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방송정보통신정책의 ‘결정적 시기’

방송/통신입력 :2021/03/29 07:30    수정: 2024/02/26 13:53

고삼석 동국대 석좌교수

발달심리학의 연구결과를 보면 연령에 따라 인간의 IQ와 언어능력의 발달 정도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모든 일에는 ‘적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시점을 잘 포착해 적기에 적절한 교육을 진행한다면 커다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반대로 그 시기를 놓치면 뒷날 큰 비용을 치르거나 영원히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여기서 인간의 성숙단계에 맞춰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시기야말로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적 시기’다.

성격이 다른 문제지만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의 정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적시에, 적절한 정책 대응으로 초기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시점과 그 대응방안이 상호 부조화할 경우 말 그대로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된다. 엄청난 비용의 발생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정책을 ‘타이밍(Timing)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능정보화의 혁명 물결에 이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산업의 확산 등 예상치 못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디지털 뉴딜 정책의 추진으로 경제·사회 전 분야의 디지털 전환 등 인류사적 대전환기에 진입하고 있다. 특히 미디어와 정보통신 분야의 변화는 폭과 깊이와 속도가 다른 분야와 비교 불가능할 정도다. 지상파방송, 케이블TV 같은 레거시 미디어의 쇠락과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OTT)로 대표되는 온라인 기반 플랫폼의 폭풍 성장이 상징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고삼석 동국대 석좌교수

다음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1년도 남지 않았다. 서울과 부산의 단체장 보궐선거는 눈앞으로 다가왔다. 보궐선거 이후 대선 정국이 본격 시작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임기 마무리와 새 정부의 등장 시점이 공교롭게 미디어 및 정보통신 분야의 대격변기와 맞물려 있다.

요즘 미디어와 정보통신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정부 조직들이 새로운 정책을 수립·추진하기 보다는 기존 정책의 현상유지나 마무리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니면 항상 그랬듯이 조직의 권한을 확대하려는 영역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에 시장에서는 레거시 미디어의 혁신과 신산업의 육성에 필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해야 하는 ‘결정적 시기’를 놓치고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산업 생태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시기에 1~2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지금 적절한 정책적 판단과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차기 정부 초기까지 정책결정이 지연되고 그로 인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미래를 잃어버릴 수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미디어 시장이다. 지난 20년 동안 지상파방송에서 케이블TV로, 다시 IPTV로, 그리고 지금은 OTT로 시장의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 법규와 정책은 여전히 레거시 미디어사업자 중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시장에서 힘을 잃어가는 지상파방송사업자에 대한 강한 규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반면, 신흥 강자로 부상한 OTT사업자 관련 정책은 규제든, 진흥이든 논의만 무성할 뿐 실효성 있는 대책은 부재한 상태다. 시장 행위자들 입장에서 정책의 불투명성은 최고의 위험(Risk) 요인이다.

최근 한국방송학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방송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매체 규제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방송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매체에 따라 공적 책무 부과와 성과평가 기준도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방송 정책 기조는 ‘공영방송은 공영답게, 민영방송은 민영답게’라는 표현으로 압축할 수 있다. 먼저 정책기조대로 지상파방송사의 규제체계를 전면 개편하고, 수신료와 방송광고 제도 등 재원문제, 그리고 공영방송사의 지배구조 문제도 함께 혹은 순차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진영 논리에 갇혀서 해결이 불가능한 이슈보다는 이견이 적은 사안부터 풀면 된다. 주무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는 정부 출범 전후로 수없이 많은 연구와 논의를 통해 관련 법안과 정책을 수립해 놓은 상태다. 지금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정책에 대한 또 다른 토론과 검토가 아니라 결정과 실행이다. 다음 정부로 넘겨야 할 이유가 없다.

