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반도체 공방, 21세기 영토전쟁이다

공급망 막자 합병방해 맞불…세력다툼 계속될듯

컴퓨팅입력 :2021/04/09 16:01    수정: 2021/04/10 22:47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미국과 중국 간의 반도체 전쟁이 심상치 않게 진행되고 있다. 한쪽이 반도체 공급망을 차단하자 다른 쪽에선 합병을 연이어 무산시키면서 맞불을 놓고 있다.

그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 것이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의 일본 반도체업체 고쿠사이 합병 무산 건이다.

어플라이드는 지난 3월 일본 반도체 업체 고쿠사이 인수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회사 인수 합병이 체결된 것은 2019년 7월이었다. 처음엔 인수 가격이 22억 달러였다. 하지만 합병 승인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가격이 더 뛰었다. 결국 지난 1월 인수가격을 35억 달러(약 3조9천700억원)로 올렸다. 

(사진=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하지만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서 결국 인수가 무산됐다. 합병을 통해 세력 확장을 꾀했던 어플라이드는 KKR에 1억5400만달러 위약금만 물게 됐다. KKR은 2017년 히타치로부터 고쿠사이를 2500억엔(약 2조5839억원)에 사들였다.

■ 미국 반도체 회사들의 확장 전략 가로막는 중국의 속내  

거대 반도체 기업 합병이 중국 정부의 반대 때문에 무산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글로벌 1위 통신 칩 업체 퀄컴도 2018년 네덜란드 차량용 반도체 기업 NXP 인수·합병(M&A)도 중국의 승인 거부로 결국 포기했다.

최근 낸드플래시 업계 2위인 일본 키옥시아(옛 도시바)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마이크론 역시 중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기 힘들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어플라이드와 고쿠사이 간의 합병 무산 이후 니온게이자이신문은 “미국 정부의 수출 규제 때문에 중국 정부가 합병 승인을 내주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고쿠사이가 미국 업체인 어플라이드에 넘어갈 경우 중국 기업들의 반도체 조달에 차질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물론 니혼게이자이의 분석이 틀린 건 아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은 한치 양보 없는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 제재로 중국 기술기업들은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 한 때 스마트폰 시장 1위를 노렸던 화웨이는 안드로이드를 비롯한 핵심 기술 공급이 끊기면서 순위 경쟁에서 밀려났다. 

중국 정부가 미국 기업들의 합병에 계속 딴죽을 거는 건 분명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규제에 대한 대응이란 관점만으론 설명하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다. 

또 다른 미국 반도체 기업인 마벨 테크놀로지가 인파이(Inphi)를 100억 달러에 인수하는 계약은 별 말 없이 승인했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최근 보여주고 있는 미국 반도체 합병 견제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2015년 발표된 '중국제조 2025'다. 

중국은 '중국제조 2025'를 통해 사실상 반도체 독립을 선언했다. 물론 독립 대상은 미국이다. 따라서 지금 중국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반도체 독립전쟁'의 일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중국 정부가 어플라이드와 고쿠사이 합병 승인을 사실상 거부한 것 역시 이런 기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 '중국제조 2025' 나오면서 미국과 갈등 시작 

그래서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을 살펴보기 위해선 시간을 2015년으로 되돌려야 한다. 

리커창 중국 총리는 그 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국제조2025’ 정책을 발표했다. 차세대 정보기술, 로봇, 신소재, 바이오 등 10대 핵심산업 국산화율을 2025년까지 70%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핵심계획이었다. 이 계획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반도체다.

그 무렵 미국에선 오바마의 뒤를 이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중국과 무역전쟁에 돌입했다. 특히 첨단산업 분야에 대한 대대적인 견제에 착수했다. 

물론 트럼프 특유의 '장사꾼 기질'에서 출발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제조 2025'에서 시작된 중국의 반란을 빼놓고는 트럼프의 대중국 강경정책을 설명하기 힘들다.

첨단산업 분야에서 무섭게 추격해오고 있는 중국의 기세를 그대로 놔둘 경우 21세기 패권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이런 배경을 깔고 바라보면 두 나라 간의 최근 경쟁 상황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반도체는 21세기 디지털 영토전쟁의 핵심 축이다. 반도체를 지배하는 쪽이 디지털산업의 지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반도체 시장의 지배자는 미국이었다. 전 세계 15대 반도체 기업 중 8개가 미국 기업이다. 시장 1위 역시 미국 기업인 인텔이다.

