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 부재한 예술은 목자 없는 양떼와 같고, 혁신 없는 예술은 시체와 같다."
영국 정치가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처칠은 ‘냉혹한 정치가’ 이미지가 강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예술을 논하는 것이 생경하게 들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칠은 ‘2차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2016년 수상자인 밥 딜런과 함께 유이한 ‘비문학인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전통과 혁신이 예술을 지탱하는 두 개의 날개라는 처칠의 발언은, 그의 예술적 통찰력이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통과 혁신의 조화가 필요한 영역은 예술 뿐만은 아니다. 저널리즘도 상황은 비슷하다. 디지털 혁신을 수행하는 것 못지 않게, 전통을 잘 살려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저널리즘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선 '전통'과 '혁신'이란 두 개의 날개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 비전은 거창했지만, 명확한 모델 못 만들어
블록체인 기반 미디어로 야심차게 출범했던 시비(Civil)이 결국 사업을 접었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엉뚱하게도 윈스턴 처칠의 저 발언이었다.
시빌은 2017년 출범 당시 블록체인 기반 탈중앙화 뉴스 플랫폼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곧바로 블록체인 전문 투자사 컨센시스로부터 500만 달러를 수혈받으면서 힘찬 첫 발을 내디뎠다.
이듬 해엔 CVL 토큰도 발행했다. 여세를 몰아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시빌 스튜디오(Civil Studios)를 비롯한 18개 뉴스룸을 출범시키면서 ‘블록체인 저널리즘 혁명’을 선언했다.
이후 행보도 거침이 없었다. 포브스, AP등과도 연이어 제휴하면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NPR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거물급 언론인인 비비안 쉴러를 영입하면서 언론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시빌은 블록체인을 저널리즘에 접목하려는 시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생산 뿐 아니라 수익에도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시도였다. 공동 창업자인 매튜 아일스 표현대로 “대중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을 위한 블록체인 기반 미디어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문샷(moonshot) 프로젝트”였다.
야심찬 첫 발에도 불구하고 이후 행보는 여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시장 상황이 안 좋았다. 시빌이 출범하던 무렵 뜨겁게 달아 올랐던 블록체인 시장은 시들해졌다.
게다가 시빌 역시 ‘블록체인 혁신 플랫폼’ 외엔 제대로 된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운영방식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웠다. 광고에 의존하는 기존 저널리즘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쉽게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시장에서 외면을 당했다. 대표적인 것이 2018년 추진했던 토큰 판매였다. 시빌은 처음 ICO를 할 땐 2천400만 달러를 유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유치 금액이 800만 달러를 밑돌 경우엔 전액 환불하겠다고 큰 소리쳤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총 1천12명에게 143만5천491달러 어치 CVL을 판매하는 데 머물렀다. 환불 마지노 선인 800만 달러를 한참 밑돌았다. 그나마 전체 ICO 자금의 80%인 110만 달러는 컨센시스가 투자한 금액이었다.
■ 블록체인 열기가 식어버리면서 돈줄도 함께 막혀
ICO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명확한 개념 부재였다. 당시 시빌에 대해선 “뭔가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는 데 정확하게 뭘 하겠다는 건지, 다른 저널리즘 프로젝트와 어떻게 다르다는 건 지 잘 모르겠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혁신 기술을 앞세웠지만, 제대로 된 ‘전통’과 ‘내용’은 보여주지 못했던 셈이다.
이후에도 이런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블록체인 기반 미디어’라는 혁신의 겉옷을 벗기고 나면, 앙상한 뼈다귀만 남아 있는 형국이 계속됐다.
초기 젖줄 역할을 했던 컨센시스의 상황도 안 좋았다. 시빌 파산 사실을 최초 보도한 포인터에 따르면 초기 최대 투자자인 컨센시스도 계속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올 들어 2월과 4월 직원 14%를 해고했다.
시빌은 핵심적인 돈줄이 막혀버린 상황에서 다른 투자처를 찾지 못하면서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됐다.
파산 선언을 한 공동 창업자 매튜 아일스는 “우린 주목할 만한 기술을 개발했지만, 아직 전성기가 도래하지 않은 어떤 것을 하려고 노력한 셈이 됐다”고 털어놨다.
블록체인이란 혁신 기술과 저널리즘 전통을 결합하려던 시빌의 실패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콘텐츠와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이 뒷받침되지 않은 기술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기술 만의 차별화'로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또 다른 교훈도 함께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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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예술을 저널리즘으로 살짝 바꾼 처칠의 금언이 자꾸만 뇌리에서 맴돈다.
"전통이 부재한 저널리즘은 목자 없는 양떼와 같고, 혁신 없는 저널리즘은 시체와 같다."