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이 수요를 만든다는 세이의 법칙이 있다. 2008년 아이폰이 탄생한 이래 모바일을 이용한 게임, 메신저, SNS 서비스가 뒤따랐고, 이용자들은 이를 즐겼다. 요즘은 월정액만 내면 엄청난 양의 동영상 콘텐츠를 보고 싶은 때에 마음껏 볼 수 있는 OTT가 대세다. 여기서 공급은 새롭게 탄생한 OTT, 수요는 소비자다.
공급·수요 중 어느 한 편에 속하지 않으면서, OTT 서비스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자가 있다. 바로 통신사다. 가운데 '낀' 이 사업자는 돈을 버는 쪽도 아니다. 통신사는 OTT 서비스 때문에 큰 트래픽을 떠안게 됐다. 이때 통신사는 "우리가 OTT 때문에 발생하는 트래픽을 감당하려면 인프라 확충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돈을 더 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 부담스러운 말을 통신사는 누구한테 하는 게 맞을까?
선택지는 OTT 업체, 소비자 둘 중 하나다.
국내 인터넷서비스제공사업자(ISP) SK브로드밴드는 새로운 비용 부담의 타당성을 넷플릭스에서 찾고 있다. 넷플릭스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넷플릭스 한국 법인은 지난해 4월 SK브로드밴드에 망 운용 망 운용·증설·이용에 대한 대가를 지급할 의무가 없음을 확인해 달라는 내용의 소를 제기했다. 올해 6월 패소했고, 곧이어 항소했다.
심지어 페이스북이 SK브로드밴드와 같은 갈등을 겪다 망사용료를 내겠다고 합의한 사례가 있음에도, 넷플릭스는 꿋꿋이 버티고 있다. 디즈니플러스도 11월 국내 진출을 앞두고 미국 콘텐츠전송네트워크(CDN) 업체 패스틀리와 계약을 맺었다. CDN 사업자가 국내 통신사에 직접 망을 연결해 전용 회선료를 지급하면 되므로, 간접적으로 망 이용료를 분담할 수 있다.
넷플릭스는 이미 책임을 다하고 있으며, 추가로 ISP에 망 사용료를 낼 의무가 없다고 반박했다. 넷플릭스는 자체 CDN이라 할 수 있는 캐시서버 프로그램 ‘오픈커넥트얼라이언스’(OCA)를 통해 통신사들의 망 비용을 이미 절감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OTT 덕분에 CDN 시장도 불어났으나, 망 사업자에게 비용 부담의 여력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마켓앤마켓에 따르면 전 세계 CDN 시장은 지난해 말 기준 144억달러(16조9천억원)에서 2025년 279억달러(32조8천억원)로 2배 가까이 확대될 전망이다. 이 보고서는 실시간 영상 송출과 OTT로 인해 CDN 시장이 성장했다고 짚었다. 그런데 이는 전 세계 CDN 시장에 대한 평가일 뿐, 우리나라 통신사는 손실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SK브로드밴드에 따르면, 넷플릭스가 회사의 망에 발생시키는 트래픽은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2018년 5월 50Gbps 수준에서 2021년 9월 현재 1200Gbps 수준으로 약 24배 폭증했다. 회사의 손실 역시 계속해서 늘고 있다. 지난 2분기 기준 일평균 트래픽 상위 10개 사이트의 국내외 CP 비중을 보면 넷플릭스, 유튜브 같은 해외 CP 비중이 78.5%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SK브로드밴드는 지난달 30일 부당이득반환 법리에 의거해 넷플릭스에 망 이용대가 청구를 위한 반소를 제기했다. 요구한 금액은 700억원이다. 소송이 1년 이상 길어질 경우 1천억원 규모로 늘어나게 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공급을 만든 자가 앞으로도 계속 공급하고 싶다면, 수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이용자 수가 곧 매출인 넷플릭스는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매출 4천154억원에 영업이익 88억원을 기록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최고 가입자 수를 경신할 수 있을 전망이다. 넷플릭스는 지난 7월 가입자 수가 2억900만명이라고 발표했으며, 3분기엔 2억1천900만명 정도로 예상했다. 해외 증권가에서는 “넷플릭스가 역대 최고 가입자 수를 갱신하게 되면, 이는 바로 오징어게임 덕분”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외신도 단순히 오징어게임의 인기만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 소송을 관심있게 보고 있다.
넷플릭스는 아직 OTT 서비스가 활성화 되지 않은 케냐 같은 개발도상국가들에선 무료 혹은 아주 저렴한 가격 정책을 펴고 있다. 분명 좋은 정책이다. 넷플릭스가 오징어게임 처럼 우리나라 콘텐츠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점도 좋다. 하지만 공급-수요 양 극단에서 자랑처럼 보여지는 이런 혜택은 중간 사업자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아랫돌 빼 윗돌 괴는 격'이다. 저렴한 이용료로 이용자를 모은 다음, 정착한 사업자의 지위를 이용해 수수료를 대폭 인상해버리는 '독점 기업'의 횡포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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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플랫폼 기업에 대해 각국이 우호적이지 않다. 지난 8월 우리나라 국회에서 통과된 ‘구글 갑질 방지법’과 미국, 유럽 등에서 확산하고 있는 빅테크 플랫폼 반독점 강화 정책 등이 그 예다. 거대 플랫폼 기업의 행위가 공정한지에 대해 가르는 기준점이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8일 주례회동에서 “글로벌 플랫폼은 규모에 걸맞게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면서 “합리적 망 사용료 부과 문제와 함께 플랫폼과 제작업체 간 공정한 계약에 대해서도 총리께서 챙겨봐 달라”라고 주문했다. 향후 SK브로드밴드-넷플릭스 2심과 글로벌 플랫폼 기업에 대한 정책 향배가 주목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