반면 중국 기업들은 15대 반도체 기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파운드리 분야도 마찬가지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인 SMIC는 전체 5위에 머물러 있다.

기술력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업체인 대만 TSMC는 3나노 제작 공정 개발에서 한 발 앞서가고 있다. 2025년에는 2나노 칩을 내놓을 계획이다.

반면 중국 최대 파운드리인 SMIC는 2019년말에야 겨우 14나노 생산을 시작했다. 미국 경쟁업체들에 비해 최소 2세대 정도 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중국의 도전에 미국도 '반도체 공급망 확충' 맞대응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국 정부는 ‘반도체 독립’을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첫 신호탄이 미국을 긴장시킨 ‘중국 제조2025’다.

이후에도 반도체 관련 정책을 속속 내놓고 있다. 중국 최고 행정기관인 국무원은 2019년 30%인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웨이 샤오준 중국 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지난 해 세계반도체 컨퍼런스에서 현재 중국 반도체 산업이 직면한 상황을 그대로 털어놨다.

당시 그는 “중국은 세계 최대 반도체 수입국이다”면서 “2012년 이후 연간 반도체 수입 규모가 2천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그는 또 “2019년과 2019년엔 반도체 수입규모가 3천억 달러를 웃돌았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간 반도체 갈등은 '중국제조 2025'가 시발점이 됐다.

이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중국 칩 제조업체들은 최근 20년 동안 약 500억 달러 가량의 정부 보조금을 받았다.

이런 투자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기술격차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미국이 2017년부터 대중국 압박 강도를 높임에 따라 운신의 폭이 더 좁아진 상태다.

중국이 최근 14차 5개년계획을 발표하면서 “과학, 기술혁신 등에 많이 투자하는 것 못지않게 미국의 압력에 대응할 전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밝힌 것도 이런 고민을 담은 것이다.

중국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2030년까지 전 세계 반도체 생산 점유율 1위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1천 억 달러 가량의 정부 보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미국 역시 지금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중국제조 2025’부터 시작된 중국의 반도체 독립 행보를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대 반도체 수입국의 자급 선언은 미국에겐 직격탄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보스턴 컨설팅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가 지난 해 9월 공동 발표한 ‘정부 인센티브와 미국의 반도체 제조 경쟁력’ 보고서에 이런 고민이 그대로 담겨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를 비롯한 4개 분야에 대한 공급망을 검토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ZDNet)

보고서는 “세계 반도체 시장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세계 반도체 매출의 48%를 점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중 미국 내 공장의 점유율은 12% 불과하다. 1990년 37%에서 크게 줄어든 것이다. 아시아지역 공장의 점유율은 70%에 이른다.

미국으로선 자국 내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늘려나가야만 한다. 보스턴 컨설팅 보고서는 이런 목표 달성을 위해 미국 정부가 반도체 제조 분야에 강력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지난 1월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를 비롯해 전기차배터리, 희토류, 의약품 등 4개 산업분야 공급망 점검에 초점을 맞춘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도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 중국, 반도체 독립운동에 걸림돌 되는 모든 거래 거부할 수도 

이게 현재 미국과 중국이 직면한 상황이다. 중국 정부가 어플라이드와 고쿠사이 반도체의 합병에 ‘승인’ 도장을 찍어주지 않은 것이 미국의 제재에 대한 반격이라고 보는 것은 현 상황을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최대 과제는 '반도체 독립'이다. 그게 ‘중국 제조 2025’부터 일관되게 유지해 온 입장이다. 어플라이드가 일본업체 고쿠사이를 인수해 반도체 핵심 장비인 건식 공정용 저압 화학 기상증착(LPCVD) 분야 점유율 2위 업체로 뛰어드는 것이 달가울 리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리커창 총리가 지난 3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개막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뉴스1)

중국의 당면 목표는 단순히 미국의 제재에 대응해 힘겨루기 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0%를 달성하고, 2030년에는 점유율 1위를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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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의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국 반도체 업체다. 특히 미국 업체들이 해외 기업들을 인수하면서 반도체 시장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는 것은 중국 정부가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다.

그렇기 때문에 당분간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인수 합병에 대해선 중국 정부가 강하게 브레이크를 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황이 이런 만큼 낸드플래시 업계 2위인 일본 키옥시아 인수를 노리는 마이크론 역시 비슷한 좌절을 경험할 것으로 관측된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