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美 프로야구는 왜 '전자기기 사용'을 허락했나

'피치컴' 도입은 고뇌에 찬 혁신의 산물

데스크 칼럼입력 :2022/04/07 16:54    수정: 2022/04/14 16:50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포수가 미트 속에서 사인을 보낸다. 사인을 본 투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공을 던진다. 때론 포수가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기도 한다.

야구 경기에서 익숙한 장면이다. 그런데 미국 프로야구에선 올해부터 이런 익숙한 장면을 더 이상 보기 힘들게 됐다. 메이저리그(MLB) 사무국이  이번 시즌부터 사인 전달용 전자 기기 ‘피치컴’(PitchCom) 사용을 허락한 때문이다.

피치컴은 포수가 팔목에 착용한 기기에서 구종과 코스를 누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포수가 버튼을 눌러 공의 구질과 코스를 선택하면 투수에게 소리로 전달된다. 투수 뿐 아니라 내야수 3명도 구종과 코스를 함께 전달받게 된다.

10년 전만 해도 이런 변화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신성한 야구 경기에 기계가 개입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사진=피치컴

■ 스낵컬처 시대 '아재 스포츠'로 전락…경기 시간 줄이기 총력 

그랬던 MLB 사무국이 왜 전자기기 사용을 허락했을까? 물론 ‘사인 훔치기 논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2017년 월드시리즈 우승팀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조직적으로 포수 사인을 훔친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논란에 휘말렸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아재 스포츠’란 오명을 씻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MLB만 아재 스포츠 취급 받는 건 아니다. 짧고 감각적인 '스낵 컬처(snack culture)’가 대세로 떠오르면서 젊은 층들이 미국 4대 스포츠를 외면하고 있다.

그런데 MLB는 상황이 좀 많이 심각하다. 평균 시청 연령층과 선호도 모두 바닥이다. 포브스에 따르면 13세 이상 17세 이하 연령층 중 프로농구(NBA)를 좋아한다는 비율은 53%에 달했지만 MLB는 4%에 그쳤다. 평균 시청 연령층을 보면 더 한숨이 나온다. MLB 평균 시청 연령층은 59세로 4대 스포츠 중 가장 높다. 43세인 NBA와 큰 차이가 있다.

사진=피치컴

야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정적이다. 경기 시간도 길다. 10년 전 2시간 50분이었던 메이저리그 평균 경기 시간은 지난 해엔 3시간 10분으로 늘어났다. NBA는 길어야 두 시간이 채 안 된다. 게다가 NBA나 아이스하키는 야구보다 훨씬 긴박하게 진행된다. 젊은층의 시선을 잡아둘 방법이 별로 없다. 

MLB 사무국이 최근 ‘경기 시간 줄이기’에 많은 신경을 쓰는 건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2020년부터 일단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최소 3명 이상 타자를 상대하거나 이닝을 마쳐야만 교체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런 고민 때문이었다.

전자 기기로 사인을 주고 받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 고민에서 나왔다. 괜히 사인 감추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재 스포츠’란 오명을 씻겠다는 절박함 때문에 예전 같으면 말도 못 꺼낼 변화를 과감하게 택했다.

내년 시즌부터 ‘빅데이터 혁명’의 산물인 수비 시프트를 제한하기로 한 것도 비슷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다. 2루 베이스를 중심으로 그라운드 반대쪽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수비수 이동 시간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 MLB의 눈물 겨운 변신, 미디어들도 모범으로 삼아야 

야구를 무척 좋아하는 팬으로서 MLB의 최근 변화는 당혹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달라진 수용자들의 요구를 적극 담아내려는 그들의 눈물겨운 변신 노력엔 박수를 보낸다. 그게 혁신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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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일찍이 “전통이 부재한 예술은 목자 없는 양떼와 같고, 혁신 없는 예술은 시체와 같다”고 말했다. 이 명언 속엔 전통을 고집하느라 혁신을 외면하는 건 ‘죽은 존재’나 다름 없다는 성찰이 담겨 있다.

MLB의 최근 시도를 보면서, 처칠의 명제를 다시 떠올려 본다. 저 명언 속에 있는 ‘예술’이란 단어를 ‘저널리즘’으로 바꿔서 다시 읽어 본다. 크게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남 얘기만은 아닌 것 같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