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트럼프의 선동 vs 언론의 책임

공인의 선동성 주장, 어디까지 전달해야 할까

데스크 칼럼입력 :2020/11/06 14:57    수정: 2020/11/09 14:36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미국 언론계에서 널리 회자되는 말 중 ‘He said/she said journalism’이란 표현이 있다. 누군가 한 말을 여과없이 전해주는 보도 행태를 지칭하는 말이다. 굳이 우리 말로 옮기자면 ‘맹목적 인용 저널리즘’ 쯤 된다.

최근 국내 언론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진중권 저널리즘’이 대표적인 ‘He said/she said journalism’ 사례다.

‘인용’은 저널리즘의 기본이다. 누군가에게 얘기를 듣는 건 취재 활동의 중요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때론 실명으로 인용하기도 하지만, 필요한 경우 익명을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익명 취재원도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실명 취재원과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 익명 취재원 역시 해당 사안에 정통한, 실존하는 인물이어야만 한다.

(사진=폭스뉴스 화면 캡처)

인용하고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기본이란 점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언론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저명 인사가 자기 이름을 걸고 한 주장은 여과없이 전해줘도 괜찮은 걸까? 그 주장의 근거가 미약할 경우에도 '그가 말했기' 때문에 언론은 손놓고 있어도 되는 걸까?

공인의 허위 주장, 언론은 그냥 중계해줘도 괜찮은 걸까 

미국의 많은 언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제 아무리 저명 인사라 하더라도 ‘허위 주장’을 무차별 전파해주는 건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맹목적 인용에 대해 특히 비판적인 인물이 ‘비욘드 뉴스’ 저자인 미첼 스티븐스다. 그는 매카시즘을 비롯한 많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언론의 무책임한 인용 보도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앵무새처럼 저명 인사의 주장을 그냥 옮기는 보도는 삼가야 한다고 비판하다.

분석과 해석, 그리고 통찰이 가미된 ‘지혜의 저널리즘’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 주요 방송사들이 5일(현지시간)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중간에 끊어 버리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ABC를 비롯한 주요 방송사들은 “대통령이 허위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생중계를 중단해야 한다”면서 방송을 끊어버렸다.

트럼프의 이날 발언은 꽤 충격적이다. 현직 대통령의 발언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다.

“합법적인 투표만 계산하면 나는 선거에서 쉽게 이긴다! 만약 불법적인 사후 투표를 계산하게 되면 그들이 우리의 선거를 도둑질해 갈 수 있다! (IF YOU COUNT THE LEGAL VOTES, I EASILY WIN THE ELECTION! IF YOU COUNT THE ILLEGAL AND LATE VOTES, THEY CAN STEAL THE ELECTION FROM US!)”

지상파 방송사들과 달리 CNN과 폭스뉴스는 트럼프 기자회견을 끝까지 생중계했다. 다만 CNN도 중계를 끝낸 뒤 “대통령이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는 해설을 내보냈다. 친공화당 성향이 강한 폭스뉴스도 역시 “(아직까지) 선거 부정과 관련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논평했다.

몇몇 방송사들이 ‘허위주장’을 이유로 현직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중간에 끊어버리는 건 사상 초유의 일이다. 그런 만큼 이번 사건을 둘러싼 공방은 꽤 오래 계속될 전망이다.

트럼프 기자회견이 언론에 던진 또 다른 질문 

이번 조치에 대해 비판하는 쪽에선 이런 주장을 펼칠 것 같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볼 권리가 있다. 언론의 역할은 사실을 전달해주는 것까지다. 판단은 시청자들의 몫이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전국민을 상대로 확인되지 않은 허위 주장을 하고 있는데, 언론이 그냥 이용당하고 있어선 안된다는 주장이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마구 늘어놓고 있는데, 언론이 그냥 손놓고 있는 건 책임 회피라는 비판도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미국 방송사들은 트럼프의 기자회견을 중계하면서 "거짓 주장의 전달 통로가 될 순 없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그 부분에 대해선 '맹목적 인용'을 극복한 '지혜의 저널리즘'으로 높이 평가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처리하는 방법은 조금 달랐다. 한쪽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며 그냥 방송을 중단해버렸다. 다른 쪽은 다 보여준 뒤 "근거 약한 주장이다"고 비판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책임 있는 언론의 자세일까? 기자회견 생중계를 중간에서 끊어버리는 게 맞을까? CNN이나 폭스처럼 끝까지 중계해준 뒤 “허위주장이다”고 논평해주는 게 올바른 처사일까? 그도 아니면 대통령의 기자회견이기 때문에 그냥 중계해주는 걸로 언론의 책임은 다한 걸까?

거침 없는 발언과 돌출 행동으로 논란을 몰고 다녔던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 논란은 저널리즘의 근본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언론의 책임성과 객관보도, 그리고 인용의 한계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미국의 정치는 '삼류'로 전락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나라의 언론들은 아직 기본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부러운 마음도 살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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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중간에 중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끝까지 중계해준 뒤 허위 주장을 조목조목 짚어줘야 하는 것인지. 다만 진보성향인 CNN 뿐 아니라 친공화당 성향 매체인 폭스뉴스까지 대통령의 정파적 주장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둔 점은 인상적이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