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블록체인 산업은 암호화폐 대장주인 비트코인이 대체 투자자산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장을 했다. 세계 통화 당국이 코로나19 발 경제 위기를 넘기 위해 시장에 돈을 풀면서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것이 비트코인을 대체 투자자산으로 재평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페이팔, 스퀘어 같은 인기 핀테크 업체와 전통 금융권의 자산운용사들이 비트코인 투자 영역에 뛰어들면서 판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
반면, 블록체인 서비스 측면에서 보면 올해가 대중화의 원년이 될 것이라던 연초 기대에 부흥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페이스북, 삼성전자, 카카오, 라인 등 자금력과 이용자 기반을 갖춘 대기업들이 블록체인 서비스 대중화를 이끌 것이란 기대가 높았지만, 규제 벽에 막혀 쉽게 사업을 펼치지 못했다.
블록체인 암호화폐 산업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적절한 법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커졌다.
비트코인, 대체 투자자산으로 자리매김
올해 비트코인은 코로나19 사태가 촉발한 경제 위기를 지나면서 확실한 대체 투자자산으로 부상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가격 변동성이 큰 투기성 자산으로 치부됐지만, 올해는 경제 위기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재평가 받았다.
올해 초부터 세계 각국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제로금리를 유지하고 양적완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돈 줄이 풀려 시장에 유통되는 통화가 많아지면, 화폐 가치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디지털 금'으로 비유되는 비트코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비트코인은 발행량이 2천100만 개로 정해져 있어, 금처럼 안전자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진 것이다.
실제 기업과 기관투자자들이 투자 환경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비트코인 투자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기업용 소프트웨어(SW) 업체 마이크로스트레티지다. 회사는 올해 약 1조2천500억원을 투입해 비트코인 7만470개를 매수했다. 마이클 셰일러 마이크로스트레티지 CEO는 비트코인 투자에 대해 "비트코인을 신뢰할 수 있는 가치 저장소이자, 장기적으로 현금 보유 보다 가치 상승 잠재력이 있는 매력적인 투자 자산이라고 보는 우리의 믿음이 반영된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자산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이 운영하는 비트코인 신탁 상품은 기관투자자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하면서 17조6천억원 규모로 커졌다. 미국 생명보험사 '매스뮤추얼', 헤지펀드 '스카이브릿지캐피탈'도 각각 1천100억원, 275억원 규모의 비트코인을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록체인 투자사 해시드의 김서준 대표는 최근 한 온라인 세미나를 통해 "위험 대비 수익률을 나타내는 샤프비율을 보면 비트코인이 금이나 주식보다 더 안정적으로 수익률을 거둬왔다"며 "최근 비트코인을 투자 포트폴리오에 포함시킬 때 샤프비율이 높아진다는 분석에 따라 비트코인에 관심을 두는 기관투자자들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핀테크 업체 페이팔과 스퀘어가 간편결제 앱을 통해 비트코인 매매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개인투자자들이 비트코인에 쉽게 투자할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됐다. 최근 핀테라캐피탈이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페이팔과 스퀘어에서 매일 800~900개의 비트코인 매입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채굴을 통해 새롭게 시장에 유입되는 비트코인을 거의 100%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비트코인 가격은 1월 약 840만원에서 12월 말 현재 3천100만원으로 1년 새 무려 270% 이상 상승했다. 올해 내내 완만한 상승 흐름을 보였고, 지난달 18일 3년 만에 2천만원 대에 진입한 후부터 상승세에 가속이 붙었다. 이후 사상처음으로 3천만원 대 진입하기 까지 단 40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갈길 먼 블록체인 서비스 대중화...규제 리스크가 발목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한 투자 시장을 제외하면 국내외 블록체인 산업 전반은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에 이어 사업을 접거나 사실상 개점휴업 중인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이 속출했다. 또, 블록체인 서비스 대중화를 이끌 것으로 기대를 모은 대기업들도 이렇다할 성과 없이 한 해를 마무리했다.
