KT통신사료관에는 1920년대에 쓰인 벽괘형 공전식 전화기, 1935년 최초의 다이얼식 전화기, 모오스 부호를 활용하는 음향인자전신기 등이 눈길을 끈다. 자동교환기가 등장하기 이전 기계식 전화기는 근대 시대를 다룬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자료다.
한국 통신역사에서 의미가 큰 교환설비는 ‘TDX-1’도 전시됐다. 1984년 전자교환기 TDX-1을 자체 개발한 이후 1986년 상용 개통한 이 장비는 세계에서 10번째다. TDX 교환기 개발은 외국에 의존해 오던 교환설비를 국내 독자 기술로 설계, 제작 생산해 구축하면서 전국 전화보급의 큰 역할을 맡았다.
120년전부터 쓰인 공중전화는 전화 보급 이전 서민의 애용품이었다. 1962년 광복 이후 옥회 무인공중전화기가 처음 설치됐고, 1982년 국내 기술로 개발된 첫 시내외 겸용 DDD 공중전화가 보편화됐다.
통신사료관에는 시대별 전화번호부도 보관돼 있다. 1966년부터는 가입자 수가 많아지면서 전화번호부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당시 유선전화 가입자들이 쉽게 번호를 찾을 수 있도록 KT는 1년에 1부씩 무료로 전화번호부를 배포해왔다. 두꺼운 전화번호부는 가정이나 공중전화 앞에 놓여있었다.
모스부호로 시작된 전신은 전신기는 전신국, 지금의 우체국에 설치돼 전보를 주고 받는 용으로 사용됐다. 인쇄전신기는 타자기를 치며 종이에 메시지를 인쇄할 수 있어 당시 서면통신의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던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인쇄전신기를 통해서 1대 1로 연결하다가 텔렉스를 이용하면서 내용을 저장했다 송수신 할 수 있게 됐다. 최근 개봉된 이정재 감독의 영화 ‘헌트’ 촬영에 실제로 KT 통신사료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인쇄전신기가 쓰이기도 했다.
이동통신의 변천사도 볼 수 있다. 1982년 235명에 불과했던 삐삐 가입자는 1997년에는 1천519만여 명까지 늘었다. 삐삐의 대중화는 공중전화의 보급도 가속화시켰다.
이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 상용화로 이동전화 시대가 열렸다. 2G 통신 이후 문자메시지를 디지털 데이터로 전송하는 PCS 시대가 개막됐고, 현재 스마트폰 시대에 이르게 됐다.
통신사료관의 해설을 맡은 이인학 정보통신연구소장은 “KT가 원주에 보관하고 있는 통신사료들은 우리나라 정보통신 흐름에 따른 시대상과 국민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아주 높다”며, “KT가 대한민국의 통신 역사의 본가인 만큼 앞으로도 미래 ICT 역사에서 주역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KT 전신 한국전기통신공사 시대
한국전보총국 개국이 지금 KT의 전신이지만, KT라는 기업의 출발은 1981년 12월 출범한 한국전기통신공사(이하 한국통신)에서 비롯됐다. 정부 산하의 기관 형태로 있었지만 경영환경과 기술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공사에서 민영화 KT까지 이어진 것이다.
한국통신은 유선전화 서비스에서 전화 적체 해소와 경제성장 디딤돌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자교환기 TDX-1 자체 개발로 1987년 전국 전화 1천만 회선을 구축하며 1가구 1전화 시대를 실현했다.
벽돌에 비유됐던 1세대 휴대폰 이전에 1982년 삐삐(무선호출기)로 이동통신 시대를 개막했고 1984년에는 셀룰러 방식의 차량전화서비스(카폰)을 개시했다. 이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설립했고 새 역사가 시작됐다.
한국통신은 1996년 PCS 사업권을 획득하고 한국통신프리텔(KTF)을 창립했다. KTF는 1997년 10월에 서비스 출시 후 6개월 만인 1998년 4월에 가입자 100만 명을 넘어섰고, 한국통신은 2000년 한솔엠닷컴을 인수하면서 통합법인 KTF를 출범시켰다.
1990년대 초고속인터넷 시대의 주축을 맡기도 했다. 당시 IMF 시기에도 ADSL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지금의 인터넷 강국의 초석을 닦았다. 앞서 1995년과 1996년 무궁화위성 1, 2호를 발사하면서 상용위성 보유국가에 이름을 올렸고 1999년 무궁화위성 3호를 발사하면서 위성통신, 위성방송 시대를 열었다.
■ 민영화 KT 20년...국가 ICT 경쟁력 확보
한국통신은 2000년대 들어 KT로 사명을 변경하고 민영화 길에 들어서는 첫 걸음을 내디뎠다. IMF 시기에 해외 주식예탁증서를 발행하며 뉴욕증시에 상장했고, 당시 외환 위기 이후 국내 기업의 외자 유치에서 KT가 3분의 2에 달했다.
월드컵 열기가 남아있던 2002년도 8월20일 공식 민영화된 KT는 유무선 인프라 고도화에 발 빠르게 뛰어들었다. 13Mbps급의 VDSL을 국내 최초로 상용화 하면서 국내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1천만을 주도했고 2003년 1월 세계최초 최단기간 500만 가입자를 돌파했다.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른 인터넷 보급률과 서비스 속도는 한국의 IT 산업 생태계에 꽃을 피웠다. 현재 볼 수 있는 전자상거래, 디지털 콘텐츠, 온라인 게임 등은 이 시기를 발판으로 가능해졌다. 당시 벤처기업 수는 1998년 2천42개에서 2001년 인터넷 보급 이후 5배 이상 급증했다.
초고속인터넷은 2007년 광케이블(FTTH) 기반으로 IPTV 서비스를 가능케 하면서 영상 콘텐츠 시장의 급격한 성장을 촉발시켰다. 앞서 2002년 위성방송 서비스 스카이라이프를 개시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이를 기반으로 마련됐다.
KT는 글로벌 통신 확대와 남북 통신 교류에도 앞장섰다.
허건 KT 광고홍보팀장은 “2002년 아시아태평양 8개국 해저 광케이블 개통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데이터 통신 수요를 충족시켰고, 2008년에는 한국, 중국, 미국, 대만을 연결하는 국제 해저광케이블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KT문산지점과 북한의 개성전화국 광케이블을 서로 연결하고 개성공단에 KT지사를 설립하기도 했다”며 “국내 최초 민군공용 위성으로 무궁화 5호를 쏘아올리며 인접국가와 서비스를 확대할 발판을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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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아이폰을 도입하면서 스마트폰 혁명에 일조했고, 지난 2015년에는 MWC에서 5G 통신 세계최초 상용화 비전을 선포한 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5G 시범서비스를 선보이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는 세계 최초 5G 통신 상용화로 이어졌다.
KT는 이 같은 역사를 바탕으로 KT는 디지털 플랫폼 기업(DIGICO) 전환으로 새로운 성장 전략을 마련해 실행하고 있다. 신규 성장 사업의 포트폴리오를 마련하면서 올해 상반기 역대 최대 반기 매출 실적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