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거래소 줄폐업 위기..."은행에 사업자 검증 떠넘긴 정부 탓"

메인 거래소들도 '은행 실명확인 입출금 계정' 확인서 못받아 발동동

컴퓨팅입력 :2021/08/24 18:07    수정: 2021/08/25 09:13

가상자산(암호화폐) 사업자 신고 마감 기한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가 왔지만, 신고를 접수한 업체가 업비트 한 곳에 그치면서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줄폐업 우려가 현실화되는 분위기다.

그동안 안정권에 있다고 여겨졌던 메이저 거래소마저 신고 요건인 '은행 실명확인 입출금 계정(실명계좌) 확인서'를 받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정부가 가상자산 사업자에 대한 적격 검증을 은행에 떠넘겼을 때부터 예견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24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지난 20일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신고를 접수한 업비트를 빼면, 현재 신고 접수 준비를 완료한 업체는 한 곳도 없다.

지난 3월부터 시행된 개정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에 따라 가상자산 사업자는 법 시행 이후 6개월 이내인 오는 9월 24일까지 FIU에 신고를 완료해야 합법적으로 영업할 수 있다. 신고하지 않고 영업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가상자산 사업자 신고를 준비해 온 업체는 20개에 이른다. 주요 신고 요건 중 하나인 정보보호 관리체계 인증(ISMS)을 획득한 곳들이다. 하지만, 업비트를 제외한 모든 업체가 원화 거래 제공 시 요구되는 신고 요건인 '은행 실명계좌 확인서'를 확보하지 못해 신고 접수 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상자산 사업자 신고 기한을 한 달여 앞두고 사업자 줄폐업 우려가 커지고 있다.(이미지=픽사베이)

은행만 바라보고 있는 가상자산 거래소들

소위 4대 거래소에 포함되는 빗썸, 코인원, 코빗 등 메이저 업체들도 은행 실명계좌 확인서를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이들 거래소는 6개월 마다 계약을 갱신하면서 시중은행 실명계좌를 사용하고 있는데, 신고하려면 이와 별개로 은행 확인서를 받아 제출해야 한다. 확인서는 '가상자산 거래소가 자금세탁방지와 관련해 문제가 없으므로 실명확인 계좌를 내어준다'는 내용으로 일종의 보증서 역할을 한다.

문제는 은행이 가상자산 거래소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면서, 실명계좌 제공에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데 있다.

빗썸과 코인원에 실명계좌를 제공하고 있는 NH농협은행은 업체에 '트래블룰 도입' 전까지 코인 입출금을 막으라고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래블룰은 거래소 간 코인 이동 시, 자금세탁방지를 위해 거래 내역을 상호 공유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 거래소와도 거래 내역을 공유해야 하는 만큼, 국제 표준이 정해진 이후 도입하기 위해 금융위원회는 트래블룰 도입 시기를 내년 3월로 유예했다.

따라서 NH농협은행의 권고를 받아들일 경우 빗썸과 코인원은 트래블룰이 도입되기까지 최소 6개월 이상 회원들의 코인 입출금을 제한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코인 입출금을 막으면 가두리 시장이 형성되고 비정상적인 가격 올리기(펌핑)로 인한 이용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은행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실명계좌 확인서를 받지 못할 수도 있어 두 업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불똥은 코빗으로도 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업계에서는 실명계좌를 제공하고 있는 신한은행의 확인서 발급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를 놓고 "빗썸·코인원-NH농협은행 간 협상이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NH농협은행이 코인 입출금 제한을 권고하는 등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신한은행이 코빗에 쉽게 확인서를 내줄 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현재 실명계좌가 없는 중소 거래소들의 상황은 더 여려울 수 밖에 없다. 일부 거래소들이 지방은행이나 외국계은행과 협의를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계약이 임박한 상황은 아니라는 게 업계 전언이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줄폐업 현실화 되나

상황이 이렇다 보니 9월 24일 이후 몇 개 거래소가 원화 취급 거래소로 살아 남을 수 있을지 쉽게 가늠하기가 어려워졌다. 1~2개 업체만 남고 모두 정리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고개를 들고 있다.

실명계좌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원화를 취급하지 않고 코인 간 교환만 지원하는 방식의 C2C 거래소로 신고할 수도 있다. C2C 거래소로 신고하고, 차후 실명계좌를 확보해 원화 취급 거래소로 신고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국내 가상자산 투자자들이 원화 거래를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만큼, C2C 거래소가 원화 거래소와 경쟁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실명계좌 확인서를 확보하지 못해 원화 거래가 불가능한 곳은 시장에서 도태되는 수순을 밟고, 가상자산 거래소 줄폐업 우려가 현실화될 공산이 크다.

"은행이 거래소 검증? 특금법 시작부터 단추 잘못 끼웠다"...전문가 지적

전문가들은 애초 정부가 은행에 가상자산 사업자 자격 검증을 떠넘기는 구조로 특금법을 만든 것이 지금의 사달을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민간업체 간의 계약을 심사요건에 포함했는데, 국가가 해야할 심사 업무를 사실상 은행에 위탁해 버린 것"이라며 "가상자산 거래소가 자금세탁방지 여력이 있느냐를 심사하는 것은 국가의 몫인데, 제대로된 절차도 거치지 않고 심사 업무를 은행에 위탁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  "은행도 특금법 아래 감독을 받는 피감기관에 불과한테, 다른 피감기관의 적정성을 판단하라는 것 차제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업계에서도 정부의 공통된 기준 없이 개별 은행의 기준을 따라야 하니, 공정한 심사라고 보기 어렵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가상자산 거래소 관계자는 "은행의 개별 판단에 따라 심사 결과가 달라지면 공정한 신고 제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공통된 기준도 없이 신고를 하라고 하니 업체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관련기사

이에 가상자산 사업자 신고 마감을 미루고, 특금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가상자산 특별위원회 소속 윤창현, 조명희 의원이 관련해 특금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힘을 보탰다.

구 변호사는 "실명계좌를 신고요건이 아니라 신고 후 의무요건으로 만드는 게 보다 원활한 신고 프로세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며 "특금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인 만큼 시간을 벌기 위해 가상자산 사업자 신고 마감 기한을 미루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