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운전면허 유효기간이 만료됐다. 운전면허를 갱신하러 운전면허 시험장을 방문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적성검사와 신체검사를 받고 새 전자운전면허증을 받았다.
일본은 10여 년 전에 전자운전면허증으로 교체했는데도 새 면허증을 발행하고 기존 운전면허증은 파기했다. 신기한 광경이다.
궁금증이 생겼다. 전자운전면허증은 어떻게 활용하는 것일까. 경찰관이 운전면허증을 확인할 때 전자단말 등으로 확인하는데 쓸까. 정답은 틀렸다다. 일본은 아직도 교통위반을 단속할 때 소위 위반 딱지라고 하는 교통위반고지서를 종이 문서에 수기로 작성해서 발급한다.
그럼 전자운전면허증은 어디에 쓰는 것일까.
내가 일본 광역자치단체 사가현에서 정보기획감으로 재직할 때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사가현은 자치경찰인 사가현 경찰본부를 총괄하고 있다. 정보기획감은 경찰본부 정보시스템 개발이나 갱신 등에 관여하기 때문에 경찰본부에서 내게 예산서를 들고 와서 검토를 요청했다.
나는 전자운전면허증이 어디에 쓰이는 지 궁금했고 운전면허증 관리시스템에 흥미가 있어 시스템의 사양을 자세하게 파악하고 싶었다. 담당자에게 기존시스템과 새로 도입하려는 시스템 설명도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소프트웨어(SW) 개발업체를 경영하던 1993년께 대한민국 운전면허시스템 도입 현장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운전면허시스템은 삼성전관이 일본전기에서 시스템을 도입해 한글화 작업을 해서 납품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사가현청이 도입하려는 시스템이 일본전기 제품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바뀌었는지 흥미로운 마음으로 시스템을 들여다봤다. 놀라웠다. 20년 전 시스템과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개발언어는 코볼이고 운용환경도 메인프레임 그대로였다.
아연실색한 나는 일본전기 개발담당자에게 “2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새로 시스템을 도입하는데 ‘코볼/메인프레임’은 아니지 않는가. 새 시스템을 개발할 의사는 없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그럴 계획이 없다”였다.
일본은 47개 광역자치단체별로 경찰본부가 있다. 각 현 경찰본부가 사용하는 면허시스템은 가나가와현 외에는 모두 일본전기 제품을 사용했다. 사실상 일본전기의 독점이었기 때문에 경쟁사가 없었고 신제품을 개발할 이유도 없었다.
본론으로 돌아와 경찰본부 관계자에게 전자운전면허증을 활용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물어봤다. 운전면허증을 위조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을 적발할 때 전자운전면허증을 단말에 올려 놓으면 경찰본부에 보관돼 있는 원본 이미지와 대조해 위조 여부를 가릴 수 있다고 했다.
나름 일리 있는 이야기였지만 다시 한번 캐물었다. “그러면 교통경찰은 단말을 소지하고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단말은 경찰본부에 비치돼 있다”는 것이다.
“의심스러운 사람을 죄다 경찰본부까지 임의동행해서 면허증 위조 여부를 체크하느냐”고 했더니 그제야 “실은 그런 이유로 전자운전면허증은 실제로 활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딱 한군데 전자운전면허증을 확인할 장소가 있다. 다름 아닌 운전면허시험장인데 이곳에서는 키오스크가 설치돼 있어 단말에 운전면허증을 올려놓으면 운전면허증 이미지가 모니터에 표시된다. 운전면허증에는 개인정보 보호차원에서 4자리의 비밀번호를 두 개 설정하는데 두 개의 비밀번호를 제대로 입력하지 않으면 그나마도 이미지는 볼 수가 없다.
일본은 전자주민카드에 전자운전면허증까지 발급하는 나라이니 이러한 것들이 훌륭하게 활용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일본은 전자주민카드가 강제 발급사항이 아니다. 주민이 필요하면 스스로 발급받는 형식이다.
현재 일본인 가운데 2000만명정도가 전자주민카드를 보유하고 있다. 전체 국민의 20% 정도다. 더군다나 전자인증서는 전자주민카드 메모리에만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전자인증서를 가진 일본인도 2000만명 수준이다.
전자주민카드를 기반으로 하는 전자정부 서비스는 전자세금납부나 연말정산 등 일부에만 활용할 뿐이다.
일본인은 어떤 목적을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활용하는데, 수단이 목적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행정 효율성과 국민 편의를 위해 전자정부를 추진하고 그 수단으로 전자주민카드나 전자운전면허증을 도입하지만 결국 전자주민카드나 운전면허증을 보급하는 것이 목적이 돼 버린다는 뜻이다.
그런 일본이 이제부터 혁신을 하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다.
스가 정부 출범 이후 일본은 코로나19 대응 관련해 정보화 후진국 문제점 등이 곳곳에서 드러나자 디지털 패전을 자인했다. 디지털정부를 구축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우고 IT특별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정부 추진을 위한 사령탑으로 ‘디지털청’ 설립을 추진하는 등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2000년부터 “한국 전자정부를 배워야 한다”는 내 주장에 일본은 “한국은 일본과 여러 측면에서 환경이 다르다”며 한국의 선진성을 애써 외면했다.
최근 일본 정부와 집권 자민당 중의원·참의원 등으로부터 강의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일본이 디지털정부 성공을 위해 한국 정부에서 배워야 할 점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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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 강의를 들은 이들로부터 정작 일본이 배워야 할 상대는 에스토니아나 미국 등 구미 선진국이 아닌 일본과 가장 유사한 정부형태와 행정 프로세스를 가진 한국이었다는 고백을 들으면 이들의 진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일본 정부가 벤치마킹을 해야 할 대상은 대한민국이다. 우리 SW 개발기업은 선진 대한민국 전자정부를 구축한 실적과 실력을 갖췄다. 일본 정부가 추진할 디지털정부 사업에서 한국기업의 선전을 기대한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