올해 2월에는 비디오 스트리밍 업체 왓챠가 자체 블록체인 프로젝트 '콘텐츠프로토콜' 사업을 중단한다고 밝혀, 업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콘텐츠프로토콜은 기존 왓챠 서비스 위에 블록체인을 접목한 사례라 사업 실현 가능성 높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왓챠 측은 당시 콘텐츠프로토콜 사업을 정리하게 된 이유를 '사업 전략의 실패'와 '암호화폐 규제 및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라고 밝혔다. "가치 변동성 및 복잡한 이용 절차로 인해 일반 콘텐츠 소비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고 암호화폐에 대한 법적 규제 및 회계적 가이드라인이 확립되는 시기도 불명확하다는 리스크도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카카오 자회사 그라운드X가 지난 6월에 출시한 디지털자산 지갑 서비스 클립도 서비스 활성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클립은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에 탑재되면서, 블록체인 대중화를 앞당길 서비스로 큰 기대를 모았다. 실제 출시 당일에는 가입자 10만명을 넘으면서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하지만, 이후 가입자 증가율이나 서비스 재방문율(리텐션) 측면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지갑에 접속해 쓸만한 블록체인 서비스가 부족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산업이 침체되면서 파트너로 영입할 블록체인 서비스를 찾기 어려운데다가, 암호화폐 규제 리스크가 남아 있어 카카오 자회사인 그라운드X가 자체 암호화폐 클레이를 이용해 공격적으로 이벤트나 프로모션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페이스북이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디지털화폐 프로젝트 디엠(구 리브라)도 세계 금융 당국의 견제로 1년 반 이상 출시조차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결과적으로 규제 리스크로 인한 블록체인 산업 침체가 지속되면서, 체감할 만한 블록체인 서비스의 등장은 업계가 새해에 풀어야 할 과제로 넘어가게 됐다.
블록체인을 요소 기술로 활용하는 영역에서는 진전이 있었다. 세계 여러 국가에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발행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면서 블록체인을 기반 기술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신분증을 디지털화하고 인증수단을 다각화 하는 데도 블록체인 기반 분산신원증명(DID) 기술이 활발하게 도입됐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블록체인을 요소 기술로 활용한 솔루션 구축사업으로, 블록체인 서비스 생태계 활성화라는 업계 목표와는 거리가 있다.
산업 기본 질서 만드는 업권법 제정 목소리 커졌다
올해 국내에서는 블록체인·암호화폐 산업의 법제화가 첫 발을 뗐다. 개정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통과로 내년 3월부터 '가상자산(암호화폐) 사업자 신고제' 시행이 결정됐고, 세법 개정안에 암호화폐 과세가 포함되면서 2022년부터 암호화폐 거래 수익에 대해 20%의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블록체인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사업을 펼치기는 어려운 환경이다. 특금법과 암호화폐 과세 모두 특정 의무를 이행하도록 만든 규제법으로, 암호화폐 발행·제공·거래·투자자 보호 등 산업 전반에 필요한 기본적인 규정은 여전히 법제화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암호화폐 산업 전반을 다루는 업권법을 만들어, 산업 성장을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 업계 의견이 모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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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금법 제정을 주도한 김병욱 의원은 지난 9월 열린 '가상자산 업권법 제정을 위한 국회세미나'에 영상으로 참여해, 힘을 보탰다. 김 의원은 "특금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가상자산에 대한 우려의 시각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특금법에서 멈추지 않고 가상자산 및 관련 산업의 건전한 발전과 가상자산 투자자 및 이용자 보호를 위한 법제도 마련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 운영사인 두나무의 이석우 대표도 지난달 27일 온라인 간담회를 통해 기자들과 만나 "업권법이 나와야 (블록체인) 산업이 산업다워지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업권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명확한 기준들이 빨리 마련되길 바란다"고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