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도, 허리도 아프고"…우크라 전쟁 피난 한국 온 고려인들

안산 땟골 마을 기거 우크라 고려인 의료지원 현장 가보니

헬스케어입력 :2022/08/08 10:24    수정: 2022/08/08 16:19

“안과도 있어요?”

지난 6일 오전 10시 경기 안산시 외국인주민지원본부 3층. 외국인주민지원본부 앞에서 한 60대 노인이 물었다. 우리 말이 서툰 그는 장기화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안산 고려인마을인 ‘땟골 마을’에 거주하는 ‘고려인’이었다.

이날 오전 일찍부터 안산시 외국인주민지원본부 앞은 부산했다. 앞서 광주 고려인마을을 시작으로 고려대의료원이 이곳에 의료지원차 방문하기로 돼 있었다. 이미 이동검진차량과 이동진료버스는 ‘환자’ 맞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임시 진료소가 마련된 3층 강당은 진료 준비로 부산했다. 2층은 환자 접수와 대기공간이었다. 고려대안산병원 의료진은 붉은 조끼를, 시민단체 ‘고려인 지원센터 너머’ 소속 활동가와 자원봉사자들은 노란 조끼를 입고 있었다. 10시8분 첫 번째 ‘손님’이 임시 의료지원소를 찾아왔다.

“혈압부터 재겠습니다.”

김동휘 고대안산병원 재활의학과 교수가 고려인 환자와 상담을 하고 있다. 사진=김양균 기자

우리말에 익숙지 않은 고려인들을 위해 ‘너머’의 통역 자원봉사자들이 붙었다, 대부분 고려인 청년들이었다. 어려운 의료용어 통역은 관련 전공자가 아니면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한 통역 봉사자의 말.

“참여하러 올 때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쉽지가 않네요.”

‘환자’는 심장에 문제가 있어 심장 검사를 원한다고 했다. 현재 약 복용 여부 등을 적은 후 혈액검사를 위해 주사기를 팔에 꼽자 얼굴을 찡그렸다. 혈압 및 소변 검사는 현장에서 바로 이뤄졌다. 몸무게와 키도 쟀다. CT 및 엑스레이는 외국인주민지원본부 앞의 이동검진차량인 ‘온드림 모바일병원’에서 이뤄졌다.

김동휘 고대안산병원 재활의학과 교수는 “맞춤형 진료를 위해 진료를 신청한 고려인들에 대한 사전 조사를 진행했다”며 “요청이 많았던 진료과를 고려해 근골격·호흡기·내분비·흉부외과 등 4개 질환을 담당하는 교수들이 의료지원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진료를 신청한 고려인들의 연령대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가족단위로, 고령자보다는 청·장년층과 소아들이 많았다. 더러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도 있다. 고려대의료원은 이들의 수술 지원을 위한 기금을 조성한 바 있다. 건강보험급여 시작 시점과 수술의 시급성 등을 고려해 지원이 이뤄지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 사이에 새 ‘환자’가 오자 김 교수가 물었다.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고요?” 환자가 무어라 대꾸하자, 통역이 그의 말을 대신 전했다. “2019년에 임신했을 때 마지막으로 검사를 하고 이후에는 안했다고 해요.”

김 교수는 “자원봉사 차원에서 병원들이 고려인 의료 지원을 실시해오고 있다”며 “국회에서 관심 있는 의원들이 관련 법안을 만들면 정부 차원에서 고려인에 대한 체계적 지원이 이뤄지지 않겠느냐”고 귀뜸했다.

고려대의료원은 고려인들의 수술 지원을 위한 기금을 조성한 바 있다. 사진은 혈액 채취를 하는 모습. 사진=김양균 기자

■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한국화중앙연구원에 따르면, 고려인은 우크라이나에 1922년부터 거주하기 시작했다. 1926년 우크라이나에는 103명의 고려인이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그 수는 점점 늘어 1959년 1천341명, 1970년 4천480명, 1989년 8천669명, 2001년 1만2천711명 등으로 불어났다. 지난 2014년 크림 주민투표 이후 크림 자치 공화국이 러시아에 편입되면서 현지에 거주하던 3천여 명의 고려인들이 러시아로 국적이 바뀌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현지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현재 국내에 입국한 고려인의 수는 1천200명가량. 이 가운데 안산 땟골 고려인마을로 온 이들은 200여명이다.

고려인 지원센터 너머의 김진영 활동가에 따르면, 현지 고려인들은 전쟁 여부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인근 국가인 폴란드와 루마니아로 피신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폴란드에서 여권 없이도 간소화된 관광비자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 행정 절차에 한 달이 걸렸다. 많은 경우 우크라이나 내 징집령으로 남자들은 빠져나오지 못했고, 여성들과 어린아이들만 피난길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한국에 피난온 고려인들은 잦은 현재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김양균 기자

지난해 12월 우리나라에 온 고려인 A씨는 전쟁 이후 어머니와 조카들도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너무 위급한 상황이었고, 가족들과 여자들이 피신할 수밖에 없었어요. 죽은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다며 답답해 했다.

또 다른 고려인 B의 이야기.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네일샵을 운영했다. 남편은 셰프였다. 그는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친러시아 분쟁을 목도한 바 있었다. 이 분쟁은 우크라이나 내 친러파들을 중심으로 도네츠크주가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후 루한스크주도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이 과정에서 도네츠크 지역과 마리우폴에서는 장기간 교전이 발생했다.

당시도 한국으로 잠시 몸을 피했었다. 한국으로의 피신이 이번이 두 번째. 남편, 아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왔다. 그렇지만 시부모와 친 언니는 우크라이나에 남겨두고 떠난 그의 마음은 편치않다. 그는 “폭격 소리가 익숙하다”고 했지만, 거듭된 전쟁으로 그는 우크라이나를 영영 떠날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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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다수의 아동청소년이 사망한 가운데, 지난 6일 안산시 외국인지원센터에서 의료지원을 받기 위해 고려인 200명이 방문했다. 사진=김양균 기자

이날 의료지원은 오후까지 계속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들은 늘어났고, 기자는 보탬이 되고 싶어 잠시 접수대를 맡았다. 물론 큰 도움은 되지 않았을 터다.

취재를 마치고 잠시 들른 2층 접수실에서 한 고려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눈을 찡긋, 윙크를 보냈다. 당황해 엉거주춤한 사이 영영 인사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