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들에게는 낯설게 들릴 이야기다. 약 20여년 전 우리나라에 IT와 인터넷 분야를 뜻하는 이른바 '닷컴 산업' 열풍이 불었다. 내로라 하는 우리나라 IT 기업들도 대부분 이때 등장했다. 말 그대로 버블에 해당한 벤처기업들은 다 도산했고, 알짜 기업들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기업·공공·개인 소비자 영역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 그렇게 생존한 20년 전 젊은 창업자들은 어느덧 중견기업 대표로 살아가고 있다. '라떼는 말이야(나 때는 말이야를 뜻하는 신조어)'라고 운을 떼며 그간 겪은 산전수전을 털어놓을 법 하다. 이들의 그간 소회와 인상 깊은 기억들을 릴레이로 들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라떼는 말이에요. 제가 색약인데, 저 대학 다닐 때인 80년대엔 색약자는 공대에 못 간다는 규정이 있었어요. 어차피 공대에 못가니 고등학교 때 문과를 선택했고 대학은 경제학과로 입학했어요. 그래도 혼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터득했고, 잡지 보고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봐가며 독학했어요. 대신 대학에서 회사 경영에 대한 것들을 배울 순 있었죠. 2014년에야 경영공학 대학원에 들어가 신분 세탁했어요.”
오재철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 대표는 21년 전 지금의 회사를 일으키던 때를 회상하다, 애초에 IT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과거 색약자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오 대표의 열망을 막진 못했다. 오 대표는 90년대 PC 통신 시대, 컴퓨터 관련 동우회로는 가장 규모가 컸던 ‘OS 동우회’의 회장을 맡으며 요즘 말로 치면 일명 ‘인싸’, ‘인플루언서’로 통했다. 개발 실력이 뛰어나서라기 보단 입담과 재치가 좋았기 때문이었다고 오 대표는 솔직히 털어놨다. 그는 90년대 한글과컴퓨터사의 ‘아래아한글 3.0B’의 광고모델로 나선 이후, 다수의 컴퓨터 관련 TV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나서는 등 독특한 이력들도 가지고 있다.
지디넷코리아는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 사무실에서 오 대표를 만나 21년간 쉼 없이 회사를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그의 경영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과거 그의 이력이 하나둘 공개될 때마다, 또 어쩐지 모르게 찰진 그의 입담에서 자칭 인싸라는 말을 수긍하게 된다.
흡사 '연방국' 같은 회사 구조…"자율과 책임 뒷받침 돼야"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 사무실을 둘러보면 여느 평범한 회사들과 다름없이 직원들이 열 맞춘 책상에 앉아 묵묵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다. 기자 같은 외부인이 느끼기엔 적막감까지 감돌았다. 그런 가운데 오 대표는 “부서, 본부가 다르면 회사가 다르다고 할 정도로 문화와 성향들이 다르다”며 “직급부터 연봉체계까지 다르다”고 설명했다. 업무에 열중하던 모습 이면엔 부서 간 팽팽한 눈치 싸움과 경쟁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날 오전 지하 1층 식당에서는 22인분 어치의 점심식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직원 150여명이 근무하는 이 회사에서 점심식사가 22인분만 준비되는 이유에 대해 오 대표는 “앉을 공간이 그만큼밖에 안돼서”라고 유쾌하게 말했다.
지난해 11월엔 창립 20주년을 맞아 전 직원이 베트남 나트랑으로 워크숍을 다녀오는 등 통 큰 복지도 눈에 띈다. 국내 직원들은 전세기를 타고 베트남으로 이동했으며, 그곳에선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의 현지 연구센터에서 근무하는 직원 17명까지 합쳐 전세버스 세 대로 이동했다고 한다.
오 대표는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의 기업 문화는 자율과 책임”이라며 “직원들에게 ‘뭘 해라’가 아니라 ‘어떤 것을 하고 싶다’는 얘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CMS 이어 에너지·스포츠 분야 확장…"기술 하나로 관통"
오 대표는 아이온커뮤니케이션 설립 이전에도 대학 졸업 후 두 번의 IT 회사를 창업한 적 있다. 1998년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를 창업해 1999년에 법인으로 전환했다. 당시엔 홈페이지 구축 및 웹콘텐츠 배포 소프트웨어 판매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용자들의 콘텐츠 소비 행태를 분석할 수 있는 ‘CMS’는 콘텐츠 분야의 고객경험관리 프로그램으로도 여겨진다. 현재도 콘텐츠 관리 소프트웨어 관련 매출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최근엔 에너지 ICT, 스포츠 ICT 등 다양한 산업군으로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에너지 분야 서비스들은 오히려 해외 매출 비중이 국내보다 더 높다. 20년 이상 웹콘텐츠 관리 소프트웨어 공급을 주력으로 해온 회사가 에너지, 스포츠 같은 전혀 다른 분야로 사업을 확장한다고 하면 다들 고개를 갸우뚱 할 수 있다. 이같은 산업군 확장은 글로벌 진출이란 최종 목표를 위해서다.
