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가 꼭 필요한 이유

"IT가 디지털-아날로그 결합해 정보를 균형감 있게 구조화시켜야”

전문가 칼럼입력 :2021/04/06 13:43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개념을 분리(separate)해 인식하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특별한 능력 중 하나다. 자연과 한 덩어리로 존재했던 인간은 이성을 갖게 되면서 자연으로부터 분리됐다. 분리를 통해 자연을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 인간은 객관으로 존재하는 자연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분류(categorize)를 시작한다.

인간은 자연을 생명의 유무를 기준으로 생물과 무생물로, 다시 생물을 운동성과 세포벽의 유무 차이를 기준으로 동물과 식물로, 그리고 그 각각을 다시 종-속-과-목-강-문-계-역으로 분류하며 적극적으로 자연을 이해해 왔다.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분리 능력으로 이제 인간 스스로를 인종과 성, 나이 등으로 분리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분리는 객관을 대상으로 하는 분류와는 다른 개념으로, 차라리 분열(division)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문명은 이렇게 분리, 분류, 분열을 통해 발전해 왔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이 분리의 능력으로 미시(micro)에 접근할수록 세상은 걷잡을 수 없이 거대(macro)해지고 있다.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박사는 자신의 분야에서만 뛰어날 뿐이다. 그래서 필자가 만나본 대부분의 박사는 다른 분야에 대한 자신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무지를 쉽게 인정한다. 그러한 인정이 보편화된다면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의 박사(博士)는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심사(深士)라고 불러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기억과 기록의 차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제공=모티링크)

정보의 팽창을 주도하고 있는 IT의 진보는 점점 인간을 코끼리 앞에 놓인 장님 신세로 만들고 있다. 장님이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경험에 다른 장님의 경험을 통합해 사고하는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만진 부분이 코끼리의 전부라고 주장한다면 코끼리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을까? 분리든, 분류든, 아니면 분열이든 그것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의 ‘통합적 인지’를 전제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디지털의 등장

아날로그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디지털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물리량'을 표현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정보를 기록하는 데 한계에 다다르자 '0과 1의 조합으로 모든 정보를 처리'하는 디지털이 등장하게 됐다. 예를 들어 인간의 감정이 '좋다'에서 '싫다'로 이동할 때 아날로그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연속적으로 표현하지만, 디지털은 단지 좋다와 싫다로 처리해 기록한다. 물론 필요하다면 디지털도 좋다와 싫다 사이를 더 정교하게 세분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미지의 해상도를 아무리 높여도 결국 디지털 이미지는 픽셀이라는 최소 단위의 조합일 뿐이다. 그래서 픽셀 조각이 튀거나, 선이나 도형의 가장자리가 우둘투둘하고 날카로워지는 계단 현상(Aliasing)을 해결하기 위해 디지털은 Anti-Aliasing이라는 기술을 적용한다. Anti-Aliasing은 튀는 픽셀 조각을 더 작은 픽셀로 뭉개 연속적인 선으로 인식하게 하는 이를테면 디지털식 속임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가청 주파수는 20Hz에서 20,000Hz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디지털 음반인 CD는 음악을 44,000Hz로 녹음한다. 인간이 20Hz에서 20,000Hz 사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연속된 신호를 포함한다는 의미다. 즉 디지털은 연속된 신호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정교하게 샘플링을 하는 것이다. 스웨덴의 전자공학자 해리 나이퀴스트(Harry Nyquist)는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변환할 때 최소 2배 이상의 주파수로 샘플링을 해야 손실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즉, 디지털 기술은 디지털로 표현되는 모든 결과물을 인간으로 하여금 아날로그적으로 인식하게 하기 위해 발전해 온 것이다. 과거 오락실에서 했던 갤러그 같은 아케이드 게임과 최근에 PC방에서 하는 롤플레이 게임(RPG)을 비교해 보면 그동안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재현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 왔는지 알 수 있다. 만약 인류가 모든 정보를 아날로그로 기록해 왔다면 지구는 쓰레기보다 아날로그로 표현된 정보를 기록하고 관리하는데 더 골머리를 앓았을지도 모른다.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완벽하게 재현할 때 완성된다?

