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에 갇힌 전문성과 IT의 횡단성

"IT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몰입하고 있는 전문성 위협할 것"

전문가 칼럼입력 :2021/06/01 10:26    수정: 2021/06/01 10:38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중세를 흔히 암흑의 터널이라고 이야기한다. 암흑의 터널이라는 표현은 아마 인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입장을 인간에서 신(또는 신을 대리한 인간?)으로 바꾸어 본다면 중세는 오히려 가장 빛나는 시대였을지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중세를 관장했던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신의 피조물일 뿐이며, 인간은 그 존재 이유를 자신이 아닌 신에게서 찾았다. 중세의 음악과 미술, 그리고 건축은 각각 신을 찬양하기 위해, 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그리고 신을 머무르게 하기 위해 시작됐고, 각각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 예술의 관심이 신에서 인간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시기를 우리는 르네상스라 부른다.

중세의 생산 관계는 동양과 서양 모두 농경이었지만, 그 생산물을 분배하는 지배 질서는 동양과 서양이 다소 달랐다. 중세의 동양이 다분히 중앙집권적 지배 질서를 추구했다면, 중세의 서양은 크고 작은 성(城)을 가진 왕이나 영주들이 중앙의 국왕과 적당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던 이른바 지방분권의 시대였다.

작은 나라에 후계자가 될 왕자가 많은 경우 문제가 생긴다. 영토를 분할해 상속하면 국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하는 한 왕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만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웃 나라 외동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처가의 왕국을 물려받아 공동 왕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자들은 공주가 한눈에 반할 수 있도록 현란한 말솜씨와 에티켓, 기사도를 몸에 배도록 수련해야 했다(박신영,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중에서).

성(城)에 갇힌 전문성과 IT의 횡단성(제공=모티링크)

영주의 착취가 아무리 심해도 피지배계급에게 성 안은 성 밖보다 훨씬 더 안전한 공간이었다. 인류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이자 저주는 바로 적응능력이다. 인류의 직접 조상인 사피엔스는 환경에 적응하고, 나아가 환경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가 됐다. 아무리 극심한 고통도 적응의 과정을 지나 익숙해지고 나면 견딜 수 있게 된다. 농노들은 반복되는 영주의 착취에서 특정한 패턴을 발견해 견뎠을 것이고, 영주 또한 농노들의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이변이 없는 한 굳이 착취를 위해 창의성을 발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 밖은 달랐다. 성 밖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도적떼와 맹수들이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불확실의 세계였다. 성안에 안주하지 않고 불확실의 세계인 성 밖을 모험하며 물자를 유통했던 사람들이 바로 부르주아지였다. '로버트 L. 하일브로너'와 '윌리엄 밀버그'는 ‘자본주의: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서 부르주아지는 중세의 모험가들이었다고 추켜세웠다.

역설로 이어진 전문성

중세에 신에게 의존했던 많은 것들을 지금 우리는 '인간' 전문가에게 위임한다. 신의 대리인인 왕이 했던 범죄의 유무를 지금은 독립된 헌법기관인 판사가 가린다.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무색하게도 정치는 정치인들만이 할 수 있는 섬세한 기술이 됐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노예가 맡았던 교육의 책임을 지금은 교육전문가인 교사가 맡고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해 역할과 권한, 그리고 부담스러운 책임까지 위임받은 '인간' 전문가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문성이 분화함에 따라 자신이 갖고 있는 전문성이 곧 자신의 밥그릇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밥그릇 지키기에 비전문가인 시민들은 대체로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 만약 시민이 상식에 기초해 전문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대부분의 전문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며 선을 긋는다.

교육은 오로지 교육의 관점에서, 경제는 오로지 시장의 관점, 정치는 오로지 정치의 관점에서 다른 체계들을 살핀다. 예컨대 정치 체계가 '민주시민의 소양을 충분히 양성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거나, 경제 체계가 '기업의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을 양산했다'고 비난할 때 교육의 반응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교육체계는 각 체계가 나름의 필요와 수요에 따라 다른 체계의 성과, 이 경우 교육적 성과를 수용하는 특성을 인정하기보다, 비교육적 기준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시도들이라 비난한다(전상진·김무경, ‘사회학의 위기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중에서).

