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범 금융위원장이 가상자산 사업자의 자금세탁방지 심사가 은행이 해야할 일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중소 거래소들이 은행으로부터 실명계좌를 발급 받지 못해 원화거래가 불가능해진 것을 놓고 금융위가 은행에 책임을 떠넘겨 생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자 내놓은 입장이다. 고 위원장의 이번 발언을 놓고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해 문제의 핵심을 피해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 위원장은 지난 6일 국회 정무위원회 금융위 국정감사에서 "기본적으로 (고객의) 자금세탁 방지를 심사하는 것은 은행이 하는 일"이라며 "그것을 당국에 하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이는 더불어민주당 이정문 의원이 "중소 거래소들이 실명계좌 문턱을 넘지 못한 이유로 금융 당국이 자금세탁방지 책임을 은행에 떠넘긴 것을 꼽고 있고, 법조계 일각에서는 정부의 행정부작위에 의한 직무유기라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하자 내놓은 답변이다.
이어 이 의원은 "금융당국이 명확한 지침은 주지 않으면서 거래소에서 실명계좌 내줬다가 자금세탁범죄 터지면 은행에 책임을 묻겠다고 하니까, 은행 입장에서는 실명계좌 발급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지 않나"고 재차 따져 물었다.
이에 고 위원장은 "(가상자산 사업자의 자금세탁장지 의무는) 국제자금세탁방지 기구인 FATF에서 국제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지금 자금세탁 방지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곳은 은행"이라고 같은 입장을 반복했다.
지난 3월 개정된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에 따라 가상자산 사업자는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 은행 실명확인계좌, 자금세탁방지 시스템 등을 요건을 갖춰 FIU 신고해야 합법적으로 영업할 수 있다. 기존 사업자의 신고 마감일은 지난 25일이었다.
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 4개 업체는 은행 실명확인계좌까지 획득해, 원화 거래 지원이 가능한 원화마켓 거래소로 신고했지만, ISMS 인증만 보유한 나머지 25개 업체는 원화 거래를 중단하고 코인 간 거래만 가능한 코인마켓 거래소 전환해 신고했다.
이 의원은 이와 관련해 "중소거래소들이 (원화거래소로) 신고를 위해 실명계좌를 발급 받고자 여러 은행을 방문해서 심사만이라도 진행해 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끝내 실명계좌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관련 협회에서는 은행의 거부가 이어져서 거래소 줄폐업이 이어질 경우 투자자들 피해가 최대 10조에 이를 것으로 본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고 위원장의 이번 발언에 대해 전문가들은 원론적인 이야기로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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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열 한국자금세탁방지전문가 협회장은 "모든 금융회사는 자신의 고객이 자금세탁 위험이 있는지 점검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고객인 가상자산 거래소를 점검하는 게 은행의 일이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특금법 상 같은 금융기업 등으로 정의된 회사(은행)가 다른 회사(가상자산 거래소)를 심사하는 구조라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정부가 은행에 가상자산 사업자의 자금세탁방지 심사를 위탁했다고 처도 기준은 주고 심사를 맡겨야 하는데, 지금은 아무 기준도 없이 은행이 자율적으로 심사를 하라고 하는 것은 책임을 전가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