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데이터시대다. 지금 우리는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등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4차산업혁명을 목도하고 있다. 인류가 문자와 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지난 5천년 동안 문명의 흐름이 지구촌 곳곳에서 큰 강을 이루고 이제는 모이는 바다에 이르렀다. 데이터가 원유가 되어 모든 것이 돌아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연재 시리즈는 '데이톨로지(Datalogy)' 사상의 연원(淵源)이다. 데이터에 대한 철학적, 인문학적, 과학적인 성찰의 결과라 봐도 좋을 것이다. (빅)데이터와 관련된 키워드를 중심으로 제4차산업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다양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적 탐구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번 연재글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이 가져 올 수 있는 잠재적 영향(hidden effects)에 대해 ‘데이비드 바커’ 가설을 재조명하며 위기 속에서 빛난 데이터분석의 힘을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지난 2014년 8월 세계적인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는 당시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던 산모들의 임신 중 식이요법이나 다이어트의 위험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육아' 및 '태아프로그래밍'에 대한 특집호를 발간했다.
“작게 나아서 크게 키우자”는 주변에서 하는 말처럼 자연출산을 조금 쉽게 하기 위한 임산부들의 다이어트와 임신 중 불어나는 체중으로 인한 산모의 스트레스가 장차 태어날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등에 관한 분석들이 포함됐는데, 임신 중 다이어트가 저체중아를 불러오고 출생 후 비만과 당뇨, 심장질환의 확률이 정상체중으로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높다는 결과 등이 ‘태아 프로그래밍' 이론을 중심으로 발표돼 주목을 받았다.
이 특집호 연구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필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지속되는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산모들이 겪게 되는 환경적 어려움과 스트레스로 인해 혹시나 태어날 아이들이 앞으로 성장하면서 어떤 건강상의 문제를 겪게 될까?
최근의 코로나19가 개인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이은환의 연구 “코로나19 세대, 정신건강 안녕한가”는 코로나19로 인한 국민들의 스트레스 수준은 3.7점으로 메르스 사태(2.7점)의 1.4배, 세월호 침몰로 받은 스트레스 지수(3.3점)를 상회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난 2년 전 코로나19 발병 이래 장기적이며 그 스트레스정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멘탈데믹(mentaldemic)’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그럼 ‘태아 프로그래밍’이론의 효시가 됐던 '데이비드 바커(David Baker)' 가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20세기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중의 임산모와 출생아 약 1만3천명 이상을 대상으로 다양한 실험과 추적 조사를 바탕으로 진행된 매우 획기적이며 광범위한 데이터 분석의 결과로서 제시됐다.
바커 연구팀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혹독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1930년대 초, 영국 내에서도 가장 빈곤한 지역인 웨일스에서 심장병 발병률이 가장 높게 나타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심장 질환은 비만과 운동 부족이 주요 원인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가장 식량공급이 열악한 지역에서 발병률이 높다는 사실은 매우 설명하기 힘들고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이 기간 동안 출산을 한 임신부와 출생아들에 대한 실증적 자료 분석과 추적 조사를 진행한 바커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작게 태어났다는 것은 임신한 여성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심장 질환의 원인을 임산부의 자궁 속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바커 가설(Barker Hypothesis)로 불리게 되며, 이후에 이뤄진 다양한 연구에서 비슷한 결과가 도출되며 ’태아 프로그래밍'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이론은 산모의 건강과 영양 상태, 그리고 겪게 되는 다양한 경험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 등이 출산 후 아이의 건강은 물론,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뇌졸중 등의 질환을 미리 프로그래밍 하게 되고, 일생에 걸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태아의 뱃속 환경이 불우했다면 태어난 이후의 세상도 힘들 것이라고 예측하여 그에 맞게 뇌와 신체 발달을 적응 시킨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였던 1944년 겨울동안에 독일군은 당시 네덜란드로 들어가는 모든 식량 공급을 철저히 차단했는데, ‘배고픈 겨울’이라 불린 이 기간 동안 무려 수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일어났었다. 테사 로즈붐(Tessa J. Roseboom) 박사는 ‘배고픈 겨울’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종단적 추적 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이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은 출생 당시 체중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임신기간 동안 충분히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하고 배고픔을 경험한 태아는 출산 후에도 굶주릴 것이라고 염려해서 열량을 지방세포에 계속 축적하게 만들어 성장하면서 비만, 고혈압, 당뇨, 심장 질환 등의 성인별 질병에 걸린 확률이 더 높음을 발견하게 된다.
