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주력 3사가 8일 금융감독원 조회공시를 통해 “애플과 자율주행차량 개발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밝히자 자율주행차량이 아닌 순수 전기차에 전념해 협력할 수 있다는 관측이 증권가 등을 통해 제기됐다.
증권가의 관측은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 애플이 주행보조(ADAS) 기술 개발에 중점을 둔 전기차 개발을 마친 후, 완전 자율주행 전기차를 개발하는 순차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다. 테슬라처럼 사전에 차량을 출시한 후, 소프트웨어(SW) 업데이트를 통해 차량 내부에 있는 주행보조 기술을 완전 자율주행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관측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
그동안 애플은 자율주행 가능한 차량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타이탄(Titan)’이라고 불리는 애플 내부 자동차 관련 프로젝트도 일반 전기차가 아닌 완전 자율주행 전기차 개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이 완전 자율주행차가 아닌 일반 전기차 수준의 ‘애플카’를 만들면 테슬라 등 다른 완성차 업체와의 차별화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팀 쿡 애플 CEO가 애플 신제품 관련 이벤트에서 자주 사용하는 문장인 ‘한 가지 더(One More Thing)’ 전략이 제대로 통하려면 차별화된 완전 자율주행 기술이 필요하다.
그동안 현대차그룹은 미래차 산업 역량 강화를 위한 주도적인 자리에 섰다. 정의선 회장과 지영조 전략기술본부장 사장은 코로나19 시대 이전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국내외 업체와 자율주행차, 전기차, 수소전기차, 고성능차 협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엔 애플도 향후 미래차 전략 강화를 위한 핵심 파트너로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이 생각이 현실화하려면, 현대차에도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애플이 혁신 기술 없이 단순한 전기차 개발을 현대차그룹에 요청하면, 현대차그룹은 애플 하청업체로 전락할 우려가 더 커질 수 있다. 제대로 된 명분이 없으면 현대차그룹이나 애플에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애플이 전기차 개발을 진정 원한다면, 자체적으로 안전한 전기차 개발을 위한 연구 과제를 수립해야 한다. 이 과제가 현재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애플이 현대차그룹의 E-GMP 전기차 플랫폼을 사용하기 원한다 해도, 아직 해당 플랫폼을 탑재한 전기차가 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 고민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아직 대외적인 안전성 입증이 되지 않은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업계 전문가들은 공통으로 “현대차그룹과 애플과의 협의 과정은 완전 결렬된 것이 아니라 중단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현대차그룹과 애플이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면, 가장 빠르게 현실화할 수 있는 사업은 차량용 OS 분야다.
양사는 지난 2015년 현대차 쏘나타에 대중형 세단으로는 처음으로 애플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카플레이(CarPlay)를 탑재했다. 이후 다양한 자동차 브랜드가 빠른 속도로 카플레이 적용을 확대했다.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융합할 수 있는 좋은 선례를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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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플레이는 해가 지나면서 멀티태스킹 가능한 차량용 인포테인먼트로 진화했다. 하나의 화면에서 지도를 보면서 날짜별 중요 이벤트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또 선 연결 없이 카플레이를 쓸 수 있는 시대도 열렸다.
애플의 다음 과제는 아이폰 없이 카플레이를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이다. 구글과 포드 등은 신차에 안드로이드 OS가 구동되는 협약을 마쳤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IT업계와 자동차 업계 간 합종연횡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현대차그룹과 애플이 이 같은 트렌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히 논의하고 협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