미디어 시장의 ‘게임체인저’(Game Changer)로 급부상하고 있는 OTT 관련 정책도 정부가 실기한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공동 후원하는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 진흥포럼’이 출범했다. 지난해 6월 정부가 발표한 ‘디지털 미디어 생태계 발전방안’ 후속 조치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OTT를 중심으로 미디어와 콘텐츠 시장이 급변하고 있는 때에, 정책발표 후 9개월이 지난 시점에 업계관계자들을 대규모로 참여시킨 ‘공론의 장’을 새롭게 띄운 것은 생뚱맞다. OTT 관련 부처의 ‘영역 지키기’를 고려한 세 결집 및 과시용 포럼 만들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시장의 반응도 다르지 않다.

전 세계 OTT 가입자가 10억명을 돌파했다. 넷플릭스 국내 이용자는 월 기준으로 1천만명을 넘어섰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거대 글로벌 OTT 기업들을 직접 규제하고, 토종 OTT 기업을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육성할 수 있는 ‘적기’는 이미 지난 것 같다. 한류가 글로벌 트렌드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랬듯이 국내 OTT 기업들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정부는 규제 신설을 자제하고, 콘텐츠 분야 R&D와 국내외 유통 인프라 구축, 인력양성과 같은 간접적인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현실은 정부가 각종 OTT 규제 도입에 앞장서면서 오히려 “글로벌 OTT 기업의 안방 장악을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문화산업 육성 정책의 기조였던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마라’, ‘지원할 수 없다면 풀어주라’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책 당국자들이 한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지상파방송이나 OTT 정책과 달리 최근 급성장한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정부 규제는 너무 성급하게 느껴진다. ‘온라인 플랫폼 중개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하 ‘온플법’) 제정을 주도하고 있는 공정거래위원회는 올해 상반기까지 국회 의결을 목표로 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공정위는 법이 시행되더라도 시행령을 통해 규제 대상을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온라인 플랫폼업계를 중심으로 시장에서는 규제의 속성 상 한번 도입되면 대상과 적용되는 시장행위의 범위가 계속 확대될 것을 걱정한다. 특히 정작 규제해야 할 거대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은 규제를 피해가고, 성장기에 있는 국내 기업들만 이중 삼중으로 규제하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될 것을 가장 염려하고 있다.

공정위는 온플법 입법과 함께 소비자의 권익 증진 및 피해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반면에 방통위는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 이용사업자, 최종 이용자를 단일 규제체계로 포함하는 ‘온라인 플랫폼 이용자보호법’을 의원입법 형태로 추진하고 있다. 온플법이든, 이용자보호법이든 온라인 플랫폼업계는 규제의 강화로 인식하고 있다. 동시에 공정위와 방통위 간 갈등은 공정경쟁과 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하지만, 결국은 업무 관할권을 확보하기 위한 ‘부처 이기주의’가 발동한 것으로 본다.

대표적인 온라인 플랫폼인 온라인 쇼핑몰의 거래 규모를 보면, 지난 2010년 25조2천억원에서 2020년 161조1천억원으로 6.4배 정도 급성장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전자상거래 시장규모는 2022년 200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플랫폼 시장의 급성장에 맞게 입점업체 보호를 위한 공정거래질서 확립, 최종 이용자 보호를 위한 제도 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시장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관련 업계의 충분한 의견수렴, 그리고 유관 부처 간 조율 없이 성급하게 입법을 추진하는 것은 오히려 시장의 역동성을 위축시키고, 기업의 혁신 의지를 꺾으며, 정부의 혁신성장 정책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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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인터넷 분야에서 고질적인 국내외 업체 간 ‘역차별 이슈’가 명확한 해법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서 규제의 신설은 국내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에게 ‘족쇄’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정부와 국회는 규제 폐지가 신설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규제 도입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적용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중요한 작업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해서는 안 된다.

시장의 변화는 매 순간 일어난다. 문제는 정부의 정책 대응이다. 규제라는 채찍과 지원이라는 당근을 양손에 들고 있기 때문에 경제와 사회 전 분야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시장의 힘이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지만, 정부 정책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미디어와 정보통신 분야의 격변기에 들어선 지금 정부가 결단을 내려야 할 ‘결정적 시기’를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부의 실패’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