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진오일 무상교환 기사 때문에 화난 독자께

[이균성의 溫技] 무한궤도 가면놀이

데스크 칼럼입력 :2022/06/22 14:30    수정: 2022/06/22 16:36

개념적으로 볼 때,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고, 기사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 점에서 소설보다 기사가 진실에 더 가깝다고 믿겨진다. 그런데 요즘 이 통념이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현실에서 이와 반대인 경우를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기사가 오히려 꾸며낸 이야기처럼 보이고 소설이 가면을 벗겨내고 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 것이다. 이 점이 글쓰기를 당혹케 한다.

최근 독자한테 정중한 항의를 받았다. 어느 자동차 회사가 엔진오일을 무상으로 교환해준다는 기사 때문이다. 해당 기사는 그 회사의 보도 자료를 기반으로 작성됐다. 전하지 않아도 그만인 단신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보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에 시간을 내서 작성됐고 출고됐다. 작성됐다고 썼지만 사실 보도 자료를 대부분 옮긴 것이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작은 뉴스는 그렇게 작성된다.

독자의 항의는 엔지오일 값을 안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임은 따로 받았기 때문에 무상교환이라는 기사는 잘못됐다는 것이다. 기사가 꼼꼼하지 못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있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공임도 공짜라고 썼다면 틀린 사실을 기록한 것이 되지만 공임 내용은 아예 기사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란은 무상교환에 대한 통념과 그 해석에 대한 이견 정도로 보는 게 맞다.

해당 기사를 쓴 기자가 이 기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또 무상교환에 공임도 포함돼야 하는 지 그렇지 않은 지가 사회적으로 적잖은 이슈였다면, 당연히 그 부분을 다뤘을 것이다. ‘엔진오일 값은 공짜지만 오일을 갈아주는 공임은 유료다’는 식으로 작성했을 터다. 그런데 이 사실은 기자의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상상을 하고 추가 취재를 하지 않은 한 알 수 없다.

글쓰기의 당혹스러움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 일은 아주 작은 해프닝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언론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짐작이긴 하지만 정확히 조사를 한다면 이런 해프닝은 봄날 미세먼지처럼 우리 언론들이 쏟아낸 기사들을 점령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도 우리 언론들이 그렇게 대응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편함을 털어낼 수 없다는 거다.

기사 쓰기는 ‘사실의 단순한 기록을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행위’이다. ‘사실의 단순한 기록’이란 보도하려는 대상의 가면을 벗겨 실체를 앙상하게 드러내기 위한 작업이다. 사실이 앙상해져야 비로소 진실을 향한 전망을 획득할 수 있다. 문제는 사실은 항상 가면을 쓰고 존재한다는 데 있다. 가면은 주로 축소와 과장과 왜곡이란 외피를 두르고 있다. 그 외피를 벗기는 게 '사실의 단순한 기록'이다.

사실이 쓴 가면의 외피를 벗기는 일은 그러나 쉬운 게 아니다. 대충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세상이 앙상한 사실보다 가면 쓴 사실을 더 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이 앙상해져서 진실에 접근할수록 그 실체를 보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앙상한 이야기가 널리 퍼지기 어렵고, 그 대신 영웅 이야기나 해피엔딩, 그리고 긍정의 바이러스가 넘쳐나게 된다.

둘째, 출입처 제도다. 지금은 뉴스가 발주되는 세상이다. 기사의 생산자는 당연히 기자지만 사실 많은 뉴스는 누군가에 의해 발주된다. 기자마다 매일 수십 통 씩 받는 보도 자료가 곧 뉴스의 발주고 뉴스 메이커의 발언도 그러하다. 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모든 것에 약간의 가면이 씌워져 있다는 점이다. 그 가면을 벗기는 게 쉽잖다. 기자와 출입처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는 기본적으로 제약을 전제로 한다. 한쪽 당사자가 어느 정도 제약되지 않는다면 관계는 유지되지 않는다. 친구든 가족이든 직장 동료든 모든 관계가 마찬가지다. 관계에는 서로 가면이 필요하고 그 가면이 곧 제약이다. 내가 당신의 가면을 벗기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관계는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언론은 지금 출입처 제도란 관계 속에서 날마다 위태로운 가면놀이를 하고 있는 거다.

셋째, 기자의 한계다. 가면을 벗기는 일은 고도의 지적 노동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그 끝을 알 수 없고 다가갈 수도 없는 험난하고도 허망한 일이 그것이다. 이 험로를 걸어가면서 기자들은 서너 가지의 오류에 빠진다. 무심함, 인간이 가지는 본질적인 인식능력의 한계, 자기 기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 이념이나 종교 등으로 덧칠된 편견. 그 모든 것들이 가면을 벗기는 일을 힘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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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은 사라지고 있지만 텍스트를 읽는 건 더 어려워지고 있다. 텍스트는 끊임없이 화장을 하고, 진실을 알려는 독자는 양파를 까듯 그 화장을 지우고 또 지워야 한다. 누구든 글을 쓰고 영상을 남기는 시대에 이 가면놀이는 만인의 드라마가 됐고 무한궤도처럼 도달하지 못할 곳이 없다. 그 사실이 두렵다. 그래서 그럴까. 작정하고 꾸며낸 이야기, 소설 속이 더 안전하고 진실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이 글은 한 편의 칼럼이기도 하지만, 무심코 출고된 기사에 상처받고 항의하신 독자분께 드리는 소심한 사과 또는 변명이기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