오 대표는 “대학 졸업한 지 얼마 안 돼서인 1993년에 처음 창업을 했는데 그때부터 목표가 우리나라 대표 글로벌 소프트웨어 서비스 기업이 되는 것이었다”며 “어느덧 30년 가까이 흘렀는데 지금도 그 생각엔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그 꿈을 이루면 제일 좋겠지만, 나의 후배들이 그 꿈을 이룰 수 있길 바란다”면서 “그래서 모든 서비스와 소프트웨어 출시 때부터 글로벌을 먼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의 서비스를 사용하는 곳은 누적 1천700개 고객사로, 2011년 처음 일본에 진출한 이래 전체 고객사 중 절반 가까이가 해외에 소재한다. 현재 일본, 미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스웨덴, 영국, 베트남 등에서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베트남엔 개발 인력으로만 모인 연구센터도 개소했다.
회사의 첫 사업 아이템인 CMS로 이같은 글로벌 확장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선 대부분의 카드사, 은행권 기업들이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의 CMS를 사용하지만, 해외에서는 쉽사리 받아주는 곳들이 없었다. 태국에 가서 '한국에서 제일 큰 은행인 A은행이 쓴다'며 영업해봤자, 글로벌 은행들인 씨티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쓰는 제품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라마다 다른 문법, 다른 규제를 적용받는 소프트웨어들은 애초에 이국땅에 발붙이기조차 힘들었다. 해외 어디를 가든 90%의 확률로 미국회사와 경쟁했다는 게 오 대표의 설명이다.
오 대표는 다른 분야에서 새 승부수를 띄워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회사의 핵심 기술인 '비정형 데이터 처리 솔루션'을 낫이나 호미 같은 여러 가지 기물로 변신할 수 있는 ‘철’에 비유했다. 국내 특허 43개, 해외 특허 18개를 보유했다. 탄탄한 핵심 기술을 보유했으니, 그 다음엔 해외 어디를 가든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규칙들이 무얼까 탐색했다. 고민 끝에 찾아낸 후속 아이템이 바로 전기와 스포츠였다.
오 대표는 “콘텐츠 IT 서비스와 에너지, 스포츠 서비스는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우리 회사가 갖고 있는 핵심 원천 기술이 비정형데이터 처리란 점에서 일맥상통 하다”며 “2008년 데이터를 기반으로 전력 공급의 균형을 자동으로 맞춰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현재 우리나라, 일본, 스웨덴, 영국, 말레이시아, 태국 등에 공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에너지 ICT에 안주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엔 전력회사가 한국전력 한 곳이지만 일본엔 14개, 미국엔 400여개나 있다. 그 회사들로부터 조금씩 다른 옵션을 요구받으면서 오 대표는 보다 확실한 한 가지 규칙만을 따르는 사업 아이템에 대해 또다시 고민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스포츠 ICT였다.
오 대표는 “스포츠는 올림픽 종목으로 선정되면 전 세계가 같은 룰과 용어를 쓴다”며 “태권도만 해도 발차기란 우리말을 해외에서도 발차기라고 쓴다”고 설명했다.
회사는 올해 말 스마트폰 전화번호부를 획기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서비스도 새로 출시할 계획이다. 이름과 성, 소속 회사 등이 뒤죽박죽으로 저장돼 있는데 인공지능이 알아서 재정렬 해주는 서비스다. 물론 사업 무대는 처음부터 글로벌이다.
"후배들, 내수만 파지 말고 글로벌 욕심내야"
소프트웨어 회사들 중엔 다른 기업에 합병되거나 기업 규모가 커짐에 따라 사명을 변경하는 곳이 있는데, 아이온커뮤니케이션즈는 창사 때부터 이 이름 그대로다. 창립멤버 7명이 모여 사명을 ‘아이온’으로 정했는데, 서울 안에 ‘아이원’이란 아이스크림 회사가 있어서 유사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법무사에게 ‘아무렇게나 붙여도 되니 빨리만 등록해 달라’며 재량에 맡겼는데 커뮤니케이션즈란 일곱 글자를 붙여버리면서, 사명이 세 글자에서 열 글자로 길어졌다.
회사를 어언 21년 경영한 오 대표는 2~3년 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설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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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대표는 “2~3년 안에 나는 골 넣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골을 잘 넣을 수 있는지 도와주는 사람이 될 거다”며 “빠르면 내년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 하나 빼고는, 현재 구조상 별도 본부로 돼있는 우리 회사를 여러 개의 회사로 스핀오프 시킬 계획이다”고 밝혔다.
소프트웨어 업계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잔소로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오 대표는“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으면 내수 시장만 파기보단 글로벌을 지향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며 “매출 비중이 특정 기업이나 공공부문에서 안정적으로 나오고 있다면 글로벌로 가기에 충분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