국내 EBS에서 2013년에 제작한 ‘퍼팩트 베이비’라는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2차대전은 70년 전에 일어났지만, 그 때 태어난 사람들은 아직도 전쟁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얘기하는 로즈붐 박사의 인터뷰 장면은 필자에게도 오랜 여운이 남는다.
대표적인 성인질환중의 하나인 당뇨병의 발병원인도 ‘태아 프로그래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조사보고도 있다. 인간은 섭취한 음식을 곧바로 에너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포도당 형태로 변화시켜 사용한다. 이 포도당이 조직세포에 흡수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췌장에서 만들어지는 인슐린이다. 태아 기간 동안 췌장이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는다면, 아기는 췌장기능에서 문제가 발생되고 태어날 때부터 당뇨의 가능성을 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국내 질병통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당뇨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1980년~1990년대로 보고됐는데, 이런 당뇨병 환자의 대부분이 1940년대 해방이후 그리고 1950년대 6.25 전쟁으로 인해 매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출생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좀 더 최근으로 오면, 필자가 확인한 ‘보건의료 빅데이터 개방시스템’에 있는 국민관심질병통계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당뇨병 환차 추이에서 2015년이후 20대 당뇨병 진단수가 기존에 비해 더 빨리 늘어나고, 특히 20대 여성의 경우 30, 40대에 비해 환자수가 많아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1990년대 후반 IMF 금융위기 동안에 태어난 아이들이 20대가 되면서 나타난 변화로 인과론적 영향은 아닐지라도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결과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캐나다 맥길 대학교 수잔 킹(Suzanne King) 박사는 재난 상황에 태어난 아기들의 스트레스가 일생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는데, 1998년 1월 캐나다에 닥친 얼음 폭풍 시기에 임신한 여성들과 태어난 아이들을 15년에 걸쳐 추적 조사했다. 이 연구를 통해 임신 중 여성이 받은 스트레스가 클수록 아기의 출생 체중에도 영향을 미치며, 엄마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수록 그 아이가 5세가 되었을 때 체질량 지수와 비만 위험도가 커졌다고 밝혔다.
또한 엄마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태아는 건강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또래에 비해 평균적인 지능지수 또한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 놀라운 사실은 DNA 유전자의 변화에 있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산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PTSD에 걸릴 확률이 더 높게 나타났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PTSD를 앓고 있는 아버지에게 태어난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PTSD는 부모 둘 중 한 사람으로부터 유전 되는 것이 아니라, 임신 중, 자궁 속 환경에서 산모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기에게도 그대로 전달, PTSD에 걸릴 확률이 높은 아이로 태어나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지난 2001년 미국의 9.11 테러 사건이후 임신부들에 대한 많은 연구에서도 텔레비전에서 수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테러영상장면이 방송되면서 극심한 사회적 충격과 공포, 스트레스를 경험했고, 그 당시 조산과 미숙아 그리고 저체중아가 많았다고 한다. 임신한 여성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태어난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유전자의 기능이 정상아에 비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은 것도 보고되기도 했다.
올해 초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2020년 인구동향’ 데이터에 따르면 통계 작성을 시작한 1981년 이래 처음으로 한해의 출생아수가 30만 밑으로 떨어졌고(정확히는 27만2천400명), 연간 사망자수가 출생아수 보다도 많아 사상 처음으로 자연 인구감소가 시작된 해가 됐다. 이런 흐름은 올해도 계속되며 2021년 1분기 경우 작년에 비해 출생아수가 5%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어쩌면 코로나19라는 위기 분위기와 함께 감소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분명 전 세계는 과거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최근 들어 출산율이 저조하고, 출생아수도 줄고 있고, 고령임신이 늘어나고 저체중아 출산비율도 높아지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지난 2년간의 멈춘 ‘일상의 삶’과 코로나로 인한 두려움과 스트레스 등이 앞으로 우리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어떤 영향을 장기적으로 가져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지난 역사 속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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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나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적 위기가 주는 직접적 영향은 가시적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잠재적이고 누적적이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나타나는 숨은 부작용은 나중에 더 큰 위협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기도 한다.
20세기 초 세계전쟁중에 이루어진 데이비드 바커의 연구가 후대에 던진 메시지를 새삼 느끼며, 최근의 위기가 가져올 ‘히든 이펙트(Hidden Effects)'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과 고민이 지금부터라도 필요해 보인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