필자가 페이스북, 유튜브, 브런치 등에서 자주 사용하는 아이디는 back2analog(아날로그로 돌아가자?)이다. 어느 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back to the future’를 패러디해 만들었다.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꽤 유용한 마케팅 수단이 되기도 한다. 2001년 이전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극장가를 점령했던 영화 ‘친구’는 70, 80년대 학창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 대박을 터뜨렸다. 지상파 채널인 tvN은 ‘응답하라 시리즈’로 레트로 열풍을 일으키며 공중파가 주도하던 드라마 시장을 점령했다. 1986년을 기점으로 CD에 밀리기 시작해 시장에서 사라졌던 LP는 몇 년 전 영국에서 차트가 부활하더니 급기야 작년엔 미국에서 2천754만 장이 팔리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기세다.

디지털은 아날로그가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됐고, 그 결과 아날로그 시절에 겪었던 많은 불편이 해소됐다. 디지털이 제공하는 대표적인 편익은 기록과 검색이다. 아날로그 시절에는 필요가 없어진 정보를 그때그때 폐기했다. 만약 그 정보가 훗날 추억이라는 달달한 가치로 되살아난다고 하더라도 그저 왜곡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달달하게 느끼는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아날로그 시대엔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그나마 폐기되지 않은 정보와 정보 사이를 무작정 뒤져야 했다. 필자는 글에 인용할 구절 하나를 찾기 위해 몇 권의 책을 통째로 다시 읽었던 경험이 꽤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검색의 편의성 때문에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디지털이 세상을 편리하게 지배하게 되자 사람들은 고약하게도 아날로그 시절에 느꼈던 그 불편함을 인간적이고 따뜻한 무엇인가로 포장해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왔는데, 그 숨겨진 목표가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기 위함이라니…

IT, 디지털과 아날로그 콜라보 지원해야

IT는 의미 있는 정보만을 골라 효율적으로 샘플링하는 디지털 기술에 기반해 폭발적으로 진화했다. 그 결과 우리는 손톱만 한 크기의 USB 저장 장치에 수백 편의 영화와 그보다 더 많은 음악, 그림, 책 등을 담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앞서 1부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동기화가 오히려 비동기 커뮤니케이션의 창궐로 이어졌다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디지털 기술의 진보로 인한 정보의 범람은 정보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하락시켰다. 지금은 수천억을 투자해 만든 영화도 어둠의 경로를 잘만 이용하면 공짜로 볼 수 있는 시대다. 모든 콘텐츠를 디지털로 소비, 공유하는 시대에 많은 예술가나 창작자들은 자신의 지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뛰어난 외모와 실력을 갖춘 아이돌 가수들은 자신의 창작물인 음악이 아니라 그 포장지(예능이나 유튜브를 통한 광고, 그리고 구쯔 등)로 수입을 창출하는 전략을 선택했지만, 그러한 방식은 승자독식의 양극화를 부추겨 장차 디지털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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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모든 소비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 더 정교한 보안 기술에 투자하는 것은 그리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열 명의 포졸이 도둑 하나를 못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태생적 한계로 인해 디지털의 그물을 아무리 촘촘하게 짜더라도 완벽하게 Aliasing(계단 효과)을 막을 수는 없다. 디지털은 그 한계를 감추기 위해 더 촘촘해지기를 선택하기보다 차라리 그 한계를 인정하고 아날로그를 통해 보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넷플릭스에 이어 애플이나 어도비 등이 비연속적 구매에 의존하던 디지털 콘텐츠의 판매를 구독이라고 하는 연속적 행위로 전환한 전략은 -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 아날로그의 방식을 디지털에 접목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IT는 디지털 기술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IT가 곧 디지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정보를 구성하는 입자라면, IT는 정보의 입자들을 어떻게 구조화할지와 관련한 영역을 담당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콜라보를 통해 정보를 균형감 있게 구조화시켜야 하는 것은 IT가 지향해야 할 또 하나의 목표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25년 이상 예술과 실무, 온라인과 오프라인, 민과 관을 넘나들며 콘텐츠 및 정책 기획자로 활동했다.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사회학 석사이며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의 저자이다. 경영의 과학화를 위한 사회학적 연구와 더불어 디지털 워크스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커넥티드 리모트워크(Connected Remote Work) 업무 환경의 구현을 위한 기획업무를 수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