전문성의 분야가 정치든, 경제든, 그리고 교육이든 모든 전문성에 위임한 '권한'과 그 권한과 함께 요구되는 '책임', 그리고 책임에 따른 '밥그릇'은 전문성을 구성하는 3요소라고 할 수 있다. 전문성의 분화, 그리고 분화된 전문성 안에서 수없이 많은 전문성들이 각개약진을 한 결과 마침내 인류는 생존을 위한 충분한 크기의 파이를 생산할 수 있게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를 계속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선해 보이는 의도'는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전문성을 부여하고 인정해 준 시민과 시대의 상식에 반하는 '악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성(城)에 갇힌 전문가와 IT의 횡단성

성(城)에 갇힌 전문성과 IT의 횡단성(제공=모티링크)

높고 단단한 성(城)은 사람을 보호하는 동시에 물자의 유통을 제한해 중세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안전장치로 작동했다. 그 단단했던 성에 균열을 낸 것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지였다. 11세기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동방에서 약탈한 다양한 문물이 서양으로 유입되는 시기였다. 물자를 유통하는 행위는 혈통에 의해 지배 권력을 행사했던 귀족이나, 귀족들의 전투력을 담당했던 기사, 또는 땀을 흘려 토지를 일구는 농노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었다. 그 역할은 중세 봉건주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었던 제3의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몫이었다.

이런 중세의 상황은 현재에 들어와 다시 유사하게 오버랩되고 있다. 중세의 내용물이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방에서 유입된 물자였다면, 지금의 내용물은 IT의 발달로 범람하고 있는 정보다. 하지만 자신이 구축한 전문성(城)의 보호를 받고 있는 전문가들은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마치 중세의 영주처럼 전문성(城)을 더 굳게 걸어 잠그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얼마 전 의대정원을 반대했던 의사집단에서 찾을 수 있다. 정보는 흐르는 물과 같다. 흐름이 막히면 어떤 정보는 고인 채 썩거나, 서로 다른 정보 간에 위상차가 발생해 다양한 분야에서 양극화를 초래한다. 모든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유는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다. 필자는 2017년 프랑스 니오르에서 열렸던 '사회적경제 연대 포럼'에 참석한 적이 있다. 포럼에 참석했던 많은 패널들은 입을 모아 전문성과 전문성을 잇는 횡단성이 필요하다고 주창했다.

IT는 정보를 더 많이, 더 빠르게 생산하고 흐르게 할 목적으로 진화해 왔다. IT에 기반한 SNS가 없었다면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한 아랍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장을 개방한 중국이 여전히 공산당의 중앙집권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IT를 강력한 정보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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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차오르면 마침내 높은 둑을 넘고, 종국에는 단단한 둑을 무너뜨리듯, IT가 지향하는 횡적인 힘은 장차 자신만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몰입하고 있는 전문성(城)을 위협할 것이다. 아니 그 위협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언젠가부터 전문성의 빗장은 내용에서 자격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판사는 시대의 보편적 상식을 이해하지 못하며, 정치인의 우선 순위는 훌륭한 정책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무적 판단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학교라는 성을 지키고 있던 교사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는 아이들의 요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중세를 무너뜨렸던 부르주아지처럼, IT는 성(城)에 갇힌 전문성에 균열을 내고 있는 횡단성으로 작동하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25년 이상 예술과 실무, 온라인과 오프라인, 민과 관을 넘나들며 콘텐츠 및 정책 기획자로 활동했다.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사회학 석사이며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의 저자이다. 경영의 과학화를 위한 사회학적 연구와 더불어 디지털 워크스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커넥티드 리모트워크(Connected Remote Work) 업무 환경의 구현을 위한 기획업무를 수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