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에 정신잃은 우크라 환자가 왔다, 수중에는 청진기 하나뿐

[이슈진단+] 우크라이나의 인도주의 재앙② 폴란드서 난민 대상 의료봉사한 정철웅 교수…"남겨둔 가족 걱정 통감"

헬스케어입력 :2022/06/15 16:28    수정: 2022/06/15 17:06

고려대안암병원 이식혈관외과 정철웅 교수는 고려대의료원 의료지원단에 소속돼 지난 3월 19일 우크라이나 접경국인 폴란드로 출국했다. 정 교수는 폴란드에서 2주간 체류하며 우크라이나인 및 고려인에 대한 의료지원 활동을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고려대의료원은 사마리안퍼스라는 국제단체와 협약을 맺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의료원 소속 의료진의 현지 급파 요청으로 의료원은 이 단체와 의료지원 준비에 착수했다.

단체가 우크라이나에 직접 들어가 현지 활동을 시작한 반면, 고대의료원 의료지원단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외교부가 여행경보 4단계를 발령, 우크라이나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의료원은 폴란드한인회와 함께 폴란드행을 준비했다. 

고려대안암병원 이식혈관외과 정철웅 교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 3월 19일 폴란드에서 우크라 난민들을 돌봤다. (사진=고려대의료원)

폴란드에는 이미 숱한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입국해 있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현재까지 폴란드로 피란한 우크라이나인의 수는 183만 명에 이른다. 신규 유입자는 계속 증가 중이다.

의료지원 활동 치 분쟁지역을 여러 번 방문했던 정 교수는 “촉각을 다투는 사안이라 굉장히 빨리 준비를 해야 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게 정 교수가 처음 가게 된 곳은 폴란드의 수도 바라샤바 남쪽에 위치한 도시 소비에니에였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이 퍽 호의적이었다. 과거부터 현지에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이 상당수 있었고, 폴란드 내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적지 않아 거부감이 적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폴란드한인회를 도운 사람도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정 교수가 의료봉사를 진행한 환자들은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 국민 동원령을 내려  젊은 남성은 피란할 수 없었다. 폴란드 등 인접 국가로 피신한 이들은 국경근처 캠프에서 5~6일 가량을 머물고 유럽 내 친인척을 찾아가거나 그들을 돌봐줄 수 있는 곳으로 흩어졌다.

정 교수는 “갑상선에 5센티미터 크기의 종양이 있던 우크라이나 환자에게 수술비를 주겠다고 하니 거절했다”며 “교사나 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가 있어 자존심도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쟁으로 부상당한 환자들은 많지 않았다. 폭격 등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지역 내 의료기관으로 이송됐다. 정 교수 일행을 찾아온 난민들은 대부분 장기간의 타향살이로 근골격계 질환 등 각종 질환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또 당뇨와 고혈압 등 만성질환을 갖고 있지만 장기간 의약품 복용을 못해 약을 구하려는 사람들도 찾아왔다.

사진=고려대의료원

한번은 코로나19 후유증을 호소한 가족이 그를 찾아왔다. 남편은 한국인이었는데 우크라이나 여성과 가족을 이뤘다고 했다. 이들은 코로나19에 감염됐다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후유증이 생겼는데, 가까스로 폴란드한인회에 연락이 닿아 직접 봉사단을 찾아온 것이었다. 정 교수와 의료진은 이들의 건강상태를 살피고 미리 준비해간 치료제도 나눠줬다.

아찔한 경험도 있었다. 폴란드 내 다음 행선지로 가기로 한 소비에니에에서의 전날 밤 호텔 직원이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쇼크로 정신을 잃은 환자가 있었다.

“약과 의료장비 등을 미리 다음 행선지로 보낸 터라 수중에 청진기 하나밖에 없었어요. 다행히 환자 상태가 위중하진 않아 겨우 구호를 할 수 있었죠.”

정 교수는 전쟁으로 고아가 된 우크라이나 아동들을 돌보던 이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리야 며칠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돌아오면 그만이지만,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오갈 데가 없는 아이들의 상실감은 계속 되잖아요? 아이들을 위해 장기적으로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 데 그 말이 마음에 계속 남았습니다.”

호텔을 빌려 난민을 치료해주던 NGO 소속 의사의 말도 정 교수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의복이 부족한 난민에게 단돈 만원이라도 새 옷을 사서 주지, 절대로 헌 옷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옷을 가져갈 때도 쇼핑하듯 고르게 한다는 거죠. 우크라이나에서 우리처럼 보통의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전쟁으로 피신한 것뿐이니까요. 그들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한 배려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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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수가 현지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인들은 몸의 상처만큼 마음의 상처도 깊어 보였다. 정 교수는 “트라우마가 상당해 보였다”고 안타까워했다.

“난민 아이들이 축구를 하면서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어른들은 표정이 너무 무거웠어요. 함께 피신하지 못한 남편·아버지·아들에 대한 걱정이 얼마나 컸겠어요. 뉴스로 고향이 폭격당하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그들의 심정이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조차 없는 고통일 겁니다.”

러시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하우키우 시가지의 모습. (사진=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