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와 중국 통역사 불륜?…'관종의 늪'에 빠진 언론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인용의 근거와 신뢰성

데스크 칼럼입력 :2021/05/07 17:29    수정: 2021/05/08 15:26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빌 게이츠가 이혼한 건 미모의 중국 통역사 때문이다.”

인터넷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출처를 밝히고, 충실하게 전해줘야 할까? 아니면 무시해야 할까?

생뚱맞은 질문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뉴스를 보면서, 이 질문을 되새기게 됐다. 꽤 많은 매체들이 기사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일부 기사는 포털 메인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적지 않은 충격이다. 그래서 기사들을 꼼꼼하게 읽어봤다.

중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웨이보에 그런 글이 올라왔다는 내용이었다.

‘미모의 통역사’로 불린 셸리 왕은 어린 시절 미국 이민을 간 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는 전문 번역가라고 한다. 왕이 ‘의심’을 받게 된 건 게이츠재단에서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한 이력 때문이다.

(사진=데일리메일)

국내 언론들이 웨이보를 직접 취재해서 쓴 건 아닐 것이다. 찾아보니, 데일리메일을 비롯한 몇몇 가십 전문 매체가 진원지였다. 가십 매체들은 논란을 키운 뒤, 당사자인 셸리 왕이 해명하자, 그걸 또 다시 기사화했다. 이걸 국내 언론들이 받아쓰면서 널리 확산됐다. 

국제뉴스는 대부분 해외 매체를 인용보도한다. 그런 만큼, 해외 매체 인용 보도한 게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용을 할 때도 기준이 있다. 믿을만한 뉴스원인지를 꼭 따져봐야만 한다. 그건 국제뉴스를 쓰는 최소한의 기준이자 양식이다.

게이츠와 중국 통역사 간의 근거 없는 소문을 확대 재생산한 대표적인 매체는 영국 타블로이드 데일리메일이다. 그런데 데일리메일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각종 추문들을 전해주는 매체로 악명이 높다. 

지난 2017년엔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가 ‘믿을 수 없는 매체’라고 낙인을 찍기도 했다. 데일리메일은 참고 자료로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당시 위키피디아는 “데일리메일은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금지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때 이후 데일리메일은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서는 각종 설명의 근거자료로 쓰지 못하게 됐다.

국내 언론은 또 폭스뉴스도 많이 인용했다. 폭스뉴스 역시 음모론과 근거 미약한 추문을 자주 보도해 신뢰성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

정리해보자. 중국 웨이보에서 네티즌들이 의혹을 제기한다. 이걸 해외 타블로이드가 받아서 쟁점을 만든다. 그러자 당사자가 “아니다”고 해명한다. 이걸 타블로이드들이 또 받아쓴다.

관련기사

이런 과정을 국내 언론들이 충실하게 보도하면서 엉뚱한 추문이 확산됐다. 인용의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뻔히 알면서 호들갑을 뜬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때문일까? 느닷없이 확산된 빌 게이츠와 중국 통역사의 엉뚱한 소문 기사들을 접하면서, 씁쓸한 기분을 금할 수 없었다. ‘관종의 늪’에 빠진 우리 언론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는